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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자작]한국교회목사님들이 절대 말 안해주는 한국교회이야기-3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제가 휴가철이다보니, 조금 내용의 양이 적을 수도 있습니다. 휴가가 어째 체력적으로 더 힘듭니다.ㅠㅠ 이번편은 한국 개신교인의 DNA 중에 ‘기복신앙’에 이어 또 하나의 큰 뼈대를 이루고있는 ‘반공주의’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21세기인 요즘에도, 예배 시작을 알리는 대표기도에서나, 설교시간, 끝나는 기도, 심지어 축도에서도 갑자기, 진짜 뜬금없이 “그러니까 이 땅에 만연한 악한 공산주의 사상을...또는 유물론을..또는 공산주의세력을....” 뭐 이런 워딩이 숨쉬 듯 튀어나옵니다. 그냥 듣고만있으면 여기가 남한인지 북한인지 헷갈릴정도에요.. 그래서 알아봤습니다. 왜 이 양반들이, 특히 목사들과 장로들같은 소위 교회의 핵심지도부층이 아직도 ‘반공주의’에 벗어나지못하는 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고, 왜 아직도 계승되어오고 있는가? 시작은 1945년 일제패망 후, 해방을 맞은 북한, 평양에서 시작됩니다. 평양, 김일성한테 빼앗긴 ‘동양의 예루살렘’ 해방 후 북한은 소련의 공산화가 시작되면서, 김일성이 슬슬 센터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 당시 공산당은 뭐 진짜 그 당시 공산주의는 유물론에 입각해서 진짜 개신교인을 탄압했습니다. 그 때 김일성의 티배깅이 대단했던게, 예전에도 제가 강조했듯이,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별명으로 일제강점기때는 개신교로 흥했다고 했잖아요? 1907년 대부흥이 있었던 교회를 포함하여 왠만한 교회를 다 쓸어버리고, 특히 대부흥때 그 교회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버립니다.ㅎㅎ 우상숭배를 죄악시 하는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뭐 눈이 돌아갈 만 하긴합니다. 그 외에 소련군에 대한 개신교인의 범죄제한을 풀어버려 북한의 개신교인에 대한 범죄행위가 대단했다고 합니다.(출처: 한국전쟁 전후 개신교 탄압과 학살 연구 - 박명수 / 서울신대 명예교수 논단 : 교회와신앙 / 故 한경직 목사가 증언한 해방 후 북한, '비밀청원서' 발견 – 강려원 / YTN) 서북청년단의 결성 그렇게 1945년 후반, 북한의 공산화를 피해 장로교 출신의 ‘한경직‘이라는 목사가 월남하여 서울에 내려와 나중에 우리나라 최초의 대형교회가 되는 ’영락교회‘를 세웁니다. 그 뒤로 영락교회는 북한의 월남민의 중심네트워크 역할을 하면서, 점차 세를 불려나갑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귀국하여 유창한 영어실력에 같은 개신교신자이면서 야심가인 한 정치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승만’입니다. 법보다는 주먹과 칼이 난무하던 무법시대, 쓸만하게 조용하고 은밀한 일에 믿음직하게 써먹기 좋은 주먹들이 필요했는데, 영락교회의 북한에 대한 증오가 쌓인 패거리들이 이승만 입장에서는 딱 좋은 패였죠. 게다가 서로 신사참배에 얽힌 친일에 대한 부채의식도 꽤 커서, 이를 덮을 만한 공공의 적이 필요한 상황에서, ’ㅃ갱이‘프레임 만 잘 씌워주면 과거가 어쨌든 덮어놓고 뭐든 잘 지나갈만한 상황이었죠. 그리고 1946년 11월 30일, 서울 YMCA 강당에서 영락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단‘ 또는 ’서북청년회‘ 라고 불리는 한국개신교 역사상 가장 최악의 단체가 결성됩니다.(출처 : ‘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 허미경 선임기자 / 한겨례) 서북청년단의 악행 - “마치 나치와 KKK를 합친 것 같다. by 미군정청.” <제주4.3사건 기록물 - 여기 사진의 인물들은 촬영후, 모두 사살당했습니다.> 뭐 그 뒤로 이 ‘서청’이 직접 또는 연루된 악행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주 4.3사건 : 사망자 3만명 추정 여순사건 : 천명 추정 보도연맹사건(일부가담추정) : 수천~수십만명 추정 거창양민학살 : 1,400명 추청 자세한 내용은 모두의 정신건강과 시간여건 상 생략하겠습니다. 제주 4.3사건하고 거창양민학살은 영화화되었구요. 소설 태백산맥에서 요 사건들 다루고있으니까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출처 : 역사로 보는 서북청년단, 대체 어땠길래? / [언론네트워크] <김관후의 4·3칼럼> 서북청년단, 제주도 학살 최선봉에 서다 / 프레시안) 그래도 그 만행 중에 한 대목 만 소개해 드리자면...[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 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 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 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 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 출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71쪽] 요게 다시 말씀드리면, ‘기독교’인 이름으로 그 잘난 ‘반공주의’로 저지른 사건입니다. 그리고 서북청년단의 최후...그리고 현재? 공식적으로는 1948년 대한청년단이 창립되면서 그 쪽으로 흡수통합처리됩니다.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조직원 대부분이 사라졌다고 알려져있었습니다만..(일부 서청단원들은 1948년 육사에 들어가서, 박정희의 5.16의 주축이 되기도 합니다.) 서북청년단을 키운 영락교회는 살아있습니다. 애초에 서북청년단 단원들의 80-90%가 독실한 개신교도에 1945년 월남한 이후부터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신자들에게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가르쳐왔어요. 게다가 해방 직후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600만명 이상 이북 주민들이 남한으로 월남했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자신들의 반공이념과 맞고 같은 고향인 서북청년단 출신 목사들이 운영하는 교회로 가서 그들이 가르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 설교를 들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 일부는 월남한 이북민 개신교도가 한국의 숨은 권력자가 아니겠느냐? 하는 의구심을 품는다고 하죠.) 그리고 28년뒤 1989년쯤 기득권 내에서 요상한 유행어가 돌기 시작했으니,“비행기를 타려면 티케이(TK) 노스웨스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을 타라.” 이 말인 즉슨, 요직을 죄다 차지한 대구,경북에다 추가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세력의 상당수가 이북 출신들,노스웨스트, 과거 서북청년단에서 유래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상당수가 서북청년단 개신교인에 뿌리를 두고있구요. 2000대 중반 서북청년단원 출신 곽선희목사가 세운 ‘소망교회’에서 대통령까지 나오게되었죠.(출처 : ‘서북청년’에 뿌리 둔 한국 개신교의 주류 - 허미경 선임기자 / 한겨례) 그리고 1989년쯤 그 막강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개신교 단체,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설립됩니다. 그리고 역시 그 뒤에는 영락교회가 있었죠. 또한 서북청년단 출신의 사람들도 주축이 됩니다. 시간이 흘러, 한기총에서 그들을 스승으로 모신, 그들의 후계자! 그들의 미래! 그들의 아이돌! 전광훈목사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2025년 전광훈목사의 아이들이 서부지법 담장을 넘어 창문을 깨고 불을 지르려고하고, 각종 기물을 부수는 등 폭동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몇 달 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한 소년이 자신의 망가진 인생에 대해 눈물을 흘립니다. (출처 : 한기총이란 무엇인가? - 한기총의 탄생·변질·몰락의 역사와 그 현황 - 박제민(기독교윤리실천운동 활동가) 마무리 마지막으로 이런 내막을 알게되면, 누가누구에게 ㅃ갱이라도 모욕해야 할지, 참 난감해집니다. 어떻게 보면 북한 출신 친일파 친구들에게 수 십년 간 지금까지 한국이 농락당하고 있다고할까요? 반공과 폭력은 대대로 남아 최근까지 우리가 그걸 목도하게되었구요. 그런걸 볼 때마다 근현대사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구나, 인간의 타락과 욕심은 끊기지를 않는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와서는 교회에서는 왜 ‘반공’을 해야하는지 그 이유조차 퇴색되어버렸습니다. 예전이야 김일성의 티배깅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흘러 이유는 잊혀져버리고, 그냥 습관성 반공 만 남았어요. 그게 목사들이 그들을 따르는 성도들한테 써먹이는 좋거든요. 공포마케팅으로요. 예전에 전쟁을 일으킨 무시무시한 미지의 적, 뭐 무섭잖아요? 요즘은 별로 안무서우니까 다른 적을 찾기 시작한 게, 그게 민주당이고 그게 동성애자이긴 합니다.(요즘 진짜 민주당이 공산당이라고 합디다) 공통점은 때리기 좋은 상대들. 맞아도 가만히 있는 상대들. 약한 자들. 예전 남한 내 공산세력이 가지고있던 포지션이었죠. 반공주의라고 떠들어대는 애들이 뭐 다 이렇게 비겁한 애들입니다. 이제 이 타락한 성직자들이 권력과 손을 잡았으니 어떻게 권력을 탐하는지,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편은 드디어 한국사의 빌런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 사람 ‘이승만’, 그리고 그 중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부제는 [목사대통령 이승만과 제헌국회예배]로 하죠. 아마 다음 편을 보시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하신 이 땅에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ㅎㅎㅎ 꽤나 충격적이실 겁니다.
