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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인류학] 문화의 수수께끼
빗자루와 악마연회 하나는 사람들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마녀가 있다고 믿었던 이유가 무엇인가?또 하나는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로 16세기와 17세기에 이런 마녀사상이 그토록 널리 일반화된 까닭은 무엇인가? 15세기에서 17세기 사이, 유럽에서 50만명이 마녀 또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화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의 죄목은 악마와 계약을 맺은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불법적인 악마연회에 참석한 죄, 악마에게 예배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 맞춘 죄, 얼음같이 차디찬 성기를 지닌 남성 악마인 인쿠비(Incubi)와 성교한 죄, 여성 악마인 수쿠비(Succubi)와 성교한 죄 등이다. 악마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공중을 날아다닌 죄, 단 하나만 으로 도 수많은 마녀가 화형 당했다. 마녀에 대한 ‘고백서’는 많지만 자신이 정말 마녀라고 자인한 사례는 실제 역사 속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고백서’와 관련한 불행한 사실은 그 고백서들이 대개는 마녀 피의자들을 고문해 받아썼다는 것이다.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고 하늘을 날아 악마연회에 참석했다고 고백하기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또 악마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할 때까지 고문은 계속되었다. 처음 자백한 것을 번복하려 하면 그 자백을 재확인할 때까지 더욱 악랄한 고문이 가해졌다. 즉 고통을 덜 받고 화형주에서 조용히 죽어갈지 아니면 몇 번이고 고문을 당할지 선택해야 한다. 피의자 대부분은 화형주를 선택했다.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회개한 마녀들은 그 대가로 장작더미에 불이 붙기 전에 교살당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종교재판 사실 지구상의 어느 사회에서나 어떤 형태로든 마법 개념이 존재한다. 그러나 유럽에 있던 마녀광란처럼 그렇게 격렬하고 오랫동안 지속된 것은 없었다. 어느 사회의 마법처형에서도 유럽에서 만큼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다. 원시사회에서는 누가 마귀에 씌었다고 의심받으면 고문이 죄의 유무를 밝히는 수단의 하나로 사용되기는 했어도, 내가 알기로는 고문으로 조작된 마녀의 입에서 다른 마녀의 이름을 끌어내는 사례는 하나도 없었다. 유럽에서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고백하게 하는 데 고문이 이용된 것은 1180년 이후부터였다. 11세기 이전에는 악마와 함께 있었다는 누명을 쓴 사람이 처형되는 경우가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마법사니 마녀니 또는 마법을 사용하는 초자연적 능력이 있느니 하며 비난했다. 사실 초기에는 가톨릭교회는 하늘을 나는 마녀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기원후 1000년에는 그렇게 날아다니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1480년 이부터는 날아다니는 존재가 없다고 믿는 것을 금지했다. 기원후 1000년경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라는 말은 악마가 조작해낸 환영에 불과하다고 공식 발표했다. 500년 후 교회는 날아다니는 마녀는 환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악마와 손잡은 사람들이라고 공식 표명했다. 13세기에 마녀사냥제도는 성숙되었고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당시까지만 해도 마녀사냥제도는 마녀와 투쟁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교회는 초기에는 마녀의 고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문은 유럽 전역에서 새로 일어나는 로마의 십일조와 성례독점권을 위협하기 시작한 불법적인 교회조직 구성원들에 대해서만 허용되었다. 교회는 이런 체제 전복적인 움직임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다. 이 종교재판소는 이교도를 근절하는 단 한 가지 기능을 하는 준군사적인 특수기관이었다. 이교도들이 비밀단체로 변하자 수사가 여의치 않음을 깨달은 교황의 수사관들은 이교도들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연루자들의 이름을 말하도록 고문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13세기 중엽 교황 알렉산더 4세는 고문권을 인정했다. 악마연회는 이교종파들의 비밀집회와 아주 흡사했다. 다른 이교들에게 한 것처럼 마녀들을 고문하면 그들의 자백으로 광범위하게 비밀 음모집단을 색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침내 로마교황은 굴복했다. 교황 이노센트4세는 1484년 교서를 내려 독일 전역의 마녀들을 근절하기 위해 완전한 종교재판권을 사용하라고 허락했다. 