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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이재명 대통령 8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 전문
이재명 대통령, 제8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 연설자 : 대통령 연설일 : 2025.09.24 세계 평화와 공동번영에 기여해 온 모든 유엔 회원국과 유엔 직원 여러분께 먼저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아날레나 배어복(Annalena Baerbock) 제80차 총회의장의 취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안토니우 구테레쉬(Antonio Guterres) 사무총장의 변함없는 헌신과 노고에도 경의를 표합니다.의장님과 사무총장님의 뛰어난 리더십 아래 이번 유엔총회가 더욱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의장님, 사무총장님, 그리고 각국 대표 여러분, 올해는 '유엔 창설'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유엔이 걸어온 지난 80년은 인류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미래세대를 위한 길을 모색해 온 소중한 여정이었습니다.누군가 유엔이 이룬 성취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대한민국의 80년 역사를 바라보라',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도전과 응전으로 점철된 대한민국의 역사는,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도전에 쉼 없이 맞서 온 유엔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유엔이 설립된 해 식민 지배에서 해방됐고 유엔의 도움으로 분단의 상흔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국가정체성을 유지하며 산업화를 일궈내고, 민주주의를 꽃피웠습니다.그렇기에 대한민국은 그 자체로 유엔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 온 나라입니다.대한민국이 참혹한 전쟁과 재난 속에서 우주의 무게만큼 고귀한 생명들의 희망을 되살릴 때마다 그 치열한 연대의 중심에서 유엔의 깃발이 나부꼈습니다.유엔은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주기 위해 애썼고, 어린이들의 삶을 피워낼 교육과 백신을 제공했습니다.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으로 일어선 동방의 작은 나라가 세계의 주목을 받는 당당한 유엔 회원국으로 거듭났고,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국제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한때 민주주의와 평화가 위기에 처했지만, 대한민국은 그때마다 불굴의 저력으로 일어섰습니다.친위쿠데타로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대한국민들의 강렬한 의지를 결코 꺾을 수 없었습니다.지난 겨울, 내란의 어둠에 맞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뤄낸 '빛의 혁명'은 유엔 정신의 빛나는 성취를 보여준 역사적 현장이었습니다.대한민국이 보여준 놀라운 회복력과 민주주의의 저력은 대한민국의 것인 동시에, 전 세계인의 것이 될 것입니다."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피고 있는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말처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향한 여정을 함께할 모든 이들에게 '빛의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의 미래를 논의할 이 유엔총회에서, 세계 시민의 등불이 될 새로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완전히 복귀했음을 당당하게 선언합니다.유엔의 지원과 도움에 힘입어 성장한 우리 대한민국은 이제 민주주의 회복의 경험과 역사를 아낌없이 나누는 선도 국가로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각국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평화와 안전 유지'라는 80년 전 국제사회의 결의와 염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여전히 2억 8천만 명의 인구가 극심한 기아 상태에 놓여있고, 우크라이나, 중동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무력 분쟁, 이미 현실이 된 '기후 위기'가 인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유엔을 창설한 선각자들의 지혜에,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이 증명한 길에 답이 있습니다. 방법은 하나, '더 많은 민주주의'입니다.대한민국의 '국민주권정부'는 집단 지성의 힘으로 더 나은 대안을 찾아내는 민주주의의 혁신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습니다.국제사회가 직면한 공동의 과제를 해결할 방법도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문제를 겪는 모든 국가가 이곳 유엔에 모여 함께 머리를 맞대는 '다자주의적 협력'을 이어 나갈 때, 우리 모두 평화와 번영의 밝은 미래로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총장이 제시한 '유엔80 이니셔티브'가 이 시대적 요구에 발맞춰 유엔의 진화와 발전을 이뤄낼 비전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합니다.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또한 변화된 국제환경을 반영해서 비상임이사국을 확대하고, 효과성과 대표성을 제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대한민국은 2024~25년 임기의 안보리 이사국으로서, 안보리가 국제평화와 안보의 위협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의장님, 총장님, 그리고 존경하는 각국 대표단 여러분,민주주의를 회복한 대한민국은 이제 더 나은 미래를 꿈꿉니다.대한민국은 유엔이 표방하는 자유와 인권, 포용과 연대의 가치를 굳건하게 수호하는 글로벌 책임 강국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나갈 것입니다.대한민국에 거주하는 내외국인 모두가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서 삶의 모든 현장에서 존중받을 수 있도록, 제도와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것입니다.대한민국은 인권 존중의 가치를 실현하면서 국제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또 주도해 갈 것입니다.당장의 생존이 시급한 시대, 연대와 상생, 협력이란 다소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인류는 언제나 깊은 절망만큼 높은 희망을 꿈꾸었고, '더 나은 내일'을 향한 열정으로 지금의 진보를 이뤄냈습니다.어려운 시기일수록,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한 믿음이라는 유엔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전쟁의 참화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일념이 유엔 창립으로 이어져 분쟁을 예방하고 평화를 지켜냈던 것처럼, 미래의 인류가 살아갈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오늘의 우리는 더 협력하고, 더 신뢰하고, 더 굳게 손잡아야 합니다.