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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하나님 선거개입 파문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46128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 후보가 박빙으로 승리한 것은, 하나님께서 긴급하게 개입하신 것이라 본다”며 “즉 주사파(主思派-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르는 세력) 나라로 가는 것을 5년간 유예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 기독교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신교 사람들이 자기들 신을 저렇게 아무렇게나 불러들이는 꼴을 보면 저게 고등종교인지 아니면 옛날 무속신앙인지 구분이 안 감. 하긴 요즘 개신교와 불교하는 꼬락서니 보면적당히 가진 자들이 자기들 욕망과 이념 수호, 경제적 번영을 위해 ‘신령님’ ‘도사님’을 자기 편으로 불러들이는 수준이랄까. 윤뭐가 손에 ‘왕’자 새기고, 건진법사 찾아 댕긴다고 욕할 거 없음그 짝이나 지금 교회나 뭐가 크게 다른 건지. 목사는 사실상 무당 푸닥거리 수준으로 떨어진 지 오래고, 신자들이 목사 굿하는데 열심히 ‘비나이다비나이다’ 하면서 ‘십일조’ 올리는 꼴임. 자식 키우는 사람으로서, 애들이 나중에 커서 교회나 절에 가겠다고 하면 정말 보내도 되나 싶은 생각.. 가서 저런 인간들이랑 이웃 관계 맺느니, 가족끼리 같이 식사나 하고 책, 영화 보면서 시간 보내는 게 나은 거 아닌가 함… 결국 가족간, 세대간 정서와 공감, 유대 관계가 중요한 게지. 썩어 빠질 ‘신앙’은 무슨 개뿔.. 대한민국 교회는 돈이랑 욕망, 낡은 이데올로기만 가득 차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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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문학 기초 철학 8 (노자-老子)
도올 김용옥 지음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이름을 이름지우면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이름이 없는 것을천지의 처음이라 하고이름이 있는 것을만물의 어미라 한다.그러므로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늘 욕심이 있으면그 묘함을 보고늘 욕심이 있으면그 가생이를 본다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사람의 앎으로 나와서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그 같음을 일컬어 가믈타고 한다.가믈코 또 가믈토다!뭇 묘함이 모두이 문에서 나오는도다! 노자(老子, Laozi)기원전 604년(추정)중국 초나라 허난성 우리가 노자를 정확히 알고 공부한다는 것은 일류 사상사에 있어서 거의 최초에 문헌화된 종합 철학 또는 종합 사상입니다. 물론 이집트에 도 있고 수메르에도 있고 고문용이 많지만, 거기에 길가메쉬도 있고 어마어마한 책들이 많죠.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 에서의 철학 사상이라고 할 적에 노자 정도의 스케일을 갖춘 완전한 한사람의 단일 저작으로서 철학 책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노자라는 것은 인류 사상 원점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점을 안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포괄적입니다. 우리가 노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냥 중국의 선재 시대의 에 있었던 사상가 정도로만 생각 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사유에 근본을 노자는 제시 합니다. 이러한 것은 히랍 사상에서 불가능하고 플라톤, 탈레스, 헤라이클레이토스를 읽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미 노자의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 자본주의, 경제민주화, 인공지능의 문제 4차산업 이후 문제까지 다 있습니다. 이미 그러한 사유의 원형 등이 이미 노자에게 닿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노자를 공부 한다고 하는 것은 딱 하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노자를 배워야한다. 진정한 사고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원한다면 노자를 모르면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노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폭넓은 사회를 가르쳐 줍니다. 왜냐면 모든 고대 사상은 종교사상입니다. 인간을 억압할려는 사상이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려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자는 완벽한 자유를 가르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노자를 귀하게 여기고, 노자는 억만분의 일도 종교적 색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훨씬 더 유교보다도 원초적인 사상, 원초를 접해야만 오늘날 우리의 모든 사고가 보입니다. 