아루리작성일
2025-08-03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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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자작]한국교회목사님들이 절대 말 안해주는 한국교회이야기-2
안녕하세요. 두번째입니다. 지난 한국 개신교 개판의 역사를 초장기부터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소재욕심에 막 넣다보니 글이 길어져서 줄이고 쪼개고 하다보니 정신이 없네요. 그래도 저도 첨보는 소재들이 계속 알게되어 그런쪽에서는 기쁩니다.ㅎㅎ생업이 있는 관계로 일주일에 한번 밖에는 글을 쓰지는 못하네요..ㅠㅠ 일단, 1907년 평양대부흥, 개신교의 부를 수 없는 아버지, 도사 길선주의 활약으로 일단, 개신교는 전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을 중심으로 장로교를 중심으로 농촌 지역까지 교회가 전국 각지에서 세워지면서 기독교 공동체 네크워크가 형성됩니다. 그래도 이 네트워크를 통해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는 데 큰 역할도 합니다. 진짜로 한국 개신교 초반에는 민족운동의 기반이 된다니까요?ㅎㅎ 이때 안창호와 유관순이 개신교출신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출처 :캠브릿지대학 / 한국 개신교 성장의 정치적 요인 : 개신교와 1919년 3·1운동.) 다만, 3.1운동 이후 개신교의 민족운동 성향이 계속 거슬려하던 일제는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모든 학교에부터 신사참배를 강제화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일제가 전시총동원 체제로 전환하면서 ‘내선일체’를 그때부터 사용했구요, 조선 내 모든 종교에 신사참배 ‘거부 불가’ 명령을 내립니다. 불응하면 교회 폐쇄와 체포한다는 내용이었죠. 1930년대 중반까지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명백한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거부했고,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그 ‘주기철’목사가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고 외치면서 저항했죠. 1938년 평양총회 : 민족종교 VS 개x교 – 운명을 가른 결정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한국 장로교회, 아니 한국 개신교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총회 개막 전부터 일제는 총회 결의를 신사참배쪽으로 강요함다. 총독부 경찰과 친일 세력을 주변에 뿌려놨구요, 총회 안에는 사복 경찰을 잠입 시켜놔서 안팎으로 완전 감시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슴다.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요 의례적 국가의식”이라는 결의를 채택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선언을 하게됩니다. 총회 폐회 후, 총회장은 각 교회에 목회서신을 보내 “신사참배 결의를 거역하는 자는 교인으로도 인정할 수 없으며, 총회의 결의를 거역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배반되는 유감천만의 행동으로 교회에서 처벌해야 한다.”고 지시합니다. 여기에 더해 반대자 색출과 징계, 친일 목회자들을 앞에워 교회를 통제까지 합니다.(출처: 총신대 정암신학강좌 1994, “신사참배 문제를 재검토한다.”) 조직적 친일 협력의 전개 장로교회는 1938년 총회의 결의 이후 조직적으로 완전 친일의 길로 들어섭니다. 총회 결의문에서 나오듯, 조선예수장로회는 황국신민의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이후 전쟁 지원을 위한 각종 친일 활동을 전개합니다. 각 교회 예배 순서와 행사에 국기(일장기)에 대한 경례(헐?), 황국신민 서사 암송(헐??), 도쿄의 천황성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헐???) 등의 국민의례가 도입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거, 교회 예배때 하는겁니다. ㅅㅂ 조사하다보니 교회 이름으로 온갖 친일행위가 있는데, 더 쓰면 지루할까봐 생략은 하겠는데, 그냥 보통의 친일파가 할 수 있는 친일행위는 다했습니다. 어떤면에서 진짜 대단하네요.. 심지어, 일요일에 친일헌금도 모아서 일본에 갖다 바쳤습니다. 허.. 뭐 나중에는 모은 헌금으로 총이랑 비행기도 사서 일본군에다가도 바치네요. 이런 시부랄.. 그러다가 이마저도 굴욕적으로 194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강제로 해산당하고 일본이 기만적으로 자기네가 자체적으로 만든 조선장로교단으로 편입됩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공식적으로 일본 기독교 산하 조직으로 흡수되버립니다.(출처: 박용규,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총신대.) 우리편 : 저항과 순교의 기록 그래도 정말 아주 소수의 양심은 끝까지 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앞에 언급한 주기철 목사 외에 몇 명의 목사, 수십 명의 신사들이 절하기를 거부하여 투옥되었으며, 결국 주기철목사는 수차례 구속과 고문으로 인해 1944년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합니다. 여기서 수차례 구속이 나오는 게, 한 사람의 뜻을 꺾으려고 잡고 조지고 풀어주고, 또 잡고 조지고 풀어주고, 그렇게 사람이 죽을 때 까지 합니다. 또 조지는 방법도 개같은 게, 가족 앞에서 사람을 조집니다. 이 광경을 본 주기철 목사의 아들이 충격으로 실어증까지 앓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장로교 총회에서는 총회 결의 이후 주기철 목사를 공식 면직하고 그의 가족을 교단에서 추방해버렸습니다. 뭐 해방 이후 다시 복권시키고 순교자가 되긴 하지만요. (출처: 박용규, 『순교자 주기철』) 장로교회의 분열 : 돌아온 자들 VS 위선자들 해방 후 신사참배의 죄와 책임을 두고 당연히 장로교회 내부는 개판이 되었슴다. 회개와 제명처리 논쟁으로 1952년 분열까지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그 소수의 아군이 생깁니다. 해방 후, 그 개같았던 친일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회개와 과거사 청산 요구가 미친 듯이 제기되었지만, 교단 지도부는 9년간 이리저리 미루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다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감옥에서 나온 이른바 ‘출옥성도’들이 교회 재건과 회개의 목소리를 강하게 냅니다. 전투력 만땅에 빡이 머리끝까지 쳐있을 만 하죠? 이들이 배신때린 새ㄲ들 죄다 조지라고했는데, 실제로 책임자 처벌까지 이뤄지지 않았슴다. 결국 한상동 목사 등 출옥성도들은 “좋같은 위선자, 친일파, 배신자 새ㄲ들, 회개하지않는 새ㄲ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며 교단을 이탈해버립니다. 이렇게 1951~1952년 고려신학교파(고신파)가 형성됩니다. 부산에있는 고려신학대학교,고신대가 여기 고신교단 소속 신학대학교입니다. 고신교단 지독한게,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총회 때 개회 시마다 과거 80년전 평양에서 있었던 제27회 개판 총회에서 결의된 신사참배 가결을 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워딩은 해마다 바뀌긴 하는데, 내용은 똑같습니다. 대대로 굴욕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의지에 눈물이 납니다.ㅠㅠ 또한 1953년 기존의 장로교회 중에 소수 양심파에서도 “시부랄, 도저히 못참겠다. 니네 새ㄲ들은 양심도 없냐? 고신 애들이 그렇게 회개하라는데, 이런 얼굴에 철판깔은 놈들.. 니네랑은 같이 못살겠다.” 하면서 뛰쳐나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단이 기독교 진보 또는 기독교 좌파라고 불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입니다. 그 유명한 민주화운동의 목사님, 한빛교회 ‘문익환’목사님께서 여기 기장교단 소속입니다. 또한 한신대가 기장교단소속 신학대학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을 겪은 장로교회에서 놀란 나머지 뒤늦게 “내가 잘못했다!!.”하고 1954년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냈는데, 그마저도 친일행위에대한 사과, 피해자에 대한 책임인정,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상, 구조적 개혁은 없고, 그냥 ‘내가 좋나 미안하다!!!.’ 로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ㅅㅂ 50년 뒤에 ‘밀양’같은 영화가 나오는 거라고 이 ㅂㅅ같은 ㅅㄲ들아!! 그것도 기독교 모욕하는 영화라고 뭐라하더라?? 제발 반성좀 해라.. 뭐 그 뒤로 1959년 천주교와의 신앙적 입장차이로 인해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으로 대분열을 겪은 후에 조각조각 더더더더더 분열되어서 현재는 공인 장로교단이 대충 300개, 비공식 500개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출처 :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쉬소성명”(1954)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신사참배 문제를 재검토 한다] 총신대학교, 1994 정암신학강좌 발표문 / 통계자료 : 한기총) 장로교회의 사생아 - 통일교의 탄생 또 요당시 장로교회가 한국사회에 본의아니게 진짜 큰 해악을 끼친게, 1954년 문선명의 ‘통일교’라는 사생아를 태어나게 만들었죠. 신사참배와 그 외의 친일행위와 더불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장로교회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고, 기존 교인들은 장로교회에 도덕적 환멸과 함께 믿음조차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게 문선명입니다. 장로교회 집안에서 자라난 장로교 교인이었던 문선명은 장로교회를 ‘타락한 종교’. ‘실패한 신앙’으로 규정하면서 ‘오직 나만이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이어받아 완성할 수 있다.’는 시작은 좋은데 끝이 이상하게 끝나는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문선명도 첫 활동을 평양에서 시작했는데, 역시 길선주의 영향을 받는 것인지, 본인이 예수의 환상을 봤으며 자신이 예수의 선택을 받은 ‘예수의 사명 계승자’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참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다른 교계와 다른 종교는 일제강점기때 뭐했나? 뭐 다른 개신교 교단이라고 다를게 없는게, 이승만의 감리교회는 장로교회보다 더 일찍 신사참배하겠다고 배를 드러내까서 꼬리 흔들고 있었구요, 친일행위도 장로교회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장로교회와 나란히 1943년 일본에 복속되었슴다. 해방 후에 여기는 장로교회보다 결과가 더 개판인데, 여기도 초반에는 내부 갈등을 겪다, 결론은 “야~ 그냥 좋은게 좋은 거지, 우리끼리 싸우지말고 다같이 합치고 덮어놓고가자~!.”로 끝났습니다. 누가 끝내래??? (출처 : [한국 감리교회의 신사참배 대응에 관한 연구]. 