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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더리흐트 맨유 이적 비하인드 스토리
https://www.nytimes.com/athletic/5705404/2024/08/22/matthijs-de-ligt-manchester-united-inside-deal/ 최종 서류 작업은 예상보다 늦은 8월 12일 저녁에 완료되었지만, 최종적인 차질은 없었습니다. 거의 10년 동안 유럽 최고의 젊은 센터백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던 마티스 더 리흐트는 이번 여름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처음 가능성이 제기된 기회주의적 이적에 힘입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가 되었고, 결국 4,500만 유로에 추가적으로 5백만 유로를 더 얹어 최종적으로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날 25살 생일이었던 더 리흐트에게는오랜 시간 기다려온 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알렉스 퍼거슨 경의 맨유와 리오 퍼디난드와 네마냐 비디치의 센터백 파트너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네덜란드 출신의 또 다른 영웅인 야프 스탐은 2001년 여름에 맨유를 떠났지만, 그는 맨유와 자신이 닮고 싶어 했던 선수와의 인연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 리흐트는 지난 시즌 여름에 영입된 김민재, 우파메카노(1월 이후) 에릭 다이어와의 경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위해 싸워야 했지만, 출전 가능한 22번의 리그 경기 중 16번을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여름에 감독 토마스 투헬이 떠난 후, 더 리흐트가 24-25년 시즌콤파니의 지휘 하에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70,000명이 넘는 바이에른 팬이 서명한 잔류 청원은 그의 입지를 증명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유일한 견해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유로 대회 기간 동안 구단 내 일부에서는 그의 리더십을 인정하면서도 약한 발을 이용한 수비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구단의 입장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그러나,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익명으로 말한 더 리흐트와 가까운 한 소식통에 따르면, 그의 캠프의 인식은 바이언이 그의 전망에 대한 대화를 하는 동안 "게임을 하고있다"며그가 떠나기를 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더 리흐트는 콤파니를 만나 자신이 마치 매물로 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더 리흐트 캠프에 따르면, 더 리흐트는 콤파니로부터 이번 결정에 책임이 없으며 자신은 "1순위 수비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구단 차원에서 더 리흐트의 퇴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선택이 내려졌다는 것이 그들의 인식이었습니다. 바이에른 대변인은 디 애슬레틱의 연락에 대해 콤파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습니다. 더 리흐트에게 유로는 이미 힘든 시기였습니다. 무릎 부상 이후 최고의 컨디션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지만, 네덜란드가 준결승에 진출하면서 스테판 데 브리가 버질 반 다이크와 함께 중앙 수비를 맡는 바람에 그는 대회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했습니다. 네덜란드 대표팀에서 21경기에 함께 선발 출전했던 반 다이크와 더 리흐트는 지난 두 시즌 동안 단 4번만 호흡을 맞췄습니다. 유로 대회에서 로날드 쿠만 감독은 두 선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2018년부터 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반 다이크를 선택했습니다. 더 리흐트는 사실상 리버풀 주장의 백업으로 밀려났고, 이탈리아 챔피언 인테르의 32세 데 브리가 대신 선발로 나섰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고국 아약스에서 함께 일할 때 더 리흐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주었던 감독과 맨체스터에서 재회한다는 것은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더 리흐트와 텐 하흐는 여전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습니다.