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다자주의적 협력의 길, 우리 민주 대한민국이 앞서가겠습니다.평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입니다.대한민국에서도, 전 세계 어디에서도 평화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기본적 토대가 됩니다.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분쟁과 갈등은 인간의 존엄과 지속 가능한 발전의 이상이 평화가 없다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설명해 줍니다.오늘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평화유지 및 평화 구축 활동에 있어 핵심적인 기여국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분단국가인 대한민국을 흔들림 없이 수호한 우리의 용사들이 유엔이 주도하는 '지속 가능한 평화'의 길을 돕고 있습니다.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물리적인 요소만이 아닙니다. 인공지능(AI) 기술이 안보 역량을 결정하고 사이버 공격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시대, 우리는 이제 '보이는 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서야 합니다.AI 시대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닌다면 기술 악용으로 인한 인권 침해의 그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한 채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라는 디스토피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면 높은 생산력을 동력 삼아 혁신과 번영의 토대를 세우고,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유용한 기반을 만들 수 있습니다.내일 안보리 의장으로서 주재하는 공개토의 자리가 인공지능의 책임 있는 이용을 촉진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에큰 보탬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아울러 다음 달 대한민국 경주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에서 'APEC AI 이니셔티브'를 통한 AI 미래 비전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첨단기술 발전이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는 '모두를 위한 AI'의 비전이 국제사회의 '뉴노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AI가 주도할 기술혁신은 기후 위기 같은 전 지구적 과제를 해결할 중요하고 또 새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지난 80년 간 '지속 가능한 발전'의 길을 열어젖히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기후 위기 대응을 선도해 온 유엔의 노력에 세계 각국이 화답해야 합니다.대한민국은 과학기술과 디지털 혁신을 활용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재생에너지 비중을 확대하면서 '에너지 대전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올해 안으로 책임감 있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제출하여 국제사회의 단합된 의지에 동참할 것입니다.2028년 칠레와 공동 개최하는 '제4차 유엔 해양총회'에서도 지속 가능한 해양 발전을 위한 실질적 연대를 구축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이처럼 전 지구적 과제에 적극 대처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노력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인류 공동의 약속을 실현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10년 전 유엔이 '지속 가능한 발전 목표'(SDGs)를 수립한 이래, 국제사회는 빈곤 퇴치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여러 진전을 이뤄냈습니다.그러나 개발 재원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가장 취약한 이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 놓여있습니다.엄중한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냅시다. 글로벌 개발 거버넌스를 구조적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재원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성장하고 도약한 대한민국의 사례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올해는 유엔 창설 80주년이자, 한반도 분단 80주년입니다. 새로운 도전과 함께 미완의 과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민주 대한민국은 평화공존, 공동 성장의 한반도를 향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니다.그 첫걸음은 남북 간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상호 존중의 자세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상대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떠한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 행위를 할 뜻이 없음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우선 남북 간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과 적대 행위의 악순환을 끊어내고자 합니다.취임 직후 대북 전단 살포와 대북 방송 중단 등의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앞으로 우리 정부는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의 길을 일관되게 모색할 것입니다.가장 확실한 평화는 싸울 필요가 없는 상태입니다.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 즉 'END'를 중심으로 한 포괄적인 대화로 한반도에서의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END)하고, '평화공존과 공동 성장'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교류와 협력이야말로 평화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굴곡진 남북관계의 역사가 증명해 왔던 불변의 교훈이기도 합니다.남북 간 교류·협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지속 가능한 평화의 길을 열어 나가겠습니다.한반도 평화는 남북은 물론 국제사회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합니다.남북 관계 발전을 추구하면서, 북미 사이를 비롯한 국제사회와의 관계 정상화 노력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협력하겠습니다.