협성대학교 신한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천주교, 카톨릭도 잘했다고만 볼 수 없는게, 일본에서 신사참배 강요하니까 바티칸 교황청에서 “얘들아~ 그거 그냥 국가의식이라니까, 그냥 일본 시키는 대로 신사참배해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 내 저항하시는 빡시친 몇몇의 신부님은 조선을 떠나신 분도 계시고, 남아서 신사참배 한 신부도 있다고 합디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특별한 사과나 참회없이 스리슬쩍 넘어갔구요. 불교는 더 대박인게, 조선 때 숭유억불정책과 원래 일본 내 승려의 존중 문화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사료조사로 나왔는데, 저도 처음 안 내용이라 좀 머리가 띵하더군요. 그 당시 한국 불교는 거의 일본화 되었구요. 전국에 불자들을 살살 꼬득여서 재산이고 땅이고 논이고 다 뜯어내서 일본에 바쳤다고 합디다. 조선 때 쌓였던 복수심같은 걸 풀었다고 하던데...(스님들 자비심은요..??) 한편 만해 한용운 스님과 같은 몇몇의 스님은 끝까지 저항하셨다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깨닫습니다..ㅠㅠ (출처: 『친일 승려 108인 – 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 100년이 지난 지금 제일 좋같은 건, 저렇게 친일하지 않고 자기 양심과 신념을 지키신 주기철목사님을 100년전 배신자의 후예들이 팔아먹고있다는 겁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국힘에서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고 노무현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받자!!.’ 이러고 있는 거랑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거죠. 왜냐면 개신교에서 대표적인 순교자거든요. 지네들한테는 또 없거든요. 그때는 ㅆㅂ 제명에다 출교까지해서 내버렸으면서 이제와서 좋나게들 팔아먹고 있어요. 더러운 놈들이.. 에효.. 특히..명예훼손 때문에 특정인을 찍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빤스 좋나게 좋아하시는 분이 좋나게들 얘기하시드라구요. 그 양반 선배들은 어떤인간들인지 다음 시간에 알려드립죠.. 당신 선배는 주기철 목사가 아냐!!!! 그리고 더 좋같은 건, 정작 그 주기철 목사님 후예인 고신교단은 100년동안 정작 아무런 사과나 화해의 선언이나 손길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교단에서 분리된 뒤에 더욱 철저하게 탄압받고 외면당합니다. 암튼 그래서 더 싫어집니다. 하는 짓이 아주 어디 누구누구들하고 너무 똑같아요. 일단 지금까지 확인된 착한 기독교인 교파는 ‘고신’과 ‘기장’으로 현재 2023년 기준으로 고신교단의 교인 수는 378,376명, 기장교단의 교인 수는 208,307명, 그 당시 전체 개신교인 수가 8,460,000으로 나와있을 때, 전체 비율은 7%입니다. 뭐 쫌 더 추가될 아군까지 추정하면 착한 기독교인은 7-10%, 그리고 90-93%가 쓰레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건 과장 아니에요~)(출처 : 목회데이터연구소) 마치며 제가 원래 이렇게 길게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곧 8.15 광복절이고 하니, 독립기념으로 좀 더 깊게 파고 좀 덜 알려진 내용을 들여다보려고 하니까 내용이 길어졌네요;;; 그동안 미디어에서 독립운동가가 중심이되다보니, 주인공부터 주변인물까지 계속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면서, 조선이 그래도 독립운동이 좀 당연하지 생각했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료를 뒤지면서 느낀 점은, 큰 벽을 마주한 암담함? 답답함? 1937년부터 조선은 분명 지금의 티벳이나 홍콩하고 다를게 없었다는 거에요. 그때 독립운동가는 지금의 ‘티벳독립운동가’나 ‘홍콩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시면 감정이입하시기 편합니다. 그니까 미친 짓이에요. 저항? 무장투쟁? 아마 소극적 저항도 못할껄요? 요즘 홍콩에서 누가 독립운동한다는 얘기 들려요? 거기다가 중일전쟁으로 만주벌판에 점점 영토는 넓어가고 있었죠. 지금 일본 극우가 여전히 대동아공영의 뜻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합니다. 우리도 뭐 예전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얘기하면서 만주벌판 우리꺼였다. 말타고 놀았다고하면 막 가슴이 웅장해지고 그러잖아요? 그게 뽕이 더 심해지고 그러면 저 미친놈들처럼 되는 거겠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일제가 없는 하늘 아래서 살아 본적이 없는 사람, 그래도 죽을 때까지 겪어 본 적없는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저항했던 그를 기리며 마치겠습니다. <이육사> 본명: 이원록(李源祿)호: 육사(陸史) →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출생: 1904년, 안동 출신사망: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 (일제 헌병대 고문 중 순국) <광야>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다음편은 이제 장로교회에서 남겨진 위선자들이 어떻게 악마가 되는 지, ‘서북청년단’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아루리작성일
2025-07-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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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역사와 평가
메이지 시대 (1868~1912년) 1860년대 일본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당시 미국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일본 에도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었고 황금과 은의 해외 유출로 인해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였다. 특히 그런 에도 막부에 가장 큰 반발과 불만을 품은 세력은 사츠마번과 조슈번으로 이들은 반 서양 활동을 하다가 미국과 영국에 맞서 사츠에이 전쟁과 시모노세키 전쟁을 벌이지만 결국 전쟁에서 지고 서양에 배상금까지 물어내고 개항한다. (이중에서 배상금 상당부분은 에도막부가 대신 지불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명목상으로 각 번에게 서양을 배척하라고 명령을 내린건 에도막부였으니 상당부분 덤탱이를 쓸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양에 가장 큰 반발을 하며 무력시위를 하며 에도막부 타도를 주장하면 여러차레 막부전복 시도를 했던번은 조슈번으로 에도막부는 그러한 조슈번은 조정의 적이라고 선포하면 조슈정벌을 실행하지만 당시 막부군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져있었고 조슈번은 서양에서 수입한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1차 조슈정벌은 막부군이 표면적으로 승리한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슈번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2차 조슈정벌은 결국 막부군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조슈정벌은 실패로 돌아간다. 1866년 2차 조슈정벌의 실패로 안그래도 권위가 하락해가던 막부의 권위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으며 1867년 훗날 메이지 덴노라 불리우는 무쓰히토 덴노가 122대 덴노로 재위에 오를당시 에도막부는 조슈,사츠마, 토사번의 협박으로 대정봉환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에도막부의 쇼군인 요시노부가 거의 대부분의 정무를 처리하였고 여전히 정권을 장악할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사츠마, 조슈번를 중심으로 한 토막파와 막부를 중심으로 하는 좌막파 사이에 전쟁인 보신전쟁이 터진게 된다. 보신전쟁의 첫번째 전투는 토바 후시미 전투였다. 1868년 1월 3일 막부군은 군대를 2개로 나뉘어서 각자 도바와 후시미로 나뉘어 교토로 진압을 시작했으나 도바로 향하로 막부군은 사츠마군과 초반 포격전에 사츠마군이 쏜 포탄에 맞고 막부측 대포가 터지는 혼란이 벌어졌고 이어지는 사츠마군의 총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와중에 막부군의 사령관인 타키가와 토모타카가 탄 말이 총에 맞고 사령관이 도주하자 결국 막부군은 전의를 잃고 도주하고 후시미로 진군한 막부군 또한 사츠마와 조슈군에게 퇴각당하면서 결국 토바 후시미 전투는 막부군의 참패로 끝난다.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사츠마 조슈군은 이후 파죽지세로 연이은 전투에서도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에도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당시 막부군은 상당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오랫동안 에도성에서 농성을 할수 있었지만 내전이 계속 장기화되면 일본의 경제가 파탄이 날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이 내전을 빌미로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관군에 맞선 막부측 인사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사츠마와 조슈번이 이끄는 관군에 항복한다. 하지만 여전히 관군에 항복하지 않은 막부측의 잔당들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우에노 전투에서 쇼기타이를 내세운 막부잔당군을 진압하고 이후 계속 북진을 가행한다. 나가오카성에서 가와이 츠구노스케가 이끄는 나가오카번 군이 메이지 정부군을 상대로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가오카 성도 함락되고 이어진 아이즈 보나리 고개 전투에서 아이즈군 역시 정부군에게 패배하고 아이즈 번 역시 항복한다. (정부군에게 항복하는 아이즈번 번주인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막부군 찬당들이 훗카이도로 도주에 에조 공화국을 세우며 정부군에 대항했지만 1869년 하코다테 전투에서 훗카이도에 상륙한 정부군에게 패배하면서 3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오던 에도 막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고 메이지 정부가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것이다. 일본의 권력을 잡은 메이지 정부는 이와쿠라를 비롯한 사절단들을 서양에 보내 서양의 각종 근대화된 법들과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서양식 공공기관이나 시설을 도입하며 폐도령을 내리고 징병제와 의무교육 일본의 번국체제를 철폐하는 폐번치현을 실행한다 .메이지 정부가 실행한 개혁 중에서 가장 큰 반발을 부른건 바로 무사 계급의 폐지일 것이다. 정부는 사무라이들을 대상으로 가록을 유지시킨 상태에서 신분을 평민으로 바꾸었으며 그 가록마저도 공채로 바꾸었으며 사무라이들에게도 단발령을 내리고 폐도령까지 내리자 그동안 누린 특권을 모두 박탈당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결국 사츠마 사족들을 비롯한 큐슈지역 사족들을 중심으로 한 세이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구마모토 성 전투를 그린 우키요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은 구마모토성을 포위하였지만 그런 구마모토 성에서 농성하고 있는 정부군을 구원하기 위해 메이지 정부는 지원군을 파견하지만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끄는 사츠마 반군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옹성이라 불리우는 구마모토 성의 난공불락 방어력 앞에 끝내 사츠마 반군은 2달동안 지속된 수성전을 포기하고 퇴각하고 만다. 