좋아했던 형 이야기 Vol.[7]

한국조폐공사 작성일 21.09.30 16: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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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1년차가 된 어느 해 1월,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도 없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3년간 잉여처럼 살아온 것 치고는 용케 졸업 학점을 이수하고 사람에 가까운 학점을 이수하긴 했지만

 

애초부터 내가 마음을 먹었던 계획(영어, 고학점, 선수학습)은 100을 기준으로 5도 완성하지 못했다. 부모님이 아르바이트

 

를 하시면서까지 마련한 등록금은 업진살 살살녹듯 녹아 사라졌으며 남은 것이라곤 천장을 뚫을 것 같이 높아진 간수치와

 

10일을 굶어도 끄떡없을 만큼 축적된 두꺼운 지방층 뿐이였다.

 

백수 1일차가 된 나로서는 그제서야 조급함이 생겨났고, 부모님께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드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하기로

 

결정하였다. 못난 아들 둔 부모님 조금만 더 고생하시면 나중에 효도하겠다는 쌍놈들 단골멘트를 통해 부모님을 설득했고

 

숙식은 친했던 군대 고참집에 푼돈 조금 보태주고 거머리 생활, 학원은 지하철로 왔다갔다 하기로( 월곡에서 강감까지…)

 

최소한의 경비로 7개월을 버텨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무작정 고참네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렇게 부랴부랴 상경한 서울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고, 공부 계획 역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 수험 생활은 점점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고 종전에는 결국 인터넷 강의로 돌리고 어영부영

 

제대로 듣지도 않는 날이 일쑤가 되었다. 수능 재수할 때 처럼 기계같은 계획성은 세월의 유혹속에 찌들어버렸고

 

의지 역시 작심삼일을 넘지 못하고 하루 하루를 멍청하고 쓰레기같이 보내면서 그렇게 5개월이 흘렀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꾸준히 전화하면서 의지했던 형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던건지, 귀찮았던건지 아예 연락하지 않았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쳤으니 당연히 점수가 잘 나올 리가 없었다.

 

택도없는 점수를 받고 나서야, 나는 어느정도 상황 파악이 가능해졌고, 이대로 백수 2년차로 접어들게 된다는 사실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그제서야 형에게 연락을 했고, 마침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형과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근 4년만에 만나는 형의 모습은 예전처럼 변함이 없었지만, 형 역시 고된 학교생활에 시달렸는지 눈빛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형 : 덕훈이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시험은 좀 어땠어? 이번에 괜찮을 것 같아?

 

덕훈 : 아뇨 형, 완전 망했어요 ㅜ(사실 망할것도 없지만).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봐요. 

 

형 : 그래? 어떤 과목에서 힘들었는데? 형이 피드백 해줄테니까 어려운 부분같은거 있으면 얘기해봐. 이번 한번만

 

치고 포기하는거 아니지? 보통, 재수, 삼수는 기본이니까 너무 기죽지 않아도 돼. 형 친구도 이번에 시험 또 치는걸 뭐

 

형은 내가 정말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형이 전화로 이야기 할 때마다

 

대충 둘러댔고, 형도 학교 공부에 바빠서 구체적으로 피드백을 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형은 내가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

 

지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형은 내가 했던 공부방법이나 정신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얼굴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덕훈: …그래서 이렇게 된거죠뭐. 제가 안일하게 생각했나봐요. 뭐 좀더 노력해봐야죠 ㅋㅋㅋ. 아니면 공무원

 

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ㅋㅋㅋㅋ.

 

형 : 형 생각엔 니가 좀더 노력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닌것 같은데? 너 도대체 뭔 생각으로 서울까지 올라와서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있었냐? 너 쳐돌았냐? 형보다 집에 돈 많아?

 

형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이때까지 한번도 하지 않았던 거친 말들을 쏟아붇기 시작했고, 나는 당황한 채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형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형 : 내가 보는 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잘못 본 것같네. 형이 예전부터 열심히 해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니가 이 길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했나보다. 아직 영어 점수도 없어? 

 

너 지금 상태로 공부하면 백년을 해도 못붙어. 형이 예전부터 너 멘탈 약하다고 뭐든지 하려면 끈기있게 해라고 말 한거 그냥 흘러들었냐?