노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오메가 포인트를 아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두뇌가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노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 도올 노자 강의중 사마천 사기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 사마천이 이야기 해줍니다.[史記列傳(사기열전)] 권63 老子韓非列傳(노자한비열전) 老子(노자) 열전(列傳) 총 70편.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 ###부제목록비고권61열전1백이 열전(伯夷列傳)백이(伯夷), 숙제(叔齊) 권62열전2관안 열전(管晏列傳)관중(管仲), 안영(晏嬰) 권63열전3노자한비 열전(老子韓非列傳)노자(老子), 장자(莊子),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 권64열전4사마양저 열전(司馬穰苴列傳)사마 양저(司馬 穰苴) 권65열전5손자오기 열전(孫子吳起列傳)손무(孫武), 손빈(孫臏), 오기(吳起) 노자는 공자를 가르친 위대한 사상가 老子者 楚苦縣厲鄉曲仁里人也 姓李氏 名耳 字耼 周守藏室之史也 “초나라의 고현에 여향 동네에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며, 이름은 귀(貴)다. 자는 담(聃), 주나라의 장서실(국립도서관) 사관(관장)이다. 노나라에 살고 있던 공자가 주나라에 방문할 일이 있어서 노자를 방문해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 (여기서 말하는 예(禮)는 그 당시 모든 천리를 말한다) 공자가 노자에 예를 묻다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老子曰 子所言者 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耳 且君子得其時則駕 不得其時則蓬累而行 吾聞之 良賈深藏若虛 君子盛德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於子之身 吾所以告 若是而已 “노자가 말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옛날 성현들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해골과 더불어 다 썩어 버린것일 뿐이다.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군자도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아가지만(수레를 타고 나간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이리저리 날려 다니는 유랑의 신세가 될 것이오.뛰어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숨겨두고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으나 외모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는 교기(驕氣-교만한 기운)와 다욕(多欲-많은 욕심)을 버리고, 태색(態色), 음지(淫志-음탕함)을 버리시오. 그런 것들은 모두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내가 그대에게 말할 것은 단지 이것뿐이오.” 돌아온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孔子去 謂弟子曰 鳥 吾知其能飛 魚 吾知其能游 獸 吾知其能走 走者可以為罔 游者可以為綸 飛者可以為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새는 잘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는 잘 헤엄침을 알며,짐승은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달리는 짐승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낚을 수 있고,나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가 있다.그러나 용에 대해서는 그것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오늘 내가 노자를 만나보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떠나려는 노자를 관병이 잡고 도덕경을 쓰다 老子修道德 其學以自隱無名為務 居周久之 見周之衰 乃遂去 至關 關令尹喜曰 子將隱矣 彊為我著書 於是老子乃著書上下篇 言道德之意五千餘言而去 莫知其所終 或曰 老萊子亦楚人也 著書十五篇 言道家之用 與孔子同時云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아서, 그의 학설은 자신을 감추어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에 힘쓰는 것이었다.노자는 주나라에서 오래 거주하다 주나라가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을 떠났다.관문(關門)에 이르자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말했다.“선생께서 앞으로 은거하시려 하니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해 저서를 남겨주십시오.”이에 노자는 상, 하 편의 저서를 지어도덕(道德)의 의미를 5,000여 자로 서술하고 떠나버리니, 그 후로 아무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하였다.어떤 사람은 말했다.“노래자(老萊子) 역시 초나라 사람인데 15편의 저서를 남기어 도가 사상의 효용을 논하였으며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 蓋老子百有六十餘歲 或言二百餘歲 以其修道而養壽也 自孔子死之後百二十九年 而史記周太史儋見秦獻公曰 始秦與周合 合五百歲而離 離七十歲而霸王者出焉 或曰儋即老子 或曰非也 世莫知其然否 老子 隱君子也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혹은 200여 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이것은 노자가 도를 닦아 수명을 양생하였기 때문이다.