이후 사기가 크게 떨어진 큐슈 반군들은 정부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반군의 대장이 사이고 다카모리가 할복하면서 정부군은 힘들게 반란을 진압할수 있었다. 세이난 전쟁이후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킬수 없다는 현실이 명확해지자 더 이상의 사족 반란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이후 1889년 대일본 제국 헌법이 발표되었고 이러한 헌법은 독일의 전례를 따라서 군주의 권한이 강한 헌법으로 천황이 주권자임을 명시하였고 천황 밑으로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규정하고 군대의 통수권자를 천황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계속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일본은 운요호 사건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어서 조선을 개방시키고 어느정도 조선에 대한 이권을 가지고 되었고 이후 1879년 오랫동안 사츠마번의 속국이였던 류큐왕국을 완전히 합병시킨다. 하지만 1884년 조선내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내에서 한동안 영향력을 크게 잃게 된 일본정부는 자국 근대화에만 집중을 가한다. 사실 일본이 근대화를 이룬 과정에서는 일본이 에도시대때 이룩한 부도 있지만.(이미 메이지 유신이전부터 일본의 경제력은 조선의 경제력에 5배 이상에 달했다.) 자국민들의 희생에서 비롯되기도 했다. 근대화를 할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이러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자국의 여성들을 외국에 돈을 받고 파는 포주 노릇을 하였고 이러한 가라유키상으로 일본이 번돈은 일본의 근대화에 중요한 자금으로 쓰이게 되고 당시 거의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힘든 생활을 하면서 지내야만 했고 여전히 일본 시골지역에서는 먹을 식량이 없어 어린 자식을 죽이는 마비키가 계속 성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일본은 빠르게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일본 국민들은 그러한 희망을 붙잡고 하루하루 힘든 고난의 생활을 견디고 버티면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일본에게 마침내 행운이 다가왔다.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터졌고 그러한 자국내 농민반란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한 조선에서 청나라에 군사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하자 텐진조약에 따라서 일본역시 조선에 군대를 보내는게 가능해졌던 것이다. 일본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내 자신들 친일정권을 세우기 위해 곧바로 한양으로 군대를 보내 경복궁을 기습해 경복궁을 장악한뒤 조선 조정을 협박해서 갑오개혁을 실행한다. 그리고 조선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뒤 이제 동학도 진압했으니 조선땅에서 철군하자는 청나라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나라에 기습공격을 자행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청일전쟁 삽화 1894년 일어난 전쟁은 청일전쟁은 처음에는 조선땅에서 일어나다가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 북진하는 일본군에 의해 만주지역까지 전선이 확대되었다. 풍도해전, 성환전투, 뤼순전투에서 연달아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황해해전에서 자신들보다 전력이 우위에 있는 청나라 해군을 전멸시킴으로서 청일전쟁을 일본의 압승으로 끝났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나라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둘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청나라군은 서태후와 사치와 각종 부정부패로 군비의 상당수를 횡령해서 대포에서 연달아 불발탄이 터지는등 내부에서 썩었기 때문이였다. 청일전쟁에서 압승을 거둔 일본군은 청나라로부터 대만과 요동반도를 얻게되고 청나라 재정의 2년치, 일본재정의 4년치에 해당하는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조선내에 있는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상실되게 된다. 마침내 그동안 일본이 기울었던 노력과 근대화 과정들이 결실을 보여준 순간이라고 할수있다. 하지만 상황이 계속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만 하는건 아니였다. 욱일승천하듯 나아가는 일본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나니 그건 바로 러시아였다.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했고 때마침 요동반도는 러시아가 원하는 부동항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요동반도를 일본이 차지하자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여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라는 압박을 가했고 당시 전세계 군사력 2위였던 러시아를 당시 이제 겨우 청나라와의 전쟁을 끝낸 일본입장에서 감당해서 전쟁을 한다는건 그야말로 자살행위였고 그러한 사실들을 일본역시 알고있었기 때문에 결국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주고 말고 그런 러시아의 군사력에 놀란 조선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 러시아에 자신들의 부동항을 쓰게 해주는 등 각종 이권들을 내어주면서 러시아를 끌여들이자 일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잘못하면 러시아라는 거대한 변수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이 공을들인 조선을 확보하는 일마저 물거품이 될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당시 그런 일본에게 큰 행운이 찾아온다. 바로 당시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하고 있었던 패권국 영국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압승을 거두자 일본에 가능성을 엿보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을 후원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일본은 영국이란 든든한 뒷배가 생기고 청일전쟁이후 10년동안 힘을길러 마침내 막대한 영국의 지원을 받고 러시아를 기습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이 터진다. (러일전쟁의 삽화) 러일전쟁은 청일전쟁과 달리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지 못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가 점령했던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전투에서승리를 거두면서 분명히 군사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일본군 역시 러시아군 못지않게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뤼순전투는 러시아의 뤼순기지를 공격하던 도중 일본군의 총지휘관인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차남까지 전사할 정도로일본군 역시 매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지원해 주었던영국과 미국도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것 까지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고 그저 최대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면서러시아의 국력을 소모시키는 정도까지만 기대했기 때문에 미국과 영국도 더이상 일본의 국채를 구입하는걸 거절했고 경제규모에서러시아에 밀렸던 일본이 먼저 돈이 다 떨어질 상황에 쳐해서 전쟁수행에 크게 차질이 생긴 그때 러시아내에서 유대인 학살과 탄압에 크게 불만을 품었던 제이콥 쉬프를 비롯한 많은 부유한 유대인들이 일본에 국채를 사주고 돈을 빌려주면서 일본은 다행히도 전쟁을 계속할수 있었고 이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전멸시키면서 전쟁의 승기를 완전히 잡게된다. 이후 미국의 중재하에 일본과 러시아는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강화협상인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된다. (포츠머스 조약에서 협상을 맺기 위해 모인 일본과 러시아의 외교관들.) 당시 일본은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 절대적 필요조건과 비교적 필요조건을 나누었는데 절대적 필요조건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이였고 비교적 필요조건은 전쟁 배상금이였다. 당시 일본은 일본이 보낸 첩자였던 아카시 모토지로가 러시아내에서 각종 선동들을 일으킴으로서 러시아 내 곳곳에 전쟁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그러한 여론을 인식해 러시아내에서도 더 이상의 전쟁은 힘들다고 생각하고 포츠머스 조약에 일본과 강화협상을 하기 위해서 나왔지만 러시아는 일본역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전쟁군비가 거의 다 떨어져서 더 이상의 전쟁은 사실상 힘들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푼의 배상금도 지불할수 없다고 말했고 결국 일본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 인정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있던 일부 요동반도를 반환받고 북사할린 남부를 할양받는 것으로 협상을 하게 된다. 