비핵화는 엄중한 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단기간에 해결되기 어렵다는 냉철한 인식의 기초 위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 '중단'부터 시작하여, '축소'의 과정을 거쳐 '폐기'에 도달하는 실용적, 단계적 해법에 우리 국제사회가 지혜를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한반도에서의 항구적 평화 실현은 분쟁으로 고통받는 인류에게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을 제공할 것입니다.대한민국은 'E.N.D 이니셔티브'로 한반도의 냉전을 끝내고 세계 평화와 번영에 기여하기 위한 책임과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의 국민이 상호 협력하며 전 지구적인 도전을 함께 헤쳐 나가는 미래가 꿈 같은 장밋빛 전망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이는 결코 불가능한 꿈이 아닙니다.평화란 단순히 무력 충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입니다.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열망이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한, 언제든 연대하고 서로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국경과 언어, 문화적 차이를 넘어 K-컬처가 전 세계인을 하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K-컬처의 성공과 확산은 모든 배경의 차이를 넘어 인류 보편의 공감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습니다.연대와 상생, 배려의 에너지를 모아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열어낸 대한민국은 지속 가능한 미래, 인류의 새 역사를 향해 나아갈 준비를 마쳤습니다.험난한 여정이 예상되지만, 시련이 있어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기에 인류는 한 단계씩 성장하며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이 들었던 오색빛 응원봉처럼, 국제사회와 유엔이 인류의 미래를 밝힐 희망의 등불을 함께 들어주십시오.'평화공존과 공동 성장'이라는 한반도의 새 시대를 향해, 그리고 '함께하는 더 나은 미래'(Better Together)의 새 길을 향해 우리 대한민국이 맨 앞에서 담대하게 나아가겠습니다.긴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대한민국 정책브리핑(www.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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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61년작 '춘향전', '성춘향' 공개 중 ft. 비슷한 시기에 나온 작품들
*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 미성년자에게는 부적절할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부탁 드립니다. 소설 시리즈 '제임스 본드' (007)의 영화화 판권이 흩어져있던 상황에 다른 배급사들(콜롬비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끼리 서로 견제하며 동일년도에 개봉한 '카지노 로얄' 실사판과 '두 번 산다' 실사판, 운석으로부터 지구를 구하는 소재는 겹치나 서로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은 달랐던 '딥 임펙트'와 '아마겟돈', 영역이 달라 딱히 서로 견제할 의도도 없고, 소재도 다르지만 제목과 공개년도가 우연히 겹친 TV 시리즈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그리고 '길복순'이 성공하면서 제작된 스핀오프 영화 '사마귀'에 나온 작품들은 과거부터 여럿 있었습니다.(제목이 사마귀인 작품들끼리 비슷한 타이밍에 나온 것을 다룬 관련 기사도 존재) 고현정과 임시완, 9월에 만나는 두 '사마귀' https://www.mt. co.kr/entertainment/2025/08/28/2025082811357230666 극장 영화를 B급 짭퉁 목버스터 영화사 어사일럼처럼 비디오 영화로 따라한 경우도 아니고, 우연히 공개 시기가 겹친 것도 아닌, 의도적으로 동일년도에 동일 소재 작품을 낸 경우가 한국에도 있었는데, 타이틀에도 적은 두 편의 컬러 영화, '춘향전'과 후술할 '성춘향'이 동시기인 1961년에 나온 작품들입니다. 춘향전The Love Story of Chun-hyang ( Chun-hyang Jeon ) ㆍ 1961 년 홍성기 연출작, 김지미 , 신귀식 , 양미희 , 김동원 , 유계선 출연작으로 후술할 '성춘향'이 제작에 먼저 들어간 뒤 나중에 제작을 시작하여 성춘향을 제작하던 '신필름' 측에서 이를 따지기도 했으며, 제작 시작은 나중에 했음에도 극장 개봉은 이 작품이 10일 먼저 개봉했습니다.(춘향전은 1961년 1월 18일, 성춘향은 1월 28일에 개봉)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628# 이 글을 올린 시점 기준으로 KMDB에서 본편 영상 및 관련 칼럼들과 사료들도 공개 중이며, 아래 내용은 KMDB에서 인용한 작품 소개입니다. 1960년 홍성기와 신상옥의 `춘향전' 영화화 경쟁은 당시의 신문 지면을 장식한 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한국영화계는 `홍춘향'과 `신춘향'으로 일컬어지며 양분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별아 내 가슴에>(1958)의 흥행 감독 홍성기는 <황혼열차>(1957)로 데뷔한 부인 김지미를 춘향으로, 신인 신귀식을 이도령으로 출연시켜 영화를 완성, 신상옥의 <성춘향>보다 일주일 앞서 개봉했다. 결과는 <성춘향>의 성공이었다. 두편 모두 칼라시네마스코프로 원본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지만, <성춘향>의 화려하고 스펙타클한 칼라에 비해 <춘향전>의 칼라는 평면적이며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화면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클로즈업 쇼트가 적고 미디엄숏, 롱숏 등 인물과 거리를 둔 쇼트들이 많다. 이러한 요인은 김지미와 신귀식의 춘향과 몽룡이 그다지 매혹적이지 못하다는 것과 더불어 관객의 재미를 반감시킨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등급정보(1) 심의일자 1961-01-18 심의번호 제1708호 상영시간 110분 개봉일자 1961-01-18내용정보-개봉극장국제,국도노트■ <춘향전>의 제작에 쓰인 필름 약 5천 피트를 밀수품 판매업자로부터 구입해 3백여만 환의 부정이득을 보았다는 혐의로 서울세관에 현품을 압수당하하고 홍성기 감독이 입건됨. 혐의가 밝혀지기 이전에 <춘향전>의 현상을 위해 홍성기 감독이 일본으로 출국했다가 범법자를 출국시켰다하여 논란이 됨. [조선600924(석3), 서울6000929(3)]■ <성춘향>과 <춘향전>은 비슷한 시기에 약 8천만 환이라는 동일한 제작비와 칼라시네마스코프로 제작에 들어가 과도한 경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이 됨. 특히 `영화제작가협회(영제협)'의 "내용의 3분의 1이 같을 경우 제작을 허용치 않는다"는 규약을 근거로 먼저 제작에 들어간 신상옥 감독이 영제협에 진정서를 제출함. 영제협은 <춘향전>보다 먼저 제작신청을 한 신상옥 감독의 기득권을 인정했지만, <춘향전> 제작에 관여하고 있던 조용진 영제협 회장의 지지 아래 <춘향전>도 제작에 들어감. 이를 계기로 신구파로 나뉘어져 있던 영제협은 총회에서 <성춘향>을 지지하는 신파와 <춘향전>을 지지하는 조용진 회장의 구파로 완전히 양분됨 [서울600826(석4), 조선600903(석4), 서울610116(석4), 경향610118(4), 한국610129(6)] 성춘향Seong Chun-hyang ( Seong Chun-hyang ) ㆍ 1961 년 신상옥 연출작, 최은희 , 김진규 , 도금봉 , 허장강 , 이예춘 출연작으로 위에서 언급했듯 경쟁사의 '춘향전'이 먼저 개봉하고, 후대에 비해 나이를 더 중시하던 시절 당시 20대 배우 김지미와 30대 배우 최은희가 각각 주연을 맡은 상황, 신필름 사무실에 괴한이 습격하는 사건 발생, 후대에 비해 상영관도 부족하고 문화 생활을 즐길 여유 역시 부족했던 시대적 한계 등 여러 변수 속에서도 38만 명의 관객수를 기록해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대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이후 영화제 수상작이 되고, 해외에도 수출되며 추가 수익을 거두었으며, 후대에도 주목 받아 디지털 복원 작업 대상 작품들 중 하나로도 선정됐습니다.