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문자를 주고받았고, 바이에른에서 더 리흐트의 상황을 알게 된 맨유는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텐 하흐가 영입을 원했지만(1월에 아이디어를 내놓았음) 더 리흐트의 놀라운 가용성과 비교적 적은 이적료로 유나이티드 영입팀은 감독과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더 리흐트의 스펙트럼은 젊은 선수를 위한 그들의 모델에 적합했고, 그의 성격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클럽은 이미 몇 년 전부터 그에 대한 보고서를 시스템에 보관했습니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감독 교체 후보를 물색한 후 텐 하흐와 신뢰를 쌓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습니다. 텐 하흐는 지난 몇 주 동안 댄 애쉬워스 신임 스포츠 디렉터와 훈련장 사무실을 나란히 두고 좋은 관계를 형성해 왔습니다. 하지만 결국 더 리흐트는 텐 하흐에 의해 영입된 것이 아니라, 성과와 재정적 관점에서 합리적이라는 모두의 공동 결정을 통해 영입에 성공했습니다. 바이에른은 당초 5,500만 유로였던 더 리흐트의 몸값을 낮췄고, 맨유는 여전히 상당한 규모의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클럽 동료인 누세르 마즈라위의 몸값 협상에도 열려 있었습니다. 모로코 국가대표 풀백 마즈라위와의 계약은 더 리흐트에게 조건부로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두 선수의 공동 에이전트로 인해 두 선수의 이적을 동시에 완료할 수 있었고, 맨유는 한 명의 비용으로 두 명의 우수한 선수를 효과적으로 확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이에른에서 더 리흐트의 상황이 분명해지자 다른 클럽들의 경쟁적인 관심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챔피언 파리 생제르맹과 스페인의 거물 바르셀로나가 더 리흐트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두 팀 모두 맨유가 유력한 후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죠. 더 리흐트의 텐 하흐와의 재결합에 대한 열망과 잉글랜드 클럽에 대한 애정이 결정적인 요인이었으며, 스페인의 유럽 챔피언인 레알 마드리드는 그에게 어려운 결정을 강요할 수 있는 유일한 팀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로보트카작성일
2024-08-2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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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터] 별거 아닌 별거 가정 (15) - 20년 만에 작성하는 이혼서류
동생과 내가 차례로 결혼하면서 주민등록등본에서 이름이 하나씩 떨어지고 등본에는 엄마 아빠 둘의 이름만이 남았다. 아들딸이 모두 서류상으로 독립을 이루자,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미뤄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이혼을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혼을 하겠다는 의사를 굳이 아들에게 내비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이혼에는 내 역할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서류 작업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처럼 서류 작업이라면 하나같이 싫은 소리를 냈다. 때문에 코로나 생활지원금이나 연말정산 등을 신청할 때면 언제나 아들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와 둘이 있으면 어색하다는 이유로 나보고 지방법원을 같이 가자고 했다. 나 역시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쩔 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와 셋이 지방법원에서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 엄마와 아빠는 내 결혼식 때 이후로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지방법원 입구에서 엄마는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아빠에게 인사했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명랑해서 오히려 어색한 분위기가 있었다. 아빠는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같은 무뚝뚝한 말투로 엄마의 인사를 받았다. 