공자가 죽은 지 129년 후,사관(史官)의 기록에는 주나라 태사(太史)였던 담(儋)이 진 헌공(秦獻公)을 뵙고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처음에 진(秦)나라는 주(周)나라와 합해졌다가 500년 후에 나뉘어지고,분리된 지 70년 후에는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하니, 세상에는 그 진위 여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노자는 은둔한 군자였던 것이다. 老子之子名宗 宗為魏將 封於段干 宗子注 注子宮 宮玄孫假 假仕於漢孝文帝 而假之子解為膠西王卬太傅 因家于齊焉 世之學老子者則絀儒學 儒學亦絀老子 道不同不相為謀 豈謂是邪 李耳無為自化 清靜自正 노자의 아들은 이름을 종(宗)이라고 했는데, 종은 위(魏)나라 장군이 되어 단간(段干)에 봉해졌다.종의 아들은 주(注), 주의 아들은 궁(宮), 궁의 현손은 가(假)라고 하였는데가는 한(漢)나라의 효문제(孝文帝)를 섬겼다.그리고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 앙(卬)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므로 제(齊)나라에서 거주하였다.세상에서 노자의 학설을 배우는 사람들은 유가의 학설을 배척하고, 유가는 노자의 학설을 배척한다.“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이이(李耳:노자)는 무위(無爲)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연히 올바르게 되도록 하였다. 도가도비상도 노자는 한사람에 의한 철학적 체계를 가진 책이다. 여지껏 중국 역사에서 철학적 체계란 것이 이해가 되지 못했다. 유교라고 하는 윤리학(서양적 언어), 정치철학 이념 즉 치자가 덕(德)정을 배푸느냐 이러한 유교적 사상에서만 도덕경을 바라 보며, 순수한 철학으로서 이해하지 않았다. 불교를 순수한 무아(無我)철학으로만 바라 본다면, 그것을 순수한 철학으로서 바라보는 사람은 극소수 일 것이다(불교도 들에게 있어서). 그러나 그렇게만 바라 본다면 불교는 잡다한 종교적 재식으로 되고 만다. 철학으로서 의미가 상실된다. 도교의 원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노장사상이다. 노장사상은 <노자>와 <장자>에 설명되어 있는 사상으로, 옛날에는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불교가 들어오면서 도교화(종교화) 되면서 태상노군(太上老君-신격화)화 되어 버렸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라는 말이 마치 데카르트가 신을 언어를 초월한 타자적인 세계로 말하는 것처럼 도교도 태상노군(太上老君), 지존의 어떠한 인간 언어를 초월한 존재로 변질 되어져 갔다. 이처럼 노자도 이상한 초월 종교화 되어져 왔다. 서양 철학에서는 존재론, 형이상학(본체론적 사유)이 있음으로서 끊임 없이 사유가 존재하여 왔고 서양철학 나름대로 순수 이론적인 측면이 있다. 중국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기 때문에 노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체계라는 것이 순수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본적이 없다. 철학이라는 것이 우주와 인간을 포괄하는 하나의 시스템인데 서양적 시각으로 바라본 노자는 존재론 적이나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곡해 되었다. 여지껏 노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으로서 이해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이 도교라던가 장생술, 연단, 신체이론 등 아주 천박하게, 장자 또한 이러한 식으로 짬뽕이 되어 버렸다. 도덕경 道可道 非常道 여기서 말하는 도(道)는 way(우주의 길, 자연의 길), 보편자의 길이라고 말하며 또 한편으로 말한다 의 뜻으로, 서양에서 말하는 로고스(logos-말씀한다)즉 빛이고 포스이고 하나님이다. 요한 복음 세계에서는 하나님 세계에 하시는 말씀이(logos) 어둠의 세계(cosmos)로 들어 온다. 인간이란 육체에 영(logos-하나님의 말씀)이 갇혀 있다. 하지만 영(logos)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육체라는 감옥을 탈출 하는 것은 어렵다. 결국 현실 세계(cosmos)에 같이 사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영을 일깨우기 위해서(다시 하늘로 보내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 보냈다(예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구하신다] 요 1:14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은 인간 사랑밖에 없다. 이웃사랑을 통해서만이 하나님 사랑을 들어 낼수 있다(이웃사랑(인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로 통행이 가능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논리가 된 것이고 요한복음에 깔려 있는 영주 주의라는 것이 깔려있는 논법이다. 말씀이 로고스가 되고 빛이고 하나님이 된 것이다. 그러한 가장 본질적인 현실이 도(道-보편자)이다. 道可道(도가도)는 즉 하나의 언어속에 가둬 버린다.道(도)라는 하나의 보편자를 언어속에 가두어 버리면 하나의 작은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 버리므로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라고만 하면 되지 왜 또 명(名)이라 하는 것인가. 도와 명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도(道)는 본시 이름이 없다. 