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0631# 이 글을 올린 시점 기준으로 KMDB에서 본편 영상 및 관련 칼럼들과 사료들도 공개 중이며, 아래 내용은 KMDB에서 인용한 작품 소개입니다. 남원 사또 자제 이 도령(김진규)은 단옷날 광한루로 나왔다가 그네를 타는 춘향(최은희)을 본다. 하인 방자(허장강)에게 춘향을 데려오라 하나, 어미는 기생이지만 아비는 참판이고, 기생 짓은 마다하고 글 읽기와 서화에 골몰하는 콧대 높은 춘향은 호감을 감추고 남의 집 처자를 오라 가라 한다며 거절한다. 어느 밤 춘향의 집에 찾아온 이 도령은 춘향 어미 월매(한은진)에게 춘향을 아내 삼기로 맹세한 후 첫날밤을 치른다.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하던 중, 이 도령은 한양으로 부임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가야 할 처지가 된다. 함께 한양 갈 꿈에 부풀은 춘향이지만, 기생집에 출입한다고 부친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이 도령은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한양으로 떠난다. 신관 사또로 부임한 변학도(이예춘)는 춘향의 미색에 홀려 수청을 명하나, 춘향은 기생은 사람도 아니고 절개도 없냐며 수청을 거절하고 하옥된 후 모진 고초를 당한다. 한편 장원급제한 이 도령은 암행어사로 제수 받고 남원으로 내려와 월매를 만난 후 짐짓 몰락한 척하며 노잣돈이라도 얻으러 왔다 한다. 옥중에서 이 도령을 만난 춘향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월매와 향단(도금봉)에게 그를 극진히 대해줄 것을 부탁한다. 다음날 변학도의 생일잔치 중 춘향이 처형을 당하는 찰나, 암행어사로 등장한 이 도령은 변학도를 파직하고 춘향을 구한다. 수상정보제 5회 부일영화상(1962):남우주연상(김진규)음악상(정윤주)기타 수상정보■ 제 3회 `영화세계 인기상' 작품상 수상■ 제 8회(1961) 아시아영화제 출품, 제 22회(1961) 베니스국제영화제 출품 등급정보(1) 심의일자 1961-01-26 심의번호 제1709호 관람등급 중학생이상 상영시간 144분 개봉일자 1961-01-28내용정보-개봉극장명보수출현황일본.홍콩(62),미국(63)노트■ 1961년 현재 국내외 영화를 통틀어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움(서울 개봉관 기준), 관객수 약 38만 명(상영일수 74일) [조선610428(4)] ■ 일본 대영계 극장과 계약하여 로얄티 5,000 달러에 수출. 일본 6대 도시에서 개봉. [조선620418(석4)] ■ <성춘향>과 <춘향전>은 비슷한 시기에 약 8천만 환이라는 동일한 제작비와 칼라시네마스코프로 제작에 들어가 과도한 경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이 됨. 특히 `영화제작가협회(영제협)'의 "내용의 3분의 1이 같을 경우 제작을 허용치 않는다"는 규약을 근거로 먼저 제작에 들어간 신상옥 감독이 영제협에 진정서를 제출함. 영제협은 <춘향전>보다 먼저 제작신청을 한 신상옥 감독의 기득권을 인정했지만, <춘향전> 제작에 관여하고 있던 조용진 영제협 회장의 지지 아래 <춘향전>도 제작에 들어감. 이를 계기로 신구파로 나뉘어져 있던 영제협은 총회에서 <성춘향>을 지지하는 신파와 <춘향전>을 지지하는 조용진 회장의 구파로 완전히 양분됨 [서울600826(석4), 조선600903(석4), 서울610116(석4), 경향610118(4), 한국610129(6)] ■ 신필름 사무실에 괴한이 들어 집기를 부수고 직원을 폭행하고 달아난 사건이 발생해 두 영화사 간의 춘향전 경쟁에 의한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 [경향610122(석3)]■“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춘향전>과 <성춘향>의 경쟁은 한국 최초의 컬러 시네마스코프 시도라는 대결 구도뿐만 아니라 20대의 젊은 춘향 김지미와 30대 춘향 최은희, 기존의 흥행 감독 홍성기와 신진세력 신상옥 간의 대결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참 인기가 부상하던 젊은 춘향이 나오는 <춘향전>이 더 우위에 있다고 점쳤었다. 그러나 결국 홍성기ㆍ김지미 커플을 꺾고 신상옥ㆍ최은희 커플의 완벽한 승리로 결론이 난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춘향전>의 평면적인 색조에 비해 코닥 필름으로 촬영하고 일본 동양현상소에서 프린트를 제작한 <성춘향>의 칼라는 현란하고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본격화된 컬러로 평가받았다. 시네마스코프 화면을 십분 활용한 풍부한 미장센도 볼거리이다.춘향이 변학도의 수청을 거부하다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죽기 직전에 나오는 창(唱)이 음악으로 활용되어 춘향의 비극적 정서를 자극한다면, 방자 역의 허장강, 향단 역의 도금봉, 포졸 역의 구봉서와 김희갑, 허봉사 역의 양훈은 영화에 코미디적 요소를 부여한다. 또한 변학도의 생일잔치에서 풍악을 울리며 무희들이 춤을 추고 탈춤이 공연되는 장면이나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춘향의 목을 베기 위해 망나니가 칼춤을 추는 장면은 시네마스코프 화면 속에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신상옥 감독은 임희재 각본의 재치있는 대사와, 희극적 요소와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조화시켜 영화의 완급을 조절하면서, 창, 탈춤, 고전무용 등 ‘한국적인’ 요소들을 스펙타클로 적절히 배치함으로써 안정적인 상업영화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춘향전’이라는 우리의 고전을 이 영화가 새롭게 해석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이야기를 대중영화의 화법으로 풀어낸 신상옥 감독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36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여 1968년 <미워도 다시 한 번> 이전까지 약 7년이 넘는 기간 동안 흥행 신기록을 유지하였다.■ 한국영상자료원이 2017년부터 2년에 걸쳐 디지털 복원한 작품. 국내 컬러 시네마스코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작품이나, 지금까지 <성춘향>의 프린트는 3종의 각기 다른 버전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개봉 당시의 원본에 가까운 복원을 위해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기초로 하되, 오리지널 네거티브에서 유실되어 프린트 필름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장면들을 모아 총 144분의 판본으로 복원되었다. (시네마테크KOFA 프로그램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 '발굴, 복원 그리고 재창조'> 2019.5.2~8) '성춘향'의 경우 'KTV 시네마'에서도 도입부의 해설 영상과 함꼐 공개 중이며 자세한 것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https://www.ktv.go.kr/program/home/PG2160006D/content/528438
콩라인박작성일