아빠는 평소에도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편이었기에 아빠의 그런 모습이 내 눈에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20년을 떨어져 지낸 관계를 마무리하는 데는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재산분할이라던가 양육권 같은 까다로운 문제도 걸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마치 등본을 떼러 온 사람들처럼 이혼 절차를 밟았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얼굴로 합의이혼 서류를 작성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내게는 조금 기이해 보일 정도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은 마치 느슨하게 엉켜 있는 실타래를 푸는 작업 같았다. 실타래의 끝을 살며시 당기자, 그것은 오래전부터 그런 손길을 기다린 것처럼 저항하지 않고 스르륵, 하고 풀렸다. ―――――――― 한때 유행한 '졸혼'이라는 단어가 있다. 졸혼(卒婚)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협의의혼접수처에 앉아 이혼 서류 작업을 거들면서, 평소에는 신경 쓰지도 않았던 그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이거 완전히 우리 엄마 아빠를 위한 말이잖아, 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 부모님은 졸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전부터 졸혼을 경험한 셈이었고, 지방법원에 모인 그날 엄마와 아빠는 졸혼마저 졸업하고는 서로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 앞에 놓여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각자 가족관계증명서와 혼인관계증명서를 떼고,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와 이혼신고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부모님의 별거가 끝났다. ―――――――― 이혼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잠시 멍하니 서서 바람을 쐬었다. 아빠는 구석에서 담배를 피웠고, 엄마는 누군가에게 연락이 온 듯 핸드폰을 봤다. 나는 그런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그저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유난히 바람이 시원한 날이었다. 아빠는 담뱃불을 끄고는 헤어지기 전에 아들과 셋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점심은 무슨 점심이야, 나 일 있어." 엄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빠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빠 역시 멋쩍은 표정으로 엄마를 보냈고, 별수 없이 나와 둘이 지방법원 근처에 있는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빠는 신경 쓰지 말고 아내랑 같이 행복하게 살아.“ 점심을 먹으면서 아빠는 문득 내게 말했다. 아빠의 말에 나는 괜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짧은 대답을 내뱉고는 앞에 놓인 애꿎은 반찬들만 뒤적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별은 이미 오래전 일인데, 예상을 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혼 절차를 끝내고 서글픈 감정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봤지만 뾰족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뒤에서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는 아빠의 말이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 엄마 아빠가 서류 작업도 못하는 철부지라고 생각했는데, 이혼 절차를 마치고 오히려 내가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엄마와 아빠는 위로의 말을 건넸고, 정작 그들은 이런 일에 위로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내 생각보다 더 의연한 어른이었다. 지방법원에 갈 때만 해도 내가 부모님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얄궂은 줄 알았던 인생은 단지 내가 인생을 얄궂은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얄궂은 시선이 담긴 색안경은 벗어던지고 엄마와 아빠를 오롯이 바라보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이별을 한 채로,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면서 각자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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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공일기장] (이벤트) 은행까지 오게 된 썰