러일전쟁이 마침내 일본의 판정승으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정작 중요한 전쟁 배상금은 단 한푼도 받지 못했고 청일전쟁에서 막대한 배상금을 받은 기억으로 일본정부를 믿고 일본이 전쟁에 필요한 군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자신들의 재산을 전부다 털어서 일본국채를 사주었던 수많은 일본국민들은 이러한 사실에 크게 분노하였고 급기야는 히비야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폭력을 동원한 시위를 일본정부는 경찰을 동원해서 막았고 이러한 사태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이상이 부상을 입고 20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오로직 자국의 승리만 보도하는 식으로 언론을 통제하였기 때문에 일본국민들 입장에서는 잘 이기고 있는 전쟁을 무능한 정치인들이 협상을 잘못해서 제대로된 배상금 한푼 받지 못하고 졸전으로 협상을 잘못 맺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자국내 폭력시위들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은 이후 조선을 협박으로 을사조약을 맺게 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시켜 조선을 자국의 속국으로 만들며 조선을 지배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1907년 정미 7조약으로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키고 조선의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조선의 사법권을 박탈하면서 사실상 조선은 외교권, 군사권, 사법권까지 전부다 일본의 지배를 받는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이후 1910년 6월 한일약정각서로 조선의 마지막으로 남은 경찰권까지 박탈하고 이후 1910년 8월에 한일병합조약을 반포하면서 공식적으로도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략하게 된다. (1910년에 발간된 한일병합조약 기념 엽서) 이후 일본은 1911년 서구열강들 하고 그동안 맺었던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지시키면서 사실상 더디어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가 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들과 어느정도 동등한 취급을 받게 되는 열강에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메이지 덴노는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멸망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1912년 마침내 붕어하면서 메이지 시대는 끝이난다. 메이지 시대는 그야말로 영광의 시대면서 한편으로는 고난과 희생 인고의 시대였다. 메이지 덴노가 즉위할때당시 일본은 혼란한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근대화에 성공함과 동시에 마침내 열강에 반열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거기에는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과 고난이 있었고 상당한 행운까지 따라주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내전인 보신전쟁을 서구열강들이 간섭해서 자국이 서구열강들의 전쟁터가 되는걸 우려해서 정부군 역시 막부측 인물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능력이 있으면 오히려 정부내 요직에 임명하는등 회유책을 써가며 항복을 유도했고 그러한 현명한 조치로 일본은 대규모 내전을 불과 1년 남짓만에 끝낼수 있었다.(만약 남북전쟁이나 훗날 벌어질 한국전쟁같이 몇년 이상 지속되었다면 일본역시도 전쟁이후 자국 경제가 파탄이 나서 그대로 외세에 경제가 종속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일본은 에도시대 수백년동안 벌어놓았던 자금력으로 메이지 유신이전에도 일본의 경제규모는 조선의 5배에 달했으며 그러한 탄탄한 경제력을 오직 큰 부정부패 없이 자국 근대화를 하는데만 쏟아부었으며 그것마저 부족하면 자국 여성들을 해외로 인신매매로 팔아넘기면서 근대화에 필요한 부족한 돈을 마련하면서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이룰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일본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하루 빠르게 근대화가 되어가는 일본의 모습에 희망을 가지고 일본 정부가 근대화에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거두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세금을 내고 전쟁이 나면 일본에 전비를 마련해주기 위해서 일본의 국채를 사주면서 하루하루 희망을 가지고 견더나갔다. 그러한 희생과 고난이 부흥하듯 당시 일본정부는 각종 개혁들로 사무라이들의 특권을 없애고 서양에 사절단을 파견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각종 법과 제도를 흡수해서 자신들의 환경에 맞게끔 적용시켰고 외부적으로도 막대한 행운까지 찾아오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등으로 죽은 무려 10만명에 달하는 자국군인들이 흘린 시체와 피로 마침내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할뿐만 아니라 오랜 숙원이였던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지배하고 열강의 반열에 들어갈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전쟁도중 철처한 언론통제로 자국내 전쟁상황을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유리하게만 보도하였고 그 결과 국민들 사이에서 유능한 군인들이 흘린 피로 이긴 전쟁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로 인해 제대로 배상금도 받지 못하고 말아먹었다 그러니 군인들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군국주의적 여론이 싹이트고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쇼와시대에 초기에 이르러서는 국민의 지지를 얻는 군부 쿠테타가 흔해졌으며 자국의 총리인 이누카이 츠요시까지 암살당함에 따라서 일본은 군국주의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면서 그러한 군부는 무모하기까지 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패망에 이르는 그 시작점이 시작 되기도 한다. 메이지 시대는 분명히 일본에게영광의 시대로 끝났지만 그러한 영광은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희생으로 뒷받침되어서 이룬 그러한 영광을 이루기 위해서 수많은 일본국민들의 노력 피땀과 고난 희생을 견더야만 했던 영광의 시대임과 동시에 고난과 희생 그러한 고난을 오랫동안 참고 견더야 하는 오랫동안 긴 인고의 시대였다. 인생도 메이지 시대와 같다. 잔혹한 시대를 견더내며 지금은 힘들지만 수많은 괴로움과 고난을 인고하면 계속 희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막대한 행운이란 것이 찾아오고 결국에는 영광이란 열매를 맛볼수 있는 것이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cbest&no=280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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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2024 KBO리그, KIA V12로 피날레...1천만 관중 시대 열어 큰 의미
2024년 한국프로야구 챔피언은 KIA 타이거즈였다.6개월 이상 치른 정규시즌 장정을 1위로 마친 KIA는 단기전인 한국시리즈(KS)에서도 최강팀의 위용을 과시했다.KIA는 28일 광주 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끝난 KS 5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7-5로 꺾고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2017년 이후 7년 만에 통합우승(정규시즌·한국시리즈)을 차지한 KIA는 KBO리그 최다 KS 우승 기록을 '12회'로 늘렸다. 이 부문 2위 삼성(8회 우승)을 상대로 KS 우승을 차지해 격차는 더 벌어졌다.KIA는 1980년대(1983, 1986, 1987, 1988, 1989년), 1990년대(1991, 1993, 1996, 1997년), 2000년대(2009년), 2010년대(2017년), 2020년대(2024년)에 모두 한 차례 이상 우승한 최초의 구단이라는 영예도 누렸다.올 시즌 KIA는 6월 12일 1위로 올라선 뒤 한 번도 1위를 내주지 않고 정규시즌 우승을 일궜다.KS에 직행한 KIA는 21일 시작한 1차전에서 0-1로 끌려가던 6회초, 비 때문에 서스펜디드게임이 선언되면서 '2박 3일' 만인 23일에 1차전 잔여 이닝과 2차전을 연이어 치렀다.1차전에서 5-1로 역전승한 KIA는 2차전에서 경기 초반에 화력을 집중해 8-3으로 삼성을 꺾었다. 3차전은 삼성에 2-4로 패했지만, 4차전에서 9-2로 설욕했다.안방인 광주에서 벌인 5차전에서 승리하면서 KIA는 1987년 이후 37년 만에 홈팬들 앞에서 KS 우승 세리머니를 펼치는 기쁨도 만끽했다.KIA는 전신 해태 시절을 포함해 한국시리즈에 12번 올라 단 한 번의 실패 없이 모두 우승 샴페인을 터뜨려 불패 신화를 이어갔다.8월 타구에 턱을 맞아 수술대에 올랐던 제임스 네일이 기적처럼 KS 1차전에 선발 등판하고, 타격 부진으로 '식물 타자'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김태군이 4차전에 만루 홈런을 작렬하는 등 KIA의 12번째 KS 우승에는 '서사'가 가득했다.우승은 놓쳤지만, 삼성도 '하위권 전력'이란 평가를 뒤집고 KS에 진출하며 의미 있는 가을을 보냈다.정규시즌을 2위로 마치고 플레이오프(PO)에 나선 삼성은 지난해 통합 우승팀 LG 트윈스를 3승 1패로 따돌리고 2015년 이후 9년 만에 KS 무대에 올랐다.KS 3차전 승리로, 2015년 1차전 이후 9년 만에 KS 경기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삼성은 외국인 투수 코너 시볼드가 어깨 부상 탓에 KS 엔트리에 들지 못하고, 구자욱이 PO 2차전에서 왼쪽 무릎을 다치는 등 악재가 겹쳐 KS를 100% 전력으로 치르지 못했다. 하지만 김영웅, 이재현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확인하며 '명가 재건'의 희망을 키웠다.'디펜딩 챔피언' LG는 정규시즌 3위로 준플레이오프(준PO)에 진출해 kt wiz와의 혈전에서 3승 2패로 승리했다.준PO에서는 불펜의 약점을 기존 선발 요원인 엘리에이저 에르난데스와 손주영을 불펜으로 돌리는 전략으로 극복했지만, PO에서는 고육책이 통하지 않았다.올해를 '왕조 시대 구축의 원년'으로 삼았던 LG는 투타에 여러 문제점을 발견하며 뒷걸음질 쳤다.kt는 올해 가을 잔치 초반부의 주연이었다. KBO리그 사상 최초로 열린 '5위 결정전'에서 SSG 랜더스를 누르고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오른 kt는 1, 2차전에서 4위 두산 베어스를 연파했다.KBO가 2015년에 도입한 와일드카드결정전에서 5위 팀이 4위 팀을 꺾은 건, 올해 kt가 처음이다. kt는 준PO에서도 LG를 마지막까지 압박하며 '신흥 명문'의 저력을 드러냈다.두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가을 무대 초입인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시즌 일정을 마무리했다. 두산 팬들은 와일드카드 결정 2차전이 끝난 뒤, 이승엽 감독에게 야유를 보냈다.이숭용 SSG 감독도 5위 결정전에서 패한 뒤, 팬들의 비난에 시달렸다.김태형 감독을 영입한 롯데 자이언츠(7위), 시즌 중 김경문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긴 한화 이글스(8위), KS 기간에 이호준 신임 사령탑을 선임한 NC 다이노스(9위), 2년 연속 최하위에 그친 키움 히어로즈(10위)는 쓸쓸한 가을을 보내며, 2025시즌 준비를 시작했다.올해 KBO리그에서 가장 주목받아야 할 주인공은 팬이다.정규시즌 720경기에는 1천88만7천705명의 팬이 야구장을 찾았다.종전 최다였던 2017시즌 관중(840만688명)보다 무려 240만명이나 관중이 증가해 한국 프로스포츠 최초로 관중 1천만명 시대를 열었다.포스트시즌 16경기에는 모두 만원 관중이 들어찼고, 35만3천550명의 관중이 프로야구 가을 잔치를 화려하게 수놓았다.역대 단일 시즌 포스트시즌에서 전 경기 만원 관중이 들어찬 건, 2010년(14경기 29만8천명)에 이어 역대 두 번째다.프로야구 1천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2024 KBO리그는 야구 역사 한 페이지를 굵직하게 장식했다.