2025-09-24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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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자작]한국교회목사님들이 절대 말 안해주는 한국교회이야기-2
안녕하세요. 두번째입니다. 지난 한국 개신교 개판의 역사를 초장기부터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소재욕심에 막 넣다보니 글이 길어져서 줄이고 쪼개고 하다보니 정신이 없네요. 그래도 저도 첨보는 소재들이 계속 알게되어 그런쪽에서는 기쁩니다.ㅎㅎ생업이 있는 관계로 일주일에 한번 밖에는 글을 쓰지는 못하네요..ㅠㅠ 일단, 1907년 평양대부흥, 개신교의 부를 수 없는 아버지, 도사 길선주의 활약으로 일단, 개신교는 전국으로 널리 퍼졌습니다. 동양의 예루살렘 ‘평양’을 중심으로 장로교를 중심으로 농촌 지역까지 교회가 전국 각지에서 세워지면서 기독교 공동체 네크워크가 형성됩니다. 그래도 이 네트워크를 통해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지는 데 큰 역할도 합니다. 진짜로 한국 개신교 초반에는 민족운동의 기반이 된다니까요?ㅎㅎ 이때 안창호와 유관순이 개신교출신 독립운동가로 활동을 했습니다. (출처 :캠브릿지대학 / 한국 개신교 성장의 정치적 요인 : 개신교와 1919년 3·1운동.) 다만, 3.1운동 이후 개신교의 민족운동 성향이 계속 거슬려하던 일제는 1935년 조선총독부에서 모든 학교에부터 신사참배를 강제화하고,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일제가 전시총동원 체제로 전환하면서 ‘내선일체’를 그때부터 사용했구요, 조선 내 모든 종교에 신사참배 ‘거부 불가’ 명령을 내립니다. 불응하면 교회 폐쇄와 체포한다는 내용이었죠. 1930년대 중반까지 장로교회는 신사참배를 명백한 우상숭배로 간주하여 거부했고,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그 ‘주기철’목사가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고 외치면서 저항했죠. 1938년 평양총회 : 민족종교 VS 개x교 – 운명을 가른 결정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조선예수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 한국 장로교회, 아니 한국 개신교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총회 개막 전부터 일제는 총회 결의를 신사참배쪽으로 강요함다. 총독부 경찰과 친일 세력을 주변에 뿌려놨구요, 총회 안에는 사복 경찰을 잠입 시켜놔서 안팎으로 완전 감시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슴다. 만장일치로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요 의례적 국가의식”이라는 결의를 채택하여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선언을 하게됩니다. 총회 폐회 후, 총회장은 각 교회에 목회서신을 보내 “신사참배 결의를 거역하는 자는 교인으로도 인정할 수 없으며, 총회의 결의를 거역하는 것은 주님의 뜻에 배반되는 유감천만의 행동으로 교회에서 처벌해야 한다.”고 지시합니다. 여기에 더해 반대자 색출과 징계, 친일 목회자들을 앞에워 교회를 통제까지 합니다.(출처: 총신대 정암신학강좌 1994, “신사참배 문제를 재검토한다.”) 조직적 친일 협력의 전개 장로교회는 1938년 총회의 결의 이후 조직적으로 완전 친일의 길로 들어섭니다. 총회 결의문에서 나오듯, 조선예수장로회는 황국신민의로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이후 전쟁 지원을 위한 각종 친일 활동을 전개합니다. 각 교회 예배 순서와 행사에 국기(일장기)에 대한 경례(헐?), 황국신민 서사 암송(헐??), 도쿄의 천황성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헐???) 등의 국민의례가 도입되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거, 교회 예배때 하는겁니다. ㅅㅂ 조사하다보니 교회 이름으로 온갖 친일행위가 있는데, 더 쓰면 지루할까봐 생략은 하겠는데, 그냥 보통의 친일파가 할 수 있는 친일행위는 다했습니다. 어떤면에서 진짜 대단하네요.. 심지어, 일요일에 친일헌금도 모아서 일본에 갖다 바쳤습니다. 허.. 뭐 나중에는 모은 헌금으로 총이랑 비행기도 사서 일본군에다가도 바치네요. 이런 시부랄.. 그러다가 이마저도 굴욕적으로 1943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강제로 해산당하고 일본이 기만적으로 자기네가 자체적으로 만든 조선장로교단으로 편입됩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는 공식적으로 일본 기독교 산하 조직으로 흡수되버립니다.(출처: 박용규, 『일제강점기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총신대.) 우리편 : 저항과 순교의 기록 그래도 정말 아주 소수의 양심은 끝까지 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앞에 언급한 주기철 목사 외에 몇 명의 목사, 수십 명의 신사들이 절하기를 거부하여 투옥되었으며, 결국 주기철목사는 수차례 구속과 고문으로 인해 1944년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합니다. 여기서 수차례 구속이 나오는 게, 한 사람의 뜻을 꺾으려고 잡고 조지고 풀어주고, 또 잡고 조지고 풀어주고, 그렇게 사람이 죽을 때 까지 합니다. 또 조지는 방법도 개같은 게, 가족 앞에서 사람을 조집니다. 이 광경을 본 주기철 목사의 아들이 충격으로 실어증까지 앓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장로교 총회에서는 총회 결의 이후 주기철 목사를 공식 면직하고 그의 가족을 교단에서 추방해버렸습니다. 뭐 해방 이후 다시 복권시키고 순교자가 되긴 하지만요. (출처: 박용규, 『순교자 주기철』) 장로교회의 분열 : 돌아온 자들 VS 위선자들 해방 후 신사참배의 죄와 책임을 두고 당연히 장로교회 내부는 개판이 되었슴다. 회개와 제명처리 논쟁으로 1952년 분열까지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그 소수의 아군이 생깁니다. 해방 후, 그 개같았던 친일 신사참배 결의에 대한 회개와 과거사 청산 요구가 미친 듯이 제기되었지만, 교단 지도부는 9년간 이리저리 미루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다 투옥되었다가 해방 후 감옥에서 나온 이른바 ‘출옥성도’들이 교회 재건과 회개의 목소리를 강하게 냅니다. 전투력 만땅에 빡이 머리끝까지 쳐있을 만 하죠? 이들이 배신때린 새ㄲ들 죄다 조지라고했는데, 실제로 책임자 처벌까지 이뤄지지 않았슴다. 결국 한상동 목사 등 출옥성도들은 “좋같은 위선자, 친일파, 배신자 새ㄲ들, 회개하지않는 새ㄲ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며 교단을 이탈해버립니다. 이렇게 1951~1952년 고려신학교파(고신파)가 형성됩니다. 부산에있는 고려신학대학교,고신대가 여기 고신교단 소속 신학대학교입니다. 고신교단 지독한게,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년 총회 때 개회 시마다 과거 80년전 평양에서 있었던 제27회 개판 총회에서 결의된 신사참배 가결을 회개하면서 시작합니다. 워딩은 해마다 바뀌긴 하는데, 내용은 똑같습니다. 대대로 굴욕의 역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의지에 눈물이 납니다.ㅠㅠ 또한 1953년 기존의 장로교회 중에 소수 양심파에서도 “시부랄, 도저히 못참겠다. 니네 새ㄲ들은 양심도 없냐? 고신 애들이 그렇게 회개하라는데, 이런 얼굴에 철판깔은 놈들.. 니네랑은 같이 못살겠다.” 하면서 뛰쳐나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교단이 기독교 진보 또는 기독교 좌파라고 불리는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입니다. 그 유명한 민주화운동의 목사님, 한빛교회 ‘문익환’목사님께서 여기 기장교단 소속입니다. 또한 한신대가 기장교단소속 신학대학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열을 겪은 장로교회에서 놀란 나머지 뒤늦게 “내가 잘못했다!!.”