이벤트 시작일부터 쭈욱 짱공님들의 경험을 죄다 읽어 보다가은행관련 썰은 없는 것 같길래 나름 도움이 될 것 같아 몇 자 적어봅니다. - 대학다니며 매 학기 방학마다 알바를 했습니다.EXR 의류매장, 파리바게트, 서브웨이, 미스터피자, 영어학원강사 등 2~3개월 알바 받아주는 곳이라면아무데다 들어가서 일을 했었고, 나름 여기저기 일한 경험이 살면서 도움이 되긴 합니다. 군대 제대를 하고 삼성SDS라는 곳에서 6개월 인턴을 합니다.인천공항에 여러분들이 이용하시는 자동입출국시스템을 제작한 곳인데, 여권 칩 속에 내장된사진과 실제 기계에서 찍히는 얼굴의 싱크를 맞춰서 90~95% 이상이면 통과가 되게끔 기계를만들어서 테스트를 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현재는 지문인식하고 사진 1장 저장하고 끝나는 프로세스)이 회사 다니면서 처음으로 책임, 수석 이런 직급들을 들어봤네요.결론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실패했습니다. 여권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갭이 너무 컸음.(외국인과 한국 남성의 경우 90%이상 나오지만 한국여성은 너무 차이가 많이나서 도저히 95%를 못 맞춤.)여기 다니면서 국토부, 법무부, 공항공사 분들이랑 일 해봤던게 또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아 이 회사는 9시~7시 정도면 퇴근을 했고, 점심회식을 좀 자주 했던 기억이 있네요. 아웃뷁 이런 곳으로 다시 3학년 2학기 방학때 현대로템에 인턴을 들어갑니다.인천공항 제3터미널 컨베이어 시스템 만들 회사 찾는다는 공고를 인천공항에서 냈고, 거기에 참여하기 위한프로젝트팀이 결성되고 추가적으로 필요한 인력을 인턴으로 뽑아 넣었는데, 거기에 들어가게 됩니다.여기선 하루종일 서류작성만 했습니다. 여기서 서류작업만 했던게 또 영어랑 워드실력 키우는데 도움이 됐습니다.직원이 한글로 서류를 만들면 이걸 영어로 만들고, 한글서류와 영어서류를 동일한 스타일, 동일한 구간에 배치되도록수정을 해주는 작업인데 이게 은근히 짜증나고 힘듭니다.여기는 8시30분~22시까지 일을 합니다. 입찰서류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더 빡세게 일했고, 일이 끝나면 사람들이죄다 다른 지방에 있다가 공항근처 오피스텔 얻어서 생활을 하니까 맨날 술마십니다. 빡셈빡셈.프로젝트팀 끝나고 다시 복귀하면 업무량이 어떠냐고 물어봤는데 정시퇴근은 꿈도 못 꾼다고 하더군요. 삼성SDS와 현대로템 두 군데 모두 좋은 회사이긴 했는데 제가 경영학과를 전공하다 보니, 취업 기회가 있었음에도포기를 하고 대학교를 마저 다녔습니다. 삼성SDS는 제가 뭐 소프트웨어관련 쥐뿔 아는게 하나도 없어서 포기했고,현대로템은 일하는게 너무 빡세서 포기햇습니다. 현대로템 다니면서 돈은 좀 적게 받더라도 6시 퇴근하는게 인간의삶을 영위하는데 훨씬 좋다고 판단내렸음. (애기아빠가 가족이랑 떨어져서 이주일에 한 번 얼굴을 보는데, 이 사람의낙이 점심에 아들이랑 영상통화하는거 하나라는 얘기를 들었을때 확 느낌이 왔음) 여차저차해서 14년도 대학을 졸업하고 당해 상반기 공채를 노렸고 지금 아이디처럼 은행을 다니고있습니다.이제 14년 입사에 지금까지 대출업무를 보고 있고, 이직각만 쎄게 보고있습니다.은행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좀 해볼까 합니다. 1. 돈은 꽤 줍니다. 신입사원 기준 4천이상은 받는 것 같습니다.2. 퇴근은 보통 7시 안에 합니다.3. 점마다 좀 틀린 부분이 있긴 한 것 같은데, 5일 특별휴가가 있습니다.4. 퇴직이 빠릅니다. 저는 이제 45살정도로 보고있습니다.5. 제자리걸음입니다. 나 자신의 스펙 향상이 없습니다. 맨날 똑같은거 처리의 반복. 최근에는 4번이랑 5번 저 사유로 고민이 많아서 이직을 열심히 알아보고 있습니다.점점 시스템이 선진화되면서 창구에 사람이 있을 필요가 없어짐이 당연해지고, 그러다보면퇴직각이 훨씬 빨리 잡히게 될 게 눈에 선합니다.앞으로 10년간은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긴 하는데, 그 이후에는 노답입니다. 은행에서 배워먹은걸론다른데서 일하는데 도움이 될 게 없습니다.삼촌도 국민은행다녔다가 퇴직을 했는데, 제게 했던말이 절대로 은행은 가지 말라는거였는데14년도 취직이 너무 힘든시기라 별 생각 없이 들어왔다가 꼼짝없이 잡혀버린 케이스라고 해야될까…삼촌은 퇴직하고 지금은 그냥 집에서 집안일합니다. 사업을 해봤던 적도 없고 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집에 있는게 도와주는 거라며, 외숙모가 돈 벌어오는거랑 연금으로만 살고있습니다.그래도 삼촌은 거의 50살까지 다녔으니까 망정이지 지금 제 시대에는 50살까지 은행에 못 있을 것 같습니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네요.딱 한마디만 하자면 은행은 비추다.
KB뱅크작성일
2021-03-21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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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상담] 이직관련 형님, 동생분들의 조언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형님들 동생분들 매일 눈팅만 하다가 이렇게 글을 적어 봅니다. 