재서엉작성일
2024-10-30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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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해방의 비극 (중국 혁명의 역사 - 마오쩌둥) 1945~1957 1부
마오쩌둥에 관련된 서적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책과의 차이점은 이책은 좀더 현실적인 사회모습을 비추고 있습니다. 프랑크 디쾨터 저/고기탁 역 다수의 지지를 얻고 소수를 반대하여 모든 적을 각개 격파하라. - 마오쩌둥 연대표 1945년 8월 6일과 9일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됨 1945년 8월 8일스탈린이 일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함. 1946년 4월공산주의자들에게 만주를 넘기고 소련군이 철수함 1946년 5월마오쩌둥이 농촌 지역에서 급진적인 토지 재분배와 전면적인 계급 투쟁을 천명함. 1946년 6월국민당 군대가 만주 북쪽 경계선까지 공산주의자들을 추격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이 특사로 파견된 조지 마셜의 정전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진격을 중단함. 공산당은 군대를 재정비하고 소련군에게 훈련을 받음. 1946년 9월 ~ 1947년 12월트루먼이 무기 금수 조치를 단행함. 1946년 12월 ~ 1947년 12월국민당이 보유한 최고의 부대가 계속해서 만주에 투입되었고 만주가 죽음의 덫으로 화함. 1947년 12월 ~ 1948년 11월공산주의자들이 대도시를 봉쇄하는 전략으로 만주 전쟁에서 승리함. 1949년 1월 22일베이징이 포위 40일 만에 공산주의자에게 함락됨. 1948년 11월 ~1949년 1월국민당이 화중 지역인 쉬저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양쯔 계곡을 비롯한 화남 지역 전체로 나아가는 길목을 공산주의자에게 내줌. 1949년 4월 ~ 5월양쯔 강 이남에 위치한 국민당이 수도 난징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함락됨. 오랜 포위 끝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함락됨. 오랜 포위 끝에 공산주의자들이 상하이를 점령함. 1949년 6월 30일중국 공산당 28주년 기념일을 맞아 마오쩌둥은 중국이 <한쪽 편에 기대야 하며>소비에트 연방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공표함. 1949년 10월 1일마오쩌둥이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을 선포함. 1949년 12월 10일충칭이 함락된 후 장제스가 중국을 버리고 타이완으로 도주함. 1949년 12월 ~ 1950년 1월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정권의 공인과 도움을 받음. 1950년 2월 14일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함. 1950년 6월 ~ 1952년 10월공산주의자들이 남쪽에서 토지 개혁을 시행함. 1950년 6월 25일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의 반격을 받음. 1950년 10월 7일인민 해방군이 티베트를 침공함. 1950년 10월 10일 ~ 1951년 10월<반혁명 진압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대공포 시대가 열림. 1950년 11월미국에 저항하고 한국을 돕자는 <향미 원조>운동이 시작됨. 1951년 ~ 1953년토지 재분배가 완료되고 농민들이 농기구와 역축, 노동력을 공유하는 <호조조>에 편입됨. 1951년 10월 ~ 1952년 6월정부 고위 관료들을 정화하기 위해 <삼반 운동>이 시행됨. 1951년 10월학식 있는 엘리트들을 정부 관리로 편입하고 흡수하기 위한 사상 개조 운동이 시작됨. 1952년 1월 ~ 6월마오쩌둥이<오반 운동>을 통해 민간 부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함. 1952년 2월 ~ 4월중국 정부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함. 1953년 3월 5일스탈린 사망.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에서 휴전이 선포됨. 1953년 11월양곡에 대한 전매 제도가 도입되면서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 <잉여>곡식을 국가에 판매하도록 농부들에게 강요됨. 1953년 ~ 1955년 5월가오강을 비롯한 고위 간부들이 <배신>과<당의 분열을 조장>했다는 혐의로 숙청됨. 1955년 4월 ~ 12월후펑과 그 밖의 지식인들이 <반혁명적인> 집단을 이끌었다는 비난을 받고 반혁명에 반대하는 운동을 통해 77만 명 이상이 체포됨. 1955년 6월호구 제도로 농촌 사람들이 이동이 제한됨. 1955년 여름 ~ 1956년 봄<사회주의의 고조>라고 불리는 농촌의 집산화를 가속화하기 위한 조치로 농부들은 집산주의 사회로 편입되었고 더 이상 토지를 소유할 수 없게됨. 도시에서는 대부분의 산업과 상업이 국유화됨. 1956년 2월흐루쇼프가 모스크바 비공개 연설에서 스탈린과 개인 숭배를 비난함. 막대한 피해를 가져온 스탈린의 집산주의 운동에 대한 비난은 중국에서 사회주의의 고조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함. 마오쩌둥은 탈스탈린화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임. 1956년 9월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언급한 부분이 없어졌고, 집단 지도 체제의 원칙이 환영을 받았으며, 개인 숭배가 공공연히 바난을 당함. 사회주의 고조가 버림받음. 1956년 10월비스탈린화에 고무된 헝가리 국민들이 정부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키자 소비에트군대가 헝가리를 침공하여 반대자들을 진압하고 모스크바의 지지를 받는 새로운 정부를 설립함. 1956년 겨울 ~ 1957년 봄마오쩌둥이 대다수 측근들이 반대를 무릅쓰고 헝가리에서 소련군의 침공을 불러온 사회 불안을 피하기 위해 <백화제방>운동을 벌여 정치적으로 보다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함.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시위와 저항 운동, 파업등을 벌임. 1957년 여름비난 공세가 갈수록 거세져서 당의 지배권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백화제방 운동이 역화를 일으킴. 마오쩌둥이 방침을 바꾸어 이들 비난자들을 향해 당을 무너뜨리려는 악질분자라고 비난함. 반우파 투쟁의 책임자로 덩샤오핑이 임명되고 이 운동으로 50만 명에 달하는 지식인들이 박해를 당함. 대다수가 학생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그들은 궁벽한 곳으로 강제 이송되어 고된 노동을 강요당함. 당은 주석의 뒤를 단결하고 몇 달 뒤 마오쩌둥은<대약진 운동>을 시작함. 1949년 마오쩌둥이 자금성 위로 붉은 깃발을 들어 올리며 피로 얼룩졌던 국공 내전이 종식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해방이라 일컬었지만, 중국인들이 맞이한 현실은 오히려 폭정이었다. 인간성은 짓밟혔고, 전통문화는 파괴되었으며, 500만의 민간인들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 책은 마오쩌둥 정권 아래 살았던 중국 인민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수백건의 비밀문서와, 비밀경찰 보고서, 수정되지 않은 지도자 담화, 살아남은 자들의 목격자 증언 들이 역사적 모사와 함께 어우러 진다. 그러므로 이책은 충격적인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증언이고, 그 과정에서 죽어 간 수백만 망자들에 대한 기록이며, 21세기 가장 강력한 정권들 중 하나인 중화 인민 공화국의 토대에 대한 철저한 재조명이다. - 본문 발췌 1부 정복 (1945~1949) 스탈린은 공개적으로 장제스를 지지하면서도 한편으로 국민당 정부와 미국 지지자들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중국 공산당을 강화하고자 했다. 장제스는 소련이 만주에서 공산당과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지만 스탈린과 다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전시 동맹 관계인 장제스를 지원하는 대신 조지 마셜을 파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립 정부를 세우도록 중재에 나섰다. 한편 공산당도 잃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정전 협정을 이용하여 만주에서 군대를 재편성하고 대도시와 철도로부터 떨어진 외곽 지역에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마오쩌둥의 특사로 평화 협상에 파견된 정중하고 겸손한 저우언라이는 기만술의 대가였다. 심저어 마오쩌둥을 진지하게 설득해서 <중국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라고 공표하도록 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현장에 벌이는 일을 견제받지 않는 한 서류상으로 거의 무엇이든 동의했다. 난징과 상하이가 공산당의 손에 넘어간 뒤로 아직 항복하지 않은 국민당 군대는 더 남쪽으로 후퇴를 계속했다. 광저우까지 밀려난 국민당정부는 혼란에 빠져 허둥지둥 충칭으로 퇴각 12월 19일 타이완으로 탈출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오쩌둥 vs 장제스 2부 장악 (1949~2952) 이전 정권 밑에서 일했던 공무원들은 예전의 일상적인 업무를 대체로 그대로 수행했다. 1945년 국민당 정권하에서 중국 경찰은 호적을 등록하고 관할권 내외 도시에서 신분등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호적 등록 서류 상단에는 그 사람의 출신, 직업, 개인적 지위를 포함하는 계급표가 부여되었다. 결국 혁명에 대한 충성도를 추정하여 좋음, 보통, 나쁨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마오쩌둥은 역적과 압제자, 비적, 지주 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한 다음 가난한 농부들에게 분배하라고 지시 전면적인 계급 투쟁을 촉구했다. 이러한 일을 하기위해 공산당의 행동 대원이 필요했고 공작대는 첫 번째 임무 중 하나는 소련에서 행해진 방식 거의 그대로 마을 주민들을 다섯 계급으로, 즉 지주, 부유한 농민, 중산층 농민, 가난한 소작농, 육체 노동자로 분류하는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마을 지도자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때는 끈끈한 연대로 묶여 있던 마을이 극단적으로 양분화되었다. 공산당은 가난한 사람들을 때로는 총으로, 많은 경우에 창과 몽둥이, 괭이로 무장 시켰다. 희생자들은 지주, 폭군, 반역자로 몰려 비난을 당했고 체포되어 외양간에 갇혔다. 무장한 민병대가 마을을 봉쇄하면서 누구도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출신 계급을 표시하는 길고 가느다란 천을 부착해야 했다. 지주는 흰색, 부유한 농민은 분홍색, 중산층 농민은 노란색 천을 부착했다. 가난한 소작농들은 붉은색천을 부착한 채 의기양양했다. 계급의 적들이 한명씩 무대 위로 끌려 나왔고 그들 앞에는 피를 갈망하며 증오심이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과거의 빚을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수백 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비판 투쟁 대회>의 희생양들은 무자비한 비난과 조롱, 모욕, 폭행을 당했으며 죽임을 당했다. 