인스티토르와 스프렌거는 그들의 저서 [마녀들의 망치]를 통해 교황을 납득시켰다. 이 책은 그 후 오랫동안 마녀사냥의 지침서가 되었다. 그들은 상상만으로 악마연회에 참석하는 마녀들도 있지만 실제로 많은 마녀가 물리적으로 참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이 마녀들의 위해한 일들을 입증해 분명히 감지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마녀들의 모든 마법과 위해한 행동을 환상이라고 주장하고 마녀들을 두둔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사람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불운, 가축과 곡식의 손해, 아이들의 죽음, 질병, 아픔과 고통, 무신앙, 불임, 정신병 등은 마법 때문에 생긴 것이 되었다. [마녀들의 망치]는 마녀 색출방법, 소추방법, 재판방법,고문방법, 유죄판정방법, 선고방법 등을 소상히 설명하며 끝맺고 있다. 이제 마녀사냥제도는 이후 200년 동안 전 유럽을 휩쓸 수 있는 완벽한 제도가 되었다. 카톨릭 마녀사냥꾼 들이나 프로테스탄트 마녀사냥꾼들 모두 사냥제도에 따라 무자비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해마다 투옥되어 화형당한 마녀들의 자리를 충원할 새로운 마녀들을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마녀광란 교회가 15세기 전투적 메시아니즘 전통의 대변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자원이 밑바닥이 났을 때에 마녀 진압 같은 일에 노력한 까닭은 무엇인가? 체제유지와 이단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항거하는 격렬한 메시아니즘적 저항과 더불어 마법신앙이 점점 널리 퍼져나갔던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 교황은 마녀들에 대한 고문을 허용했고 이 마녀광란은 통일된 기독교가 종지부를 찍고 전쟁과 혁명이 계속되는 16세기와 17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유럽 대중은 봉건주의가 붕괴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들이 출현함으로써 가장 억압받는 시기를 맞게 되었다. 무역과 시장경제, 금융제도의 발달로 토지 소유자와 자본가들은 최대 이윤을 얻기 위해 기업을 키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봉건제 장원의 사유지와 성곽도시의 특징이었던 소규모 부권주의적 관계가 붕괴해야만 성취될 수 있었다. 토지 소유권은 분할 되고 농노와 가신 대신에 지주와 소작인이 생겼다. 영주 대신 상품 작물을 경작하는 기업농이 생겼다. 농민들은 거주지와 주택을 잃었고 수많은 무산농민은 도시를 떠돌아다니며 임금노동자로 전락해 일거리를 찾았다. 11세기부터 인간의 생활은 경쟁적이고 비인격적으로 변하면서 상업화되었다. 즉 전통보다는 이윤에 지배되었다. 빈곤과 소외가 늘어나자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은 교회의 죄와 사치, 부의 집중, 굶주림와 질병, 이슬람제국의 확장, 귀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등 으로 이 세계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결국 마녀광의 실제적인 의미는 마녀광란을 통해 중세 후기 사회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교회와 국가에서 인간의 형태를 취한 가상의 괴물에게 전가 시켰다는 데 있다. 이 괴물의 환상적인 행위 때문에 고통 받고 소외되고 영세화된 대중은 부패한 성직자들이나 탐욕스러운 귀족들을 저주하는 대신에 미쳐 날뛰는 악마들을 저주하게 되었다. 교회나 국가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는 대중과 사회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성직자와 귀족들은 도처에 흩어져 있지만 간파해내기 힘든 적들에게 인류를 보호해주는 위대한 보호자로 등장했다. 결국 이 때문에 십일조를 바치고 세리들에게 군소리를 말아야할 이유가 생겼다. 소란과 분노, 화염과 연기 속에서 내세보다 현세의 삶을 보존해주기 위한 것들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마녀광란은 저항할 수 있는 모든 잠재 에너지를 분산시켰다. 마녀광란은 가난한 자와 무산자들의 저항운동의 가능성을 박탈하고 이웃끼리 서로 싸우게 하며 모든 사람을 소외 시키고 공포에 몰아넣었으며 불신을 고조 시켰고 무기력하게 했다. 그 결과 지배계급에 의존하게 했으며 단순한 지역적인 문제에 모든 사람이 분노하고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마녀광란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부의 재분배와 사회계급 타파를 요구할 수 있는 능력과 교회 및 사회제도에 대결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더 박탈했다. 마녀광란은 과격한 전투적 메시아니즘을 거꾸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마녀광란은 사회특권층의 마법적 총탄이었다. 바로 이것이 마녀광란에 감춰진 비밀이었다. 마녀의 복귀 반문화는 원시인들의 삶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삶을 예찬한다. 반문화인들은 염주를 목에 걸고 머리띠를 두르고 문신하고 울긋불긋한 옷을 입는다. 오래전부터 서구 과학기술의 발달과 모순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태도와 어른들이 예기치도 않게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반문화’라는 생활양식의 전개와 관련이 있다. 