현재 저는 이직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30대 초반입니다. ---------------------------------------------------------------------------------------------------------------------- 현 직장 내용 연구소(건축자재 관련 회사)(직원 250명 / 연매출 1천4백억( 매출 및 직원 수 계열사 총합) 연봉: 3,300(야근수당 포함) 근무일주5일(4달에 한번 당직, 당직비 5만원 이하) 출 · 퇴근- 8시 ~ 6시30분(정시퇴근 5시 이며, 나머지는 야근 / 근로계약서에 명시...강제야근) 출퇴근거리: 왕복 40KM- 위치 산골짜기 주요 업무 내용- 건축자재 관련 정부 및 기업 R&D 제품 개발을 하고있으며, 주업무- 개발 품 도면 작업90% / 서류10% ---------------------------------------------------------------------------------------------------------------------- 이직 직장 한샘서비스원 현장 시공 관리직- 직원 150명 연봉: 3,300(야근수당 포함) 근무일주5일(느낌이지만 시공관련으로 주말에도 해야할것같음) 출 · 퇴근- 8시 ~ 5시(현장시공분들은 5시 퇴근이니...맞춘 듯 합니다) 출퇴근거리: 집근처- 도심지 주요 업무 내용:- PM(시공 관리) 주업무- 인테리어 직원이랑 똑같은 것 같으며, 시공팀 스케쥴 및 공정 계획 및 현장 마감 연봉 신입기준3,000만원 수준 협의계약직 1년, 추후 정규직 전환 ---------------------------------------------------------------------------------------------------------------------- 한샘은 아시다 시피 중견기업이지만, 한샘서비스원은 계열사입니다. 복지 및 처우는 한샘본사와 비슷하다 하지만 잡플래닛 결과 진급 및 연봉, 시간외 수당은 못받는다고 써있네요... 현 직장은 시장이 굉장히 좁습니다. 이곳에서의 경력은 동종계열 국내 약 3~5개 업체에서만 인정되며, 그 외 직무에는 경력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시장이 너무 좁아 이곳에서 짱박힐 생각이 아니면 나중에 이직 시 큰 타격이 있습니다. 캐드 및 스케치업, 캐드3D, 프로이(3D)등 프로그램을 다룰줄 압니다.특히 캐드관련은 저는 잘 다룰줄 알지만 이곳에서의 업무는 전문건설 및 기계쪽이 아니여서 애들 장난하는 수준의 업무입니다. R&D관련의 서류 작업은 매우 유용하며, 현재 서류쪽으로 배우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연구소 자체의 학력이 석사 이상이기에 현재 학사의 학력으로는 무리가 있고, 야간대 및 학점은행제를 통하여 석사를 취득할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의지 및 경제력 차이로 예정은 없습니다. 전문건축 설계 / 기계관련 설계가 아니라 이직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에반해 한샘의 시공관리자에서 제일 문제는 계약직 후 정규직 전환인데 확실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직을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도전해볼만하다 생각은 있어 큰 고민입니다. 현직장 취업전 및 학교에서 인테리어 직종에서 1년정도 조금의 경험이 있으며, 시공 준비 -> 마감까지의 공정은 알고있고, 마감이라는게 어느수준인지도 알고는 있습니다.(카페, 핸드폰 매장, 치과, 아파트 리모델링 정도) 눈대중으로 많이 봐왔습니다. 질문의 펙트를 드리자면, 시장이 좁은 현직장에서 버티느냐 VS 계약직이라 위험하지만 도전해보냐입니다. 일단 서류전형은 합격해서 면접 예정입니다. 형님들 및 동생분들의 조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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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고개숙인 아베..수출규제·코로나 잇단 헛발질로 韓日 '희비'
강제징용 빌미 노골적 무역보복..국산화·불매운동 '되치기'올림픽 욕심이 자초한 禍..명분·실리 잃고 방역도 실패 아베 신조 일본 총리? AFP=뉴스1 ? News1 우동명 기자(서울=뉴스1) 심언기 기자 = 냉랭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한일 양국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지난해 노골적 수출규제 무역보복은 한국 정부의 국산화 추진 되치기와 국민들의 불매운동으로 일본 정부를 당황시키고 있다.코로나19 국면에서도 도쿄 올림픽 강행을 위해 안이한 인식과 부실대응으로 일관, 방역 실패는 물론 국제사회 신뢰도 추락을 자초했다는 평가가 나온다.◇정치·외교 분쟁에 경제보복 카드…日 기업만 피해 '부메랑'대법원은 지난 2018년 10월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강력히 항의하는 일본 정부에 맞서 우리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일본은 외교·안보·경제 분야를 가리지 않고 보복에 나섰다.일본 정부는 지난해 7월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정의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 대한 수출을 규제했다. 한국을 수출심사 우대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도 제외했다.초기 우리 반도체·디스플레이 기업들은 크게 당황했지만, 국내 중소중견 제조업체들이 대체품 개발·생산에 착수, 성공하면서 이같은 걱정은 기우에 그쳤다. 