명이란 것은 이름을 가지는 것(나무, 책상, 자동차 등) 도(道) 또한 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물도 그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말하지 말하는 것이다.(非常名). 道可道 非常道 는 보편적인 것 이고 名可名 非常名 은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는 보편자와 개별자라는 서양 철학의 아주 본질적인 문제가 나와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을 본체론적(형이상학)으로 해석 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세계는 항상 변화 한다고 말한다. 서양에서는 변화하는 세계는 거짓이라고 말한다. 변화하는 세계는 우리 감각에 나타나는 현상(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그 배후에는 실재(Reality)가 있는 것이 있다. 실재(Reality)는 불변이다.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고 플라톤이 이어 받아서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불렀다. 불변의 이데아(idea) 즉 현실은 하나의 감각적인 세계고 영원한 불멸의 이데아로서의 현실은 영원한 것이다 이것이 서양 철학의 이데아론이다. 변하는 세계속에 항상 불변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근본으로 부정하는 것이 노자의 출발이다. 그래서 이 문장을 플라톤식으로 해석한 것이 “도를 도라고 말한다면 말하여진 이치는 영원 불멸의 도가 아니다”라는 해석이 되어져 왔다. 결국은 동양철학을 완전히 서양 철학식으로 상(常-항상상)을 영원 불변식으로 해석했다. 상(常)은 존재론적(영원불변) 상(常)이 아니라 항상 그러한 모습, 항상 그러하다 영문으로 CONSTANT 이지 immutable 이 아니다. 서양철학의 2천년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이다. 道可道의 道(도)는 개념화 시키는 것이다 인간 머릿속에 언어화된 언어속에 들어온 도는 이것은 오히려 플라톤 적이다. 플라톤적인 개념속에 고정된 불변의 도(道-언어)는 非常名 항상 그러한 도가 이니다. 즉 道可道 非常道 는 항상 변화하는 형상속에 있는 도가 아니다. 인간은 항상 변화하고 생각도 변한다 조금전 생각도 부정하는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상(常)의 모습이다. 변화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면 결국 변화를 지속하는 것이다. 영원 불변한 것은 없다. 노자에 대해 좀더 알고 싶으신분은 책과 함깨 도올 티비 노자 강의 110강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https://www.youtube.com/channel/UCIpQ4Z_y2dObDVDt4T_nleQ
로오데작성일
2021-10-08추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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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기독교인으로서 지금의 기독교를 보고있자면...
몇차례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싫어서 하나님이 싫어서 그렇다면 이해가 됩니다. 성경에도 나온 것처럼 진리를 말하면 세상하고 다르니 당연히 박해와 극심한 반대가 따릅니다. 그런데 부패한 기독교, 아니 차라리 성경적 교회 흉내내는 가짜 교회들이 하는 작태를 보면 한심한 것을 넘어서 예수님 얼굴이 먹칠을 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을 비추어볼 때 제 의견으로는 과연 저런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인가 하는 판단이 됩니다. 정치 참여나 반정부 데모 시위는 그리스도인이 해서는 안되는 일을 목사나 총회장 같은 리더들이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사도 바울이 우려했던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이 들어온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카톨릭이 좋다느니 해서 연막 전술 쓰는 것도 말도 안되는 것이며 - 카톨릭은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 무슨 교회가 돈 놀음에 빠져서 큰 건물 짓고 성경이 아닌 다른 사상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이단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입니다. 헌금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데도(신약 성경에 억지로 하지 말라고 명시됨. 억지로 하는 헌금은 오히려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헌금을 강요하고 자신의 배를 채우고 목사라는 작자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며, 광화문으로 그것도 코로나 기간에 어리석은 성도들을 모아서 코로나의 주범이 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해를 입을까요? 참고) 헌금에 대한 성경의 말씀 -고린도후서 9:6,7- 그러나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넉넉하게 심는 자는 넉넉하게 거둔다는 것이라.각 사람은 미리 마음 속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이나 억지로는 하지 말아야 하리니 이는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드리는 자를 사랑하심이니라. 