반문화라는 생활양식에서는 감정, 자발성, 상상력 등이 선한 것이고 과학, 논리, 객관성 등이 악한 것이다. 반문화라는 생활양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객관성’에서의 도피를 역병이 창궐하는 지역에서 빠져나오기나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여긴다. 반문화의 주된 모습은 의식이 역사를 지배한다는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인간이란 자신의 마음속 생각대로 행동하는 존재다.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들려면 그의 의식 속에서 더 선한 이념을 불어 넣어주면 된다. 객관적 상황이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전 세계는 ‘의식의 혁명’ 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범죄를 증식 시키고 빈곤을 타파하고 도시 환경을 개선하고 전쟁을 없애고 평화를 누리고 인간과 자연을 조화 시키며 살기 위해 인간에게 필요한 단 한가지는 제3의 의식에 마음을 열어 놓는 것이다.“의식은 구조에 우선한다...... 전 국가연합체는 오직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반문화운동의 목표는 의식을 표현하고 과시하고 바꾸고 끌어 올리고 확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을 객관화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즉 이성이란 쓸모없는 ‘쇠부스러기’처럼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3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들은‘사실’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사실을 알 필요가 없다. 사실을 알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출판된 시기가 1975년이라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 하셔야 합니다. 히피 문화가 퍼지고 반문화 활동이 활발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현시대도 무시 할수는 없을듯 합니다. 책은 [문화의 수수계끼], [식인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총 3권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 에서는 돼지를, 흰두는 소를, 기독교는 말을 먹지 못하는 이유, 전쟁이 일어나면 인구수가 감소해야 되지만 줄지 않고 폭증하는 이유, 식인 문화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등 다양한 인류학적 궁금증을 유물론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오데작성일
2023-02-19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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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엽기영상] 런던 브리지 작전
엘리자베스 여왕 서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런던 브리지 작전이란… 9월 8일 버킹엄 궁전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의료 감독을 받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대중에게 공개된 성명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아침 추가 평가에 따라 여왕의 의사들은 폐하의 건강을 우려하고 있으며 그녀가 계속 의료 감독을 받을 것을 권고했습니다. 여왕은 편안하고 발모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발표 이후, 사람들은 여왕의 상태에 대한 우려를 트위터에 공유했습니다. “The Queen”, “Balmoral”과 함께 “London Bridge”라는 용어가 곧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런던 브리지 작전은 여왕이 세상을 떠날 경우에 대비한 단계별 계획을 말합니다. 이러한 조치가 조만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지배적이지만, 이에 수반되는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있습니다. 런던 브리지 작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공식 발표 전에 왕실 가족의 사망 소식이 누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군주의 사망에 대한 암호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52년 조지 6세 때였습니다. 그의 코드네임은 하이드 파크 코너(Hyde Park Corner)로 궁전이 정부 관리들에게 그의 사망 사실을 알릴 때 사용했습니다.그의 사망 이후 다른 고위 왕족의 코드네임은 다리와 관련이 있습니다. Queen Mother는 Operation Tay Bridge(Diana 공주와 공유), Prince Philip은 Operation Forth Bridge, Charles 왕자는 Operation Menai Bridge라는 코드명을 가지고 있습니다.