곧 광란에 가까운 폭력이 마을 전체를 집어삼켰고, 많은 희생자들이 맞아 죽거나 일부는 총살을 당했는데 대부분의 경우에 먼저 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실제로 보유했거나 보유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재산을 숨긴 곳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당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는 피의 계약이 맺어졌고 그에 따라 희생자의 토지와 재산이 대중에게 분배되었다. 대공포 시대 1950년 공산당에게는 친구가 거의 남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공산당을 싫어했고 실업 문제가 극성을 부렸으며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최대치에 육박하는 세금이 부과되고 있었고 도시의 지식인들은 혹시라도 직장을 잃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예술과 종교계에서는 정권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누가 진짜 적이고 누구와 맞붙어야 하는가? 마오쩌둥이 계속해서 말했다.<우리의 대략적인 정책은 국민당의 잔당 세력과 비밀 요원들, 비적들을 제거하고, 지주 계급을 전복시키고, 타이완과 티베트를 해방시키고, 제국주의와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1950년 10월 당시 공산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위협적 사건들이 발생하자 마오쩌둥은 뤄루이칭이라는 인물에게 감독 임무를 맡겼다. 그는 장제스 산하에 있었지만 1928년 공산당에 가입, 초기 소련에서 비밀경찰과 일했다. <거칠고 야만적이며 잔인한>일처리를 보여 주었다. 1951년 3월에 마오 주석은 이미 1만 2,000명의 반동분자를 죽이고 그해 봄에 추가로 2만 명을 더 숙청해서 총 3만 2,000명을 제거하기로 독하게 작심한 허난 성을 치하했다. <인구가 3000만 명인 성에 그 정도면 훌륭한 숫자다.> 여기에 더해서 그는 숫자란 하나의 지표에 불과할 뿐 보다 많은 사람이 제거되어야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공포 정치란 안정적이며, 정밀하고, 무자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외과 수술에 준하는 정밀함으로 절대 마구잡이식 도살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실행되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을 경우 당의 위치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무자비함>>이란 단어가 강조되어야 한다.>뤄루칭의 보고서를 정독한 그는 중국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성에서는 보다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할 것이다. 너무 조기에 숙청을 중단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뤄루이칭 1950년 한국 전쟁은 공산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규합하고 불과 몇 개월전 마오쩌둥이 묘사했던 적들을 거세게 밀어붙일 단초를 제공했다. 3부 통제 (1952~1956) 마오쩌둥은 부패 척결이라는 이름하에 삼반 운동을 실시한다 과거 정풍 운동으 모태로 실시된 숙청 작업이였다.삼반 운동은 머지않아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서 범위를 더욱 넓혀 갔다. 악의적인 외부 세력이 공중 도덕을 해치고 있다는 은밀한 단서들이 여기저기에서 드러났다. 1951년 11월 30일, 부패 척결 운동을 막 시작할 당시 마오쩌둥은 당 지도부에 <우리 간부들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부패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몇 주 동안 사업가나 기업가들의 뇌물 수수와 도둑질, 탈세 사건에 정부 관리가 연루되었다는 보고서들이 전국 각지에서 날아들었다. 1952년 1월 5일에 이르러 마오쩌둥은 자본가들이 당을 상대로 <전쟁보다 훨씬 심각하고 위협적인 맹공>을 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몇 개월 안에 필살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서는 단호한 반격이 필요했다. 역사가 마이클 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오쩌둥은 이제 자본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삼반 운동 <농업이 사회주의화되지 않고는 사회주의가 완성되거나 견고해질 수 없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험을 참고해서 마오쩌둥은 이렇게 덧붙였다. 이 과업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든 일이 될 것이다.> 집산화로 가는 길은 실제로 힘들었지만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은 훨씬 덜 걸렸다. 집산화 첫번째는, 토지를 분배받은 여러 지역의 농민들은 몇몇 가구씩 쟁기질할 가축과 농기구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농기구와 역축, 노동력을 공유하는 가구들을 <호조조>라 불렀다. 그럼에도 호조라는 말이 의미하듯 실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과거 농번기에는 상부상조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했던 것이지 지방 간부의 비난이 무서워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집산화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농민들은 <비애국적>이라거나 <장제스 노선>, <낙오자>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다. 공동으로 농사짓길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대출을 막아 버렸다. 새로운 갈등이 등장했다. 여러 가구가 빌려서 사용했는데 빌려 쓰는 사람들이 가축을 형편없이 방치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왔을 때는 흔히 비참한 몰골에 병들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같은 호조조 내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던 농기구들도 너무 막 다루어지거나 순전히 앙심에 의해 망가지기 일쑤였다. 빌려주는 사람과 빌려 쓰는 사람 간의 갈등은 머지 않아 사유 재산이라는 개념 자체를 위협했다. 집산화 두번째는,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1953년을 기점으로 호조조가 합작사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농기구와 역축과 노동력은 이제 영구적으로 공유되었다. 농민은 자신의 토지에 대한 명목상의 소유권만을 가졌다. 대신 자신의 토지를 출자함으로써 다른 여러 공동 출자자들과 함께 합작사에서 자신의 몫을 보장받았다. 머지않아서 합작사는 종자와 소금, 비료 등을 판매하고, 돈을 빌려주고, 가격을 정하고, 수확 시기를 결정하고, 수매를 진행함으로써 농민들의 삶 전체에 영향력을 드리우기 시작했다. 합작사 도입으로 전체 경작지 면적은 오히려 감소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땅을 출자했지만 보상으로 주어지는 몫이 너무 작아서 굳이 고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버려진 땅도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쓰촨 성의 농부 완쯔샹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조만간 공동 소유로 바뀔 텐데 무엇 때문에 공을 들이겠는가?] 농촌에 가장 큰 피해를 준 변화는 1953년 말에 시행된 전매권의 도입이었다. 정부는 농민에게 모든 잉여 곡식을 국가와 국가에서 운영하는 합작사가 정한 가격으로 국가에 판매하도록 명령했다. 바야흐로 집산화의 세 번재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무역은 공산당정권에 엄청난 적자를 안겨주고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 지원금을 대폭 삭감하고 국가 재정이 파탄의 지경에 이르자 몇 주 뒤 마오쩌둥은 재정 위원회에 보다 많은 곡물을 징발할 방안을 내놓도록 지시했다. 정부는 먼저 모든 농지에 대하여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추산했다. 추산된 수치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실제 생산량보다 훨씬 높게 설정되었으며 때로는 생산량을 늘리라는 압박에 수치가 재차 상향되었다. 수확물을 통제한다는 것은 농촌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지도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민병대가 곡식을 징발해 가는 동안 가난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굶주림에 대한 공포로 울부짖었다. 저항하거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들은 매질을 당했다. 국가 양식국이 광둥 성에서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반동분자들의 옷을 벗겨 추위 속에 몇 시간씩 계속 서 있게 하는 것은 <흔한>일이었다. 광동 성 전역에서 곡식을 팔길 거부했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이 수천명에 달했다. 보다 북쪽으로 올라가 허베이 성의 바오딩에서는 조달 임무를 맡은 대원들이 마을로 진입할 때마다 의레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에 숨었고 어떤 사람은 아픈 척 했으며 몇몇은 밖으로 나와서 당 간부에게 욕설을 퍼붓다가 매질을 당했고 나이 든 여성들은 절망과 두려움에 통곡했다. 한단 전구의 당 간부들은 매우 직설적이었다.<여러분이 잉여 곡식을 신고하지 않겠다면 우리도 열흘간 <<식용유와 소금을 비롯한 기본적인 물품>>의 판매를 중단하겠다.> 스자좡 바로 남쪽에 위치한 위안스 현의 스물네 개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침세례와 난폭한 대우도 모자라 결박당한 채 매질까지 당했다. 그들에게 곡물을 내놓도록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은 조사에서 위안스의 전체 208개의 마을 가운데 절반이 넘는 곳에서 폭력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 간부들은 앞서 몇번의 대대적인 운동을 수행하며 터득한 고문 기술을 이용했다. 몇몇은 공개적으로 마을 주민들을 단순한 <노예>로 치부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모의 처형식이 거행되었고 임신한 여성이 기절할 때까지 구타를 당했다. 어린이들도 일견 <매우 흔한>처벌의 한 형태로 한 번에 몇 시간씩 똑바로 서 있도록 강요 되었다. 자살과 관련해서는 으레 <끊임없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프로파간다의 전형적인 모습 4부 반발 (1956~1957) …………… 내용이 너무 길어서 이쯤 끊도록 하겠습니다. 타자 치는 저도 힘이 드네요. 이후 내용이 궁금하시면 책을 구매해서 한번쯤 읽어 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2부 마오의 대기근(1958~1962)는 다음에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1-09-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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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수다] 지구상의 감옥에 수백명의 죄인들이 있다고 해서 지구상 모든 인간들이 욕먹어야 하나?