하나님의 교리가 아닌 비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썩은 교회에 헌금하는 것은 범죄행위입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모든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악마들과 하수인들이 정말 원하는 바와 같이 정말 기독교를 순수하게 전하는 사람들 조차 해를 입는 것이 문제입니다. 순수한 기독교 교리가 세상과 다르다는 이유로 박해 받으면 이해가 되지만 성경에 명시된 것도 지키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대형교회든 작은 교회든 일루미나티 세력들이 너무 많이 침투된 것이 열매로 볼 때 눈에 보이는 지금 이때, 가짜 기독교들이 하나님을 감히 모독하고 더러운 교리로 신성한 성경과 하나님을 모독하도록 유도하는 것 자체가 범죄행위입니다. 또한 거기에 동조하는 것도 참회해야할 중대한 범죄입니다. 문제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과 전혀 교통도 하지 않는 무식한 성도들이 그러한 세력들을 묵시적이든 명시적이든 두둔하고 지원한다는 것입니다. 사기꾼들도 속는 사람들이 있어야 사기꾼들이 번성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를 버리고 오로지 자기 입맛에 맞는 세속적 기독교를 숭배한 결과 오늘날 요모양 요꼴이 된 것은 사필귀정입니다. 모든 것이 신성한 성경보다 가짜 목사들 말에, 총회의 말에 최종권위를 두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정부가 비록 궁극적으로는 일루미나티들 앞잡이라고 해도 성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허락된 권세이기 때문에 순복해야 되고 정부에 대한 잘잘못의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성경도 읽지 않고 믿지도 않는 가짜 목사들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독교가 이러한 아주 상식적인 것에 조차에서도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것은 성경을 버리고 자기 편한대로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편리한 세속적 가짜 교리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징벌과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정부가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라면 해야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인 믿음이며 태도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목사라는 작자가 별로 뚜렷이 종교 박해도 하지 않는 국가 권세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일루미나티들의 가르침을 받은 첩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인지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들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들도 과연 그 사람 마음에 성령이 있고 하나님께 기도는 하는 사람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들려드리지요. -롬 13:1~3-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권세자에게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를 거역함이니, 거역하는 그들은 스스로 저주를 받게 되리라. 이는 다스리는 자들은 선행에 대해 두려움이 되지 아니하고 악행에 대해서만 됨이니, 네가 권세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기를 원하느냐? 선을 행하라.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으리라. 이 당시 집권자는 여러모로 정말 말도 안되는 네로 같은 황제였고 다른 황제들도 더 했으면 더 했지 더럽지 않은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순종하도록 베드로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리를 그렇게 전하였습니다. 짱공 여러분께서는 이렇게 판단하시면 됩니다.정치 참여하는 기독교인들은 성경도 모르는 가짜 기독교인들이며, 사이비들입니다.성경을 신뢰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일에 연루되지 않으며 성경에 배치되지 않는한 조용히 정부의 지시에 따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마 15:9.-너희 위선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말하기를'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또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사람의 계명들을 교리들로 가르치니 그들이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였느니라."고 하시더라.
터볼쉬작성일
2020-09-01추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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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가끔 멀쩡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편..