하고 1954년 신사참배 취소성명을 냈는데, 그마저도 친일행위에대한 사과, 피해자에 대한 책임인정,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상, 구조적 개혁은 없고, 그냥 ‘내가 좋나 미안하다!!!.’ 로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ㅅㅂ 50년 뒤에 ‘밀양’같은 영화가 나오는 거라고 이 ㅂㅅ같은 ㅅㄲ들아!! 그것도 기독교 모욕하는 영화라고 뭐라하더라?? 제발 반성좀 해라.. 뭐 그 뒤로 1959년 천주교와의 신앙적 입장차이로 인해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으로 대분열을 겪은 후에 조각조각 더더더더더 분열되어서 현재는 공인 장로교단이 대충 300개, 비공식 500개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출처 :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사참배쉬소성명”(1954)연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신사참배 문제를 재검토 한다] 총신대학교, 1994 정암신학강좌 발표문 / 통계자료 : 한기총) 장로교회의 사생아 - 통일교의 탄생 또 요당시 장로교회가 한국사회에 본의아니게 진짜 큰 해악을 끼친게, 1954년 문선명의 ‘통일교’라는 사생아를 태어나게 만들었죠. 신사참배와 그 외의 친일행위와 더불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장로교회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고, 기존 교인들은 장로교회에 도덕적 환멸과 함께 믿음조차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게 문선명입니다. 장로교회 집안에서 자라난 장로교 교인이었던 문선명은 장로교회를 ‘타락한 종교’. ‘실패한 신앙’으로 규정하면서 ‘오직 나만이 예수님의 구원 사명을 이어받아 완성할 수 있다.’는 시작은 좋은데 끝이 이상하게 끝나는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문선명도 첫 활동을 평양에서 시작했는데, 역시 길선주의 영향을 받는 것인지, 본인이 예수의 환상을 봤으며 자신이 예수의 선택을 받은 ‘예수의 사명 계승자’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참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그럼 다른 교계와 다른 종교는 일제강점기때 뭐했나? 뭐 다른 개신교 교단이라고 다를게 없는게, 이승만의 감리교회는 장로교회보다 더 일찍 신사참배하겠다고 배를 드러내까서 꼬리 흔들고 있었구요, 친일행위도 장로교회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장로교회와 나란히 1943년 일본에 복속되었슴다. 해방 후에 여기는 장로교회보다 결과가 더 개판인데, 여기도 초반에는 내부 갈등을 겪다, 결론은 “야~ 그냥 좋은게 좋은 거지, 우리끼리 싸우지말고 다같이 합치고 덮어놓고가자~!.”로 끝났습니다. 누가 끝내래??? (출처 : [한국 감리교회의 신사참배 대응에 관한 연구]. 협성대학교 신한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4) 천주교, 카톨릭도 잘했다고만 볼 수 없는게, 일본에서 신사참배 강요하니까 바티칸 교황청에서 “얘들아~ 그거 그냥 국가의식이라니까, 그냥 일본 시키는 대로 신사참배해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 내 저항하시는 빡시친 몇몇의 신부님은 조선을 떠나신 분도 계시고, 남아서 신사참배 한 신부도 있다고 합디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특별한 사과나 참회없이 스리슬쩍 넘어갔구요. 불교는 더 대박인게, 조선 때 숭유억불정책과 원래 일본 내 승려의 존중 문화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이번에 사료조사로 나왔는데, 저도 처음 안 내용이라 좀 머리가 띵하더군요. 그 당시 한국 불교는 거의 일본화 되었구요. 전국에 불자들을 살살 꼬득여서 재산이고 땅이고 논이고 다 뜯어내서 일본에 바쳤다고 합디다. 조선 때 쌓였던 복수심같은 걸 풀었다고 하던데...(스님들 자비심은요..??) 한편 만해 한용운 스님과 같은 몇몇의 스님은 끝까지 저항하셨다는데, 이게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깨닫습니다..ㅠㅠ (출처: 『친일 승려 108인 – 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 100년이 지난 지금 제일 좋같은 건, 저렇게 친일하지 않고 자기 양심과 신념을 지키신 주기철목사님을 100년전 배신자의 후예들이 팔아먹고있다는 겁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국힘에서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고 노무현대통령의 정신을 이어받자!!.’ 이러고 있는 거랑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거죠. 왜냐면 개신교에서 대표적인 순교자거든요. 지네들한테는 또 없거든요. 그때는 ㅆㅂ 제명에다 출교까지해서 내버렸으면서 이제와서 좋나게들 팔아먹고 있어요. 더러운 놈들이.. 에효.. 특히..명예훼손 때문에 특정인을 찍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빤스 좋나게 좋아하시는 분이 좋나게들 얘기하시드라구요. 그 양반 선배들은 어떤인간들인지 다음 시간에 알려드립죠.. 당신 선배는 주기철 목사가 아냐!!!! 그리고 더 좋같은 건, 정작 그 주기철 목사님 후예인 고신교단은 100년동안 정작 아무런 사과나 화해의 선언이나 손길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교단에서 분리된 뒤에 더욱 철저하게 탄압받고 외면당합니다. 암튼 그래서 더 싫어집니다. 하는 짓이 아주 어디 누구누구들하고 너무 똑같아요. 일단 지금까지 확인된 착한 기독교인 교파는 ‘고신’과 ‘기장’으로 현재 2023년 기준으로 고신교단의 교인 수는 378,376명, 기장교단의 교인 수는 208,307명, 그 당시 전체 개신교인 수가 8,460,000으로 나와있을 때, 전체 비율은 7%입니다. 뭐 쫌 더 추가될 아군까지 추정하면 착한 기독교인은 7-10%, 그리고 90-93%가 쓰레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건 과장 아니에요~)(출처 : 목회데이터연구소) 마치며 제가 원래 이렇게 길게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곧 8.15 광복절이고 하니, 독립기념으로 좀 더 깊게 파고 좀 덜 알려진 내용을 들여다보려고 하니까 내용이 길어졌네요;;; 그동안 미디어에서 독립운동가가 중심이되다보니, 주인공부터 주변인물까지 계속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면서, 조선이 그래도 독립운동이 좀 당연하지 생각했던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료를 뒤지면서 느낀 점은, 큰 벽을 마주한 암담함? 답답함? 1937년부터 조선은 분명 지금의 티벳이나 홍콩하고 다를게 없었다는 거에요. 그때 독립운동가는 지금의 ‘티벳독립운동가’나 ‘홍콩독립운동가’라고 생각하시면 감정이입하시기 편합니다. 그니까 미친 짓이에요. 저항? 무장투쟁? 아마 소극적 저항도 못할껄요? 요즘 홍콩에서 누가 독립운동한다는 얘기 들려요? 거기다가 중일전쟁으로 만주벌판에 점점 영토는 넓어가고 있었죠. 지금 일본 극우가 여전히 대동아공영의 뜻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합니다. 우리도 뭐 예전 고구려 광개토대왕 때 얘기하면서 만주벌판 우리꺼였다. 말타고 놀았다고하면 막 가슴이 웅장해지고 그러잖아요? 그게 뽕이 더 심해지고 그러면 저 미친놈들처럼 되는 거겠죠.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일제가 없는 하늘 아래서 살아 본적이 없는 사람, 그래도 죽을 때까지 겪어 본 적없는 해방과 독립을 위해 저항했던 그를 기리며 마치겠습니다. <이육사> 본명: 이원록(李源祿)호: 육사(陸史) →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출생: 1904년, 안동 출신사망: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감옥 (일제 헌병대 고문 중 순국) <광야>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다음편은 이제 장로교회에서 남겨진 위선자들이 어떻게 악마가 되는 지, ‘서북청년단’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아루리작성일