오히려 일본 기업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고, 안정적 매출을 담보해온 장기 공급처를 잃을 처지에 놓였다.정부는 일본 무역보복을 계기로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추진에도 발빠르게 나섰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소재·부품·장비 강소기업 100' 프로젝트를 통해 대대적 육성 정책에 나섰고, 산자부·과기부와 공동으로 대규모 R&D 정책도 잇따라 내놓고 있다.핵심 소재를 일본에 의존해온 대기업들 역시 일본 무역보복을 겪으며 정치·외교적 상황이 수급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됐다. 이후 반도체용 포토레지시트는 유럽 등지로 공급처를 다변화했고, 액체 불화수소는 국산품으로 완전히 대체했다.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빌미로 한 무역보복은 우리 국민들의 반일 감정 '역린'을 건드려 대대적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졌다. 잇단 구설수에 오른 유니클로는 매출에 큰 타격을 입었고, 최근 일부 판매가 재개되기 시작한 일본산 맥주도 한때 매대에서 자취를 감추기도 했다. 여행 보이콧 운동으로 아베 정부에게는 지방정부의 항의가 빗발치기도 했다.한미일 군사동맹에도 파열음이 일었다. 일본 측으로부터 얻는 군사정보의 질과 속도가 뒤떨어진다고 판단한 우리 정부는 지소미아(GSOMIA·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를 통보하며 강경대응에 나섰다. 지소미아는 막판 미국의 중재로 가까스로 조건부 연장됐다.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올림픽 매달리다 놓친 코로나19 골든타임…행정력도 도마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양국의 희비는 더욱 극명하게 엇갈렸다. 대유행 조짐이 보이던 2~3월 골든타임에 방역 총력체제를 구축한 한국과 도쿄 올림픽 개최강행을 염두에 둔 일본의 소극적 대응이 결정적이었다.한국은 대구 신천지발 확산으로 한때 중국에 이어 세계 2위 감염국이란 불명예를 얻었다. 각국이 한국인 출입국에 빗장을 걸어닫고, 경기가 급속하게 얼어붙었지만 방역당국은 강력한 확산방지책을 뚝심 있게 밀고나갔다.마스크 착용과 손씻기 운동, 사회적 거리두기와 더불어 개인정보 보호 논란을 무릅쓰고 확진자 동선 공개라는 극약처방을 내놨다. 메르스 사태 경험을 토대로 한 검체키트 개발·상용화가 신속하게 이뤄졌고, '드라이브 스루'와 같은 각종 아이디어도 빛을 발했다. '코로나19 3법'은 정부 주도 방역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반면 일본은 국제사회의 우려 속에서도 도쿄 올림픽 개최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으면서 방역에 소극적이었다. 불안감 차단을 위해 의도적으로 검체검사 숫자를 축소했다는 의혹은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다. 위생 문제가 지적된 '아베 면마스크'는 조롱거리로 입길에 오르내렸다.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 무산 또는 연기시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올림픽 연기에 따른 피해금액은 7조원 이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IOC와 각을 세우면서까지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그러나 도쿄올림픽은 끝내 연기됐고, IOC 및 세계 각국과 코로나19 안전성을 두고 설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일본은 역풍을 맞는 모양새다. IOC는 도쿄올림픽 연기에 따른 지원금으로 8억달러(9800억원)을 책정했는데, 이중 일본에는 8000억원 가량이 지원돼 예상 피해금액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일본외국특파원협회(FCCJ)는 회보를 통해 이같은 일본 정부 행태를 꼬집은 도쿄 올림픽 로고와 코로나19 합성 이미지를 게재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2021년으로 미뤄진 도쿄올림픽이 끝내 개최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백신 개발 시점이 관건이라는 지적이다.재난지원금 지급을 두고도 양국 국민들의 지지와 비판은 이어진다. 지난달 30일 나란히 예산 승인을 받았지만 전산행정을 통해 재난지원금 신청이 간편·신속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온라인 신청이 미숙해 관공서 서류작업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의 이같은 아날로그식 행정은 코로나19 확진 통계의 잇단 집계오류 원인으로도 지적되고 있다.eonki@news1.kr https://news.v.daum.net/v/20200522060602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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