페북에서 퍼왔습니다. 구구 절절 옳은 말씀임^^ ============================== <대면예배를 기독교의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목사들을 조심하십시오>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성명을 읽고- “개들을 조심하십시오. 악한 일꾼들을 조심하십시오.”(빌립보서 3:2)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워해 일하는 일꾼들을 바울 사도는 “개.새.끼”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대면예배를 드리는 것이 신앙을 지키는 길이라는 논리로 교인들을 감염 위험으로 몰아 넣는 목사들이 이 시대의 “그런” 자들입니다.이렇게 드리는 예배는 주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을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 하셨습니다.예레미야 7:21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받고 싶은 것은 제사가 아니다. 너희가 번제는 다 태워 내게 바치고 다른 제물은 너희가 먹는다고 하지만, 내가 허락할 터이니, 번제든 무슨 제사든 고기는 다 너희들이나 먹어라.(공동번역 “너희들이 다 처먹어라”) 구약과 신약 어디에서 “예배가 기독교 신앙의 생명”이라고 하셨는지 이런 성명서에는 적시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어디 그렇게 말씀하셨나요? 그런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제사만 “거룩한 척” 중시하는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예언자들을 통해 “너희끼리 좋아서 드리는 예배” “주님이 받지 않는 예배”라고 비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는 진정성입니다. 장소에 집착하여 예배를 어느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옳냐고 질문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길 예배를 특정 장소 안에서 드리는 시대는 끝났고 이제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시대라고 선포하신 것을 왜 말하지 않습니까?(요한복음 4:24) 성경과 신앙을 왜곡하지 마십시오. 비대면예배를 드리면 예배에 감동이 없다고 당당히 말씀하셨던데 사실 그게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진심인 것이지요. 교인들이 떠나고 교회가 약해질까봐 무서운 것이지요. 그러나 역병이 돌고 있고 교회가 역병 전파의 주요 매개체가 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 대신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전파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그것이야 말로 교회의 전도길과 복음 전파를 막는 행위입니다.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당신의 능력은 예배당 안에서만 나타날지 모르겠지만, 성령의 능력은 공간에 갇히지 않고 어디에서나 역사합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목사들이 이따위 성명서를 버젓히 발표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성령의 능력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대면으로 예배 드리는 그 “맛”을 못잊어 교인과 국민을 역병으로 내모는 목사들은 즉각 이 성명을 철회하고 회개하십시오. ytn 보도를 인용하면, 2020년 8월 26일 기준으로 교회에서 나온 감염자 숫자는 1681명이고, 사찰에서는 92명, 성당 0명입니다. 교회가 분명하고 절대적으로 많은 감염자를 배출하는 통로가 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방역당국이 성당이나 사찰이 아니라 교회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교회에 대한 핍박입니까? 교회를 매개로 확진자가 속출하고, 이로부터 확산된 n차 감염까지 고려하면,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기는 커녕 세상의 무고한 사람들의 생계와 생명을 위협하는 집단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이따위 성명서를 발표하며 여전히 대면예배만 예배라고 고집하는 모습은, 세상 사람들 눈에는 신천지보다도 못한 집단으로 비칠 것이요, 깡패들 보다 위험스러운 집단으로 보일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감염되었는데 그들의 치료를 위해 목사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교회에서 발생한 코로나19 환자 중 단 한명도 목사가 기도해서 치료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 치료를 위해 교회가 성금을 기탁했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모든 코로나19 환자를 국민 세금으로 국가가 치료하고 있습니다. 맞지요? 이 성명서 낸 목사들에게 묻습니다. 대면예배를 드리면 당신 교회에서 확진자 나올 것은 자명한데, 그때 당신은 감염된 당신 교인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당신이야 목사니까 전광훈처럼 입원하면 되겠고, 그래도 교회에서 생계를 책임져 주겠지만, 파괴될 당신 교인들의 삶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교회가 여기 저기 싸질러 놓은 똥 때문에 무고한 시민들이 태풍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그것을 국가와 사회가 온 힘을 다해 치우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대면예배를 고집하려면, 한 명이라도 기도로 고쳐놓고 하십시오. 책임질 수 있을 때 주장하십시오. 결국 국가의 방역 의료 체계를 의존할 당신 아닙니까? 무책임의 끝판왕을 봅니다. 경기도기독교총연합이라는 단체가 이런 성명을 발표한다고 해서 이 의견이 경기도의 기독교인들 대다수의 의견을 담은 것은 아닙니다. 이따위 주장이나 한다면 지역 기독교 총연합은 해산하는 것이 낫습니다. 대면예배를 드리겠다고 주장하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호소합니다. 당신 교회 목사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하는 것만이 진짜 예배라고 주장하더라도 귀도 기울이지 마십시오.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합니다. 집에 머물러 계시면서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십시오. 진심으로 예배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의 생명들을 위하는 우리의 실천이 될 것입니다. 부디 이런 위기의 시간에, 무고한 시민들의 생활과 생계와 생명에 위협이 되는 교회들을 하나님께서 속히 돌이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경기도 과천시 과천영광교회 담임목사 우진성.(이전에 올린 글이 공유가 안된다 하여 다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