2025-07-27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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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상담] 상습적으로 사기당하시는 아버지 (사업중독)
안녕하세요 형님들, 매번 눈팅만 하다가 글을 올려봅니다.제목과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상습적으로 사기를 당하시는 것 같습니다.일단 아버지는 20년정도 전, 40대이실 적에 사업이 성공해 한번에 큰 돈을 버신 적이 있습니다.이때 좋은 차도 사시고 서울에 좋은 집도 장만했었죠.그 이후 정확히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10년이 채 안돼서 집은 쫄딱망했습니다. 물론 집도 잃었구요.그 이후 어머님도 사회생활에 뛰어드시고, 누나들도 사회초년생으로 버는 돈을 가져와서 어째저째 빚은 다 갚고,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파악한 것으로는 아버지가 사업중독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큰돈’, ‘유명인이 함께한다’ 이런류의 말을 입에 달고 사십니다.한 4~5년 전부터 저런 말씀을 매일같이 하셨고, 조금만 기다려봐라 수십억 수백억 들어온다 라는 말을 끊임없이 하십니다.물론 지금까지 저런 돈이 들어왔을리는 없구요 ㅎㅎ사실 본인은 사기당하는게 아니라 사업을 하는거라고 생각하고 계셔요.뭐뭐 하니까 착수금에 몇백몇천, 뭐하니까 보증금에 몇백몇천 이런식으로 계속 돈을 쓰시는 것 같고, 한때 잠깐 아버지랑 살던때에는 제가 따로 모아둔 현금도 몰래 가져가셨다가 나중에서야 제가 발견해 크게 다투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제 가정을 꾸리게 돼서, 그냥 잊고 살려고 하는 찰나에, 갑자기 아버지께서 자기 아는사람이 어떤 ‘재단’을 설립한다고, 본인은 이사로 들어가고, 저를 정회원으로 가입시키겠다고 인감증명서를 달라고 하시더군요.쎄했습니다… 그래서 정보를 좀 달라고 하니, 미국에 있는 유명인(역사적 인물)의 이름이 적힌 재단이고 그 이름을 딴 한국 재단을 만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당 미국 재단을 들어가보고 조사를 해보니, 그 유명인과 이름만 똑같고 전혀 관련없는 어떤 부자가 운영하는 재단이더군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미국 재단에서 수십억을 우리 재단에 사업자금으로 줄거고, 그 자금은 사업명목으로 마음대로 쓸수있다. 라고 하십니다..그래서 강력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이건 사기이고, 그 미국 재단은 해당 유명인이랑 1도 관련없는 성만 똑같은 어떤 부자가 하는것이라고, 절대로 가입하시지 말라고.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시더군요. 재차 여쭤봐도 그거 안하기로 했다. 라고만 하시구요. 그런데 뭔가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매번 자기 듣기싫은 소리를 하면 알았어 알았어 라고 하시면서 귀를 닫아버리셨고, 그전엔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말에 가족이 모였을때, 아버지의 핸드폰을 보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재단을 만드는 대표와의 대화내용을 보니, 창립총회에서 함께 찍은 사진, 그리고 저와 통화한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재단 가입인원을 확보하는 내용 등이 있었습니다. 그날 밤 아버지에게 왜 거짓말을 하셨냐고 했고, 아버지는 너 내핸드폰 훔쳐봤냐 하시면서 크게 다퉜습니다. 저는 이제 일이 손에 안잡힙니다. 언제 어디서 엄청난 빚을 지고 오실지 너무 불안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말씀드려도 저보다는 그 사기꾼의 말을 더 믿고 계셔서 더욱 답답합니다. 그래서 꼬리를 내리는척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제가 그 대표랑 직접 이야기 해보고 싶고, 만약 그 대표가 하는 말이 다 말이 되면, 그러면 저도 가입을 하겠다구요. 그러니 흔쾌히 좋다고 하시어, 결국 주말에 삼자대면을 할 예정입니다. 제가 착잡한 가장 큰 이유는, 자식인 저보다도 사기꾼의 말을 더 우선시 하는것과, 제가 조심하라는 말을 하면, 저한테는 그냥 안한다고 거짓말을 하시고 뒤에가서 또 본인 맘대로 하시기 때문에, 도저히 아무말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아버지는 지금 삼자대면을 하면 분명히 제가 틀린것을 깨닫고 재단에 가입할거라고 굳게 믿고 계십니다. 이번에 제가 마음먹고 파헤친 건 이 건 하나지만, 그전에도 입에 달고 사셨던 수십 수백억 이야기들도 돌이켜보면 전부 이런식으로 아는사람이~ 로 시작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업중독보다 투자중독이 더 맞을수도 있겠네요… 저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를 설득하고 싶은데, 그러면 앞에선 거짓말을 하실것이고, 그래서 극단적으로 생각해서 아버지와 연을 끊을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혼자 이렇게 고민하면서 매일매일 너무 고통스러운데 아버지가 너무 원망스럽네요… 혹시 비슷한 경험을 하신 형님들 계실까요?? 어떤 조언이든 미리 감사드립니다.. 두서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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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단독] 금융위, '이정재·한동훈 테마주' 와이더플래닛 선행매매 의혹 본격 수사 착수
금융당국이 '오징어게임 시즌2' 공개를 앞두고 있는 배우 이정재와 최근 사생활 논란에 휩싸인 배우 정우성이 인수전에 참여해 이목을 끌었던 '와이더플래닛(현 아티스트유나이티드)'의 선행매매 등 부당거래 의혹에 대해 본격 수사에 착수했다. 와이더플래닛은 이정재와 정우성, 박인규 전 위지윅스튜디오 대표 등이 손을 잡고 인수한 코스닥 상장사로 지난해 말 이정재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고교 동창으로 알려지면서 '한동훈 테마주'로 엮여 주가가 10배 가량 폭등했던 회사다. 금융당국은 특정 세력이 이정재 사단의 인수 사실을 미리 알고 '정치테마주'로 부각 시켜 주가를 고의적으로 부양해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둔 정황을 포착하고 사실관계 파악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6일 금융당국 등에 따르면 지난 3일 금융위원회 자본시장국 자본시장조사과는 이정재·정우성 두 배우가 소유한 '아티스트컴퍼니'를 비롯해 '컴투스홀딩스', '위지윅스튜디오',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 '와이엔컬쳐앤스페이스' 등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금융위는 이날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 대표 겸 와이엔컬쳐앤스페이스 사내이사인 김모씨와 와이엔컬쳐앤스페이스 사내이사 이모씨 등 회사 관계자들에 대한 압수수색도 벌여 회사 조직도와 각종 계약서, 이사회 의사록 등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압수수색 대상에 오른 아티스트컴퍼니는 이정재·정우성 두 배우와 안성기, 임지연, 염정아, 박해진, 김혜윤 등 유명 톱배우들이 소속돼 있는 종합엔터테인먼트사로 지난 2012년 5월 설립됐다. 