 

공무원 시험이 의대 시험보다 쉬운것 같냐? 그럼 뭐한다고 공시생들이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공부하고 앉아있겠냐

 

너처럼 대충하다 말겠지. 내가 봤을땐 장기 집중력이나 공부 시간으로 보면 의대공부보다 공무원 시험이 훨씬 어려워

 

괜히 의대 공부한다고 바람들어서 다른 시험이 쉬울것 같다는 착각하지마. 너 지금 그 상태로 공부하면 죽도밥도 안돼.

 

정곡을 후벼파다 못해 뼈를 갈아버리는 형의 직구에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반박할 말도 없었고, 댈 핑계도 없었다

 

형 : 형이 모르는거 있으면 전화하랬잖아. 내가 준 책들 보기는 했냐? 난 니가 정말 아깝게 떨어져서 힘들어하는줄 알고

 

왔는데 너 말 들어보니까 진짜 형 실망했다.

 

형은 혼자서 잔을 들이키며 피곤한 듯 눈을 감았었다. 나는 핑 도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자리에 조금 물러서서 고개를

 

돌리고 담배를 태웠다. 조금씩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형이 잔을 채워주며 손을 들었다.

 

형 : 형이 흥분해서 미안하다. 그냥 덕훈이 보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는 놈인데, 그렇게 못하니까 답답해서 그래.

 

형이 너 착하고 성실해서 정말 친동생같이 좋아하는거 알지? 너네 부모님도 형이 뵀었잖아. 다들 좋은 분들이시고, 너만 믿고 계시는

 

분들인데 니가 그렇게 안일하게 행동해서 되겠냐? 어리버리한 덕훈이 제대로 못챙긴 형 잘못도 있지만 이제 너 앞가림은

 

너가 스스로 해야되는 나이잖아. 형 실망시키지 마라 형 섭섭하다

 

덕훈 : 네… 형… 미안해요.

 

형 : 내가 아니라 너한테 더 미안해해야지. 미트(시험)공부 어려워도 천재를 요구하는 시험 아니야. 공무원 시험보다

 

사람도 훨씬 적구. 서울권 의대는 무리지만 노력만 하면 지방쪽 의대는 충분히 도전해볼 수 있어. 형은 덕훈이 믿으니까

 

이번엔 정말 열심히 해봐. 형이 도와줄 순 있어도 니가 저런 마인드면 그게 아무 의미가 없어. 부모님께도 죄송하다 하고

 

한번만 더 도와달라고 말씀드리구. 정말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으면 형이 돈은 빌려줄게.

 

덕훈 : 아니에요 형. 정말 이번에는 제 힘으로 열심히 해 볼게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막차 시간이 다가와서야 형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형은 내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형이 두드린 엉덩이 바지 주머니 뒤쪽에는 만원권 지폐 다섯장이 구깃하게 접혀 있었다.

 

나는 형이 타고간 택시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었다. 이제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점에 정말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계속 마음속에 대뇌였다.

 

그 후로 나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집과 독서실을 병행하며 예전 수능 재수 시절로 돌아갔고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모든 전자기기를 끊은 채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다.

 

물처럼 달고살던 술도 완전히 내치고 밥먹는 시간, 하루 다섯번의 담배타임 외에는 새벽 2시까지 오로지 교과서와 사랑을 나누었다

 

중간중간 집전화로 형에게 공부 과정과 잡다한 이야기를 했고, 형은 격려와 함께 가끔 용돈을 보내주기도 했다.

 

그렇게 미친듯이 8개월을 경주마처럼 달렸고 나는 8월 마지막 주 내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험을 악독같이 준비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철썩같이 시험에 붙기는 개뿔. 작년과 비교하여 그나마 좋은 점수를 받긴 했지만 합격에는

 

형 못미치는 점수를 받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실 그간 베이스가 너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수순이였지만 내가 고생한 댓가치고는 너무 참혹했었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부모님의 연락을 차마 받지 못하고 나는 형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알려주었고, 그간 고생한

 

내 생활을 알았던 형은 수고했다라는 말 한마디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을 실의에 빠져 술만 마시던 연말의 어느 날…

 

나는 발신없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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