여기 짱공유 게시판에 자주 올라오는 종교 탄압글, 욕글, 분란유도글 전부다.. 어디 뉴스나 신문에서 나온 목사들 잘못한 것만 죄다 찾아서 올리지. 웃긴건 그 목사들이 어느교단인지도 모르고 신학대학원을 정식으로 졸업한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단의 이짜도 모르면서 무조건 기독교, 개신교를 ㄱㅐ독교라고 욕하고 떠들지. 그렇게 뉴스에 나오는 목사들… 얼마전 댓글로 싸운 한사람. 별 3개 달았던데 관련글 찾아보니 순~ 야하고 변태적인 게시물만 올리더군.. 그 사람이 뉴스에 나온 목사들 성범죄자로 판결 받은 목사들이 10년전부터 지금까지 총 400명이 넘는다나? 현재 이단 빼고 정식 교단 목사만 20만이 넘음. 한해에 대략 1000명의 신학대, 대학원 학생들이 졸업함. 그리고 한국 개신교 신도들 숫자만 수백만명. 정식 교단 20만명 중에 고작 400명이 성범죄자라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이단이나 정식교단 목사가 아닌 사람을 빼면 100명도 안됨. 그 400명이 성범죄자이니… 한국 기독교의 모든 목사들은 성범죄자와 똑같다. 그리고 신도들도 똑같다.고로 ㄱ ㅐ독이라 칭함을 받는게 옳다. 즉 한국 목사 20만명과 신도들 수백만명 모두가 범죄를 저지른 400명 때문에 똑같이 욕을 먹고 있는것. 정말 재밌는건,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가진 인간들이 여기 짱공유에 많다는 것이다. 한국에만해도 죄인들을 수감하는 교도소가 많다. 거기에 있는 죄인들만 따져도 수만명은 넘을것이다. 그 죄지은 수만명 때문에 한국 사람들 전체를 욕하는짓과 다를게 뭔가? 서울시에 있는 교도소 몇천명 때문에 서울시 시민 전체가 욕을 먹어야 하는가? ㄱ같은 서울 시민이니까? 이 주장이 말도 안되는 일반화이며, ㅄ 같은 소리 라는건 초딩들도 알것이다. 근데 유독 개신교를 욕하는 인간들은 저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하곤 한다. 다시말하지만 한국 개신교 목사들만 20만이 넘으며, 이 숫자는 부목사 전도사, 강도사를 빼먹은 숫자이다. 고작 400명 때문에 수백만명의 개신교인들을 한꺼번에 욕하는건 정상적인 생각인가? 예수님. 하나님도 죄를 저지르는것을 허용한적 없고, 성경에 분명히 죄의 값은 사망(지옥) 이라고 말씀 하신 바 있다. 하나님도 죄를 엄청 싫어 하시며, 그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신거다.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성범죄 저지르는 목사를 좋아하는 사람 없다. 속으로 다 욕하고 있을걸? 하나님도 벼르시고 계실걸? (다만 참고 계실뿐) 성범죄 포함 사기, 도둑질 모두 싫어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한국 개신교 신도들도 그 죄를 싫어한다. 나도 여기 짱공유에 ㅄ 같은 목사들 글 올라올때마다 울화가 치민다. 근데 그건.. 수백만 기독교인이 욕먹을 이유는 안된다.예수님이 사막잡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을만한 이유는 안된다.기독교가 ㄱ ㅐ 독이라고 들을만한 이유는 안된다.이런글 올리는 내가 욕먹을 이유는 안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죄를 미워하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다. 근데도.. 기독교를.. 개신교를…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개신교 얘기만 나오면 눈에 불을 켜고 욕을 하는 인간들이 많다. 마치 목사에게 강간이라도 당했나? 강제로 돈을 뜯겼나? ㅁ모르겠다… 왜 그들이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관민반응하며 욕을 하고 ㄱ ㅐ 독이라 떠드는지 이해가 안된다.. 여기 들어 오는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아주 소수 일것이다. 나도 크리스쳔이지만.. 솔직히 이 짱공유 싸이트 예전에 파일 받을때 자주 들어왔었고, 지금은 토렌트로 받아서 다운받기 위해 자료 검색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사이트 이지만.. 여기는 무슨 개신교 목사나 집사 권사 장로한테 상처 받은 사람들만 가득한건지.. 기독교 얘기만 나오면 피가 튀긴다. 여러분께 한가지만 부탁 한다. 성범죄 저지른 목사는.. 먼저 한국 법이 처단하고, 둘째로 교단 총회가 처단하며, 셋째로 나중에 심판때 하나님께서 또 처벌 하신다. 그러니 여러분은 걱정 안하셔도 된다. 아.. 물론 최근 정치문제로 파면 받은 목사도… 아직도 교회 성도들 잘 나오고 있고 헌금도 잘 걷히고 있고, 이 코로나 때 모여서 예배도 잘드려서 징계도 먹고.. 뭐 그런 ㅄ 같은 목사 들도 있는건 사실이다. ㄱ같은 기독교인으로써 참으로 미안하다. 근데 그 사람은 파면 당했고 더이상 정식교단 목사도 아니다. 아.. 이건 쓸떼없는 이야기 이고,, 어쨋든 나중에는 하나님께 피하질 못할 죗값을 꼭 받으니.. 그건 당신들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상관은 해도… 그것때문에 제발 전체 개신교를 욕하진 말자. 진짜 진짜 돈욕심 없고, 성욕심도 없고, 착하고, 성실하신 목사님들 많으시다. 시골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상대로 목회하시는 목사님도 있다. 이 목사님 밭일 논일 해서 그거 팔아서 생계를 꾸리신다. 여름에는 덥게 겨울에는 춥게 생활하시는 목사님들 많으시고,,, 고아들 데려다 키우시는 목사님도 계시고, ㄱ감자탕 퍼 먹이며 노숙자들 돌보시는 목사님도 계시다. 목사 뿐 아니라… 진짜 눈물겨운 성도님들도 많다. 여기에서 다 말은 못하겠따.. 진짜 ㄱ ㅐ 같은 목사들도 있는거 사실이다. 나도 크리스쳔이고 신학대학원까지 나온 놈이라 교회 실정 너무나 잘 알고, 총회일 하시는 목사니 ㅁ따라다니면서 좋은거 안좋은거 많이 듣고 보고 한 놈이다. 근데.. 아무리 ㄱ ㅐ 같은 목사들이 많아도…. 훌륭하신 분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뭐.. 물론 당신들이 보는 큰 교회 목사들은 …. 화려해 보이고. 돈도 잘 벌고,,, 잘쓰고,, 호화롭게 살고… 성도들도 부자들이 많고.. ㄱ그 큰 교회 목사들이 잘못하는짓들도 많이 봐서… 큰교회가 저러니… 작은 교회는 오죽하랴? 하는 생각으로… 더 욕을 하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도 욕하는 큰교회 많이 있고… 거들떠도 안보는 큰교회가 많다. 솔직히 당신들보다 내가 그 교회의 비리들을 더 잘알면 더 잘 알지 모르진 않을거다. 근데….. 훌륭하신 목사님들 많다. ㅈ정말이다.. 눈물 쏙 빠지게 하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당신들 눈엔 불교나 천주교에 그런사람이 더 많다. 라고 생각하겠지.. 근데 누가 더 잘났으니 어쨌느니.. 그런거 말하자는게 아니고… 당신들이 생각하는 개신교, 크리스쳔… ㅈ죄를 범한다면.. 그 죄 지은 사람은 욕해도 되지만.. 그것 때문에 전체 개신교 훌륭하신 목사님까지 욕하진 말자.. 같으 ㄴ개신교인들이니 니네가 책임지고 해야지!! ㄹ라는 말엔 정말 할말이 없다.. 미안하다.. 그냥 그건 하나님께 맡기면 안될까? 내가 볼땐 너희들이 욕하고 죗값을 내리는것 보다… 하나님께서 그 죗값을 물으시는게 더 무섭지 않을까? 더 확실하면서 말이지.. 부탁이다.. 제발… 여기 올라오는 개신교 글들…… 너무 욕하지만 말자.. 그리고 전체 개신교인들을 욕하진 말자… 특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이시다… 한 종교의 신이며, 개신교인들이 섬기는 분이다. 아버지이자 어머니 이며, 내가 숨쉬는 산소를 주신 분이고 나에게 영혼을 주신 분이고.. 근데 그런 분을 욕하진 말자…. ㄴ너희 들이 아무리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들이라도… 예의는 있을거 아니냐? 사막잡신이니 ㄱ ㅐ독이니… 이런말은 좀 삼가는게 어떨까? 나는 솔직히 이글 쓰면서 저 사막 어쩌고 하는 글을 쓸때도 두려워서 덜덜 떨리는데….. 물론 너희들은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생각하니깐 겁도 없겠지만…. 혹시나 진짜로.. 혹시나 계시다면? ㅎ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소수를 보고 전체를 욕하는 일반화는 하지 말도록 하자. (성범죄자 목회자가 400이던 사천이던… 수백만 기독교인들에 비한 소수이지 않은가?) 솔직히 내가 이런글 적는다고 해봤자… 어짜피 댓글들은 예상이 충분히 된다만…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글이다. 여기 짱공유 자주 들어오는것도 아니고… ㄱ게시판에 재밌는거 찾아서 들어올뿐.. 반말해서 미안하다.. 나이는 먹을만큼 먹었다.
훈드럼작성일
2021-08-0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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