이정재와 정우성은 와이더플래닛을 인수한 직후 회사명을 아티스트유나이티드로 변경하고 아티스트컴퍼니와의 합병을 추진 중으로 오는 13일 임시주주총회를 통해 합병안을 통과시킬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 회사와 함께 금융위 수사 대상에 오른 컴투스홀딩스와 위지윅스튜디오, 포스크리에이티브파티는 국내 최대 모바일게임 IT기업인 컴투스 그룹 계열사들이다. 위지윅스튜디오는 박인규 전 대표가 박관우 코드판타지아 대표와 함께 2016년 창업한 시각특수효과(VFX) 회사로 설립 6년 만인 지난 2021년 컴투스 그룹에 인수됐다. 이정재와 정우성의 동업자로 알려진 박인규 전 대표는 지난 3월 이정재·정우성과 함께 드라마제작사인 '래몽래인(현 '아티스트스튜디오')' 경영권 인수전에도 참여한 인물로 현재 래몽래인 창업자인 김동래 전 대표는 박인규 전 대표를 경찰에 사기로 형사 고소한 상태다. 또 박인규 전 대표는 지난달 코스닥 상장사인 캐리소프트가 실시한 104억 규모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본인이 소유한 '폴앤어스'를 통해 20억 원을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회사에는 박인규 전 대표의 관계사로 알려진 '스튜디오빅어스'도 10억 원을 투자해 관심을 끌었다. 와이엔컬쳐앤스페이스는 네이버와 YG엔터테인먼트, 넥슨, 엔피, 위지윅스튜디오가 공동 설립한 합작법인으로 영상 제작 전문 스튜디오 설계 및 개발 업체다. 금융당국은 유가증권시장에서 특정 세력이 상장 기업 인수 및 지분 참여 과정에서 부정한 수법으로 시세조종 행위 등을 통해 막대한 차익을 거두고 이른바 기업사냥을 일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해 11월 26일 이정재와 한동훈 대표는 서울 서초동의 한 고깃집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공개되면서 현대고등학교 동창 사이라는 사실이 일반에 알려졌다. 이로부터 2주 뒤인 같은 해 12월 8일 와이더플래닛은 190억 원 규모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소식을 알리고 이정재(100억 원)와 정우성(20억 원), 박인규 전 대표(20억 원), 위지윅스튜디오(20억 원), 박관우 전 위지윅스튜디오 공동대표(20억 원), 송기철(10억 원) 등이 증자에 참여해 이정재가 와이더플래닛의 최대주주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와이더플래닛은 시장에서 '이정재·한동훈 테마주'로 관심을 받았고 매수세가 몰리면서 무려 7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인수 소식이 전해지기 전 주당 2000~3000원대에 머무르던 주가는 유상증자가 공시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21일 장중 2만9850원까지 치솟았다. 해당 기간의 장중 최고가 기준으로 볼 때 이정재가 유상증자로 사들인 신주발행가액 3185원의 10배 가까운 가격으로 당시 한국거래소는 와이더플래닛을 투자경고 종목으로 지정해 2차례 일시적으로 거래를 정지시키기도 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유가증권시장에서 특정 세력들이 시세조종과 주가조작 등을 일삼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전방위 조사에 착수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정재 등 와이더플래닛 인수전에 참여한 세력들은 보호예수 기한이 끝나지 않아 아직까지는 투자 차익을 거두지 못했으나 오는 9일 1년 간의 보호예수가 풀려 주식 매도가 가능해지며 지난 5일 종가(1만6930원) 기준으로도 매입가 대비 5.3배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상태다. https://biz.newdaily.co.kr/site/data/html/2024/12/05/2024120500390.html
월월왈왈작성일
2024-12-06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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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유머] 경희총민주동문회 시국선언문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은 그것에 대해 걱정하고 대처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상한 일들로 인해 잊히고 덮이는 날들의 연속입니다. 교수님들에 이어, 동문회에서도 시국선언이 나왔네요. 아래는 전문 [ 경희총민주동문회 시국 선언문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던 단체 대화방에 시국을 걱정하는 말들이 올라온 지 꽤 되었습니다.우리는 민주주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알기에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에 대해 존중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임기의 절반이 지난 지금, 그것이 얼마나 헛된 시간이었는지 깨닫습니다.윤석열 정권 2년 반 동안 우리의 일상은 처참해졌습니다.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들며 억지로 청와대 이전을 강행하고, 곳곳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시도를 하였으며, 언론 장악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으나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고, 아플 때 병원에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할까 걱정해야 하며, 한반도가 전쟁 위기에 휩싸이는 것을 목도하고 있습니다.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은, 그것에 대해 걱정하고 대처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이상한 일들로 인해 잊히고 덮이는 날들의 연속입니다.윤석열 정권이 내세운 ‘공정과 상식’은 공허한 말에 불과했습니다. 오로지 자신과 주변인의 사적 이익만 챙기면 그만이었고, 나라의 안위와 국민의 삶 따위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분명 위법한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의 아내와 그 가족만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꼴을 더는 봐줄 수 없습니다.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피로 지킨 우리의 민주주의가 모욕당하는 꼴을 더는 참기 힘듭니다.2016년 촛불 항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그 상황이 반갑지만은 않았지만, 기꺼이 그 자리에 함께한 경희민동 회원들이 외친 주권자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과거 학창 시절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우리는, 지금 다른 시간과 다른 장소에 있더라도 윤석열 퇴진에 한마음 한뜻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우리의 일상을 무능력하고 나태하며 뻔뻔한 윤석열 정권에 빼앗길 수 없기에 외칩니다.윤석열은 퇴진하라!김건희를 특검하라!국회는 윤석열을 탄핵하라!2024년 11월 23일경희총민주동문회 37차 정기총회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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