엘리자베스 여왕의 코드네임은 런던브리지(London Bridge)이며, 그녀의 사망 소식이 궁전에서 관련 당사자들에게 전달되면 “런던 브리지가 다운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사용됩니다. Operation London Bridge는 1960년대부터 시행되었으며 정기적으로 수정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여왕의 사망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사람은 여왕의 개인 비서가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런던 브릿지가 다운되었습니다”라는 코드 문구를 사용하여 총리, 내각 장관, 추밀원 사무국 및 고위 공무원에게 알리는 의무를 수행합니다. 영연방 정부 수반은 외무부와 영연방 사무소에서 통보합니다.여왕이 해외에서 사망하면 영국 공군의 32번 비행대 소속 제트기가 런던에서 보내져 여왕의 시신을 되찾을 예정이다. 데일리 익스프레스. 그녀가 런던 외곽의 Windsor나 Sandringham에서 세상을 떠난다면 그녀의 관은 차로 버킹엄 궁전으로 옮겨질 것입니다.여왕이 발모랄(Balmoral)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 여왕의 관이 웨이벌리 역(Waverley Station)에서 런던(London)까지 가는 영국 왕실 열차(British Royal Train)에 탑승하기 전에 여러 스코틀랜드 대성당 내에서 일련의 의식이 진행됩니다. 모든 시나리오에서 여왕은 버킹엄 궁전의 왕좌로 돌아갑니다.군주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리는 그녀의 장례식까지 그곳에 머무를 것입니다. 관은 사이드노트당 오전 11시에 도착할 예정이며,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버지인 조지 6세와 고인이 된 남편 필립공과 함께 안식되기 전에 런던의 하이드 파크 코너에서 윈저 성까지 23마일의 행렬이 이어집니다. 윈저 성 조지 6세 기념 예배당. 대중에게 언제 통보됩니까?주요 수치가 통보되면 언론 협회, AP 통신 및 로이터와 같은 뉴스 와이어 서비스가 주요 방송사에 통보합니다. 라디오 진행자들은 또한 보도를 제공하고 왕실이나 세계의 다른 주요 인물이 사망했을 때 깜박이는 “오빗 라이트” 시스템을 통해 알림을 받게 됩니다.모든 영국 라디오 방송국에는 여왕의 죽음을 대비하여 대기 중인 두 개의 재생 목록이 있습니다. 즉, Mood 1(가장 슬픈 음악)과 Mood 2(슬픈 음악)입니다. BBC 라디오 프로듀서인 크리스 프라이스는 허프포스트가 게시한 블로그에서 “낮 라디오 1에서 세이버스 오브 파라다이스의 ‘Haunted Dancehall(Nursery Remix)’을 들었다면 TV를 켜라.”라고 말했다. 찰스는 언제 왕이 되나요?엘리자베스 여왕의 사망이 확인되는 대로 찰스 왕세자는 공식적으로 찰스 3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폴리티코. 그녀가 사망한 다음 날, 즉위 협의회 회의가 열리며 찰스가 왕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Whitehall에서는 깃발을 반 돛대로 낮추고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의회는 폐회합니다. 그런 다음 총리는 성명을 발표하고 하원은 여왕이 사망한 다음 날 하원에서 고(故) 군주에게 경의를 표할 것입니다. 10일간의 애도 기간 동안 모든 국회 업무가 중단됩니다. 애도의 10일 동안 무슨 일이?Politico 보고서에 따르면 여왕이 사망한 날은 D-Day로 표시되고 다음 9일은 D-Day+1, D-Day+2 등으로 표시됩니다. 이 애도 기간 동안 의원은 의회에 앉지 않으며, BBC는 다른 영국 방송사와 마찬가지로 진행 상황에 맞춰 일정을 변경할 것입니다.여왕의 장례식이 열리는 날 런던 증권 거래소는 영업을 중단하고 영국 은행은 문을 닫습니다. 이 때문에 그 날은 사실상 은행 휴일이 될 것이지만 이름은 지정되지 않습니다. 출처:https://histimes.com/%EB%9F%B0%EB%8D%98-%EB%B8%8C%EB%A6%AC%EC%A7%80-%EC%9E%91%EC%A0%84%EC%97%90-%EB%8C%80%ED%95%B4-%EC%95%8C%EC%95%84%EC%95%BC-%ED%95%A0-%EC%82%AC%ED%95%AD%EC%9D%80-%EB%8B%A4%EC%9D%8C%EA%B3%BC-%EA%B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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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일반] [책과 함께보는 유튜브] 중동은 왜 싸우는가?
끝나지 않은 갈등과 대립, 지금 중동을 이해하기 위한 21개의 역사적 장면 ‘중동’이란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유전에서 치솟는 검은 불길, 모스크에 모여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무슬림들, 히잡을 두른 여성들… 그리고 전쟁, 테러, 시위,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는 중동 관련 뉴스는 아마도 난민, 전쟁, 인권 유린, 테러 등과 관련된 어두운 소식들이 주를 이룰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이 중동을 ‘화약고’로 표현합니다. 도대체 왜 중동은 화약고가 된 걸까요? 왜 중동 사람들은 자꾸 피를 흘리며 싸우는 걸까요?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리고 대답을 풀어가는 키워드는 ‘정체성’입니다. - 들어가는 글 Scene 01 무함마드, 신의 계시를 받다 이슬람 국가의 탄생 40세의 한 중년 사내가 산속 동굴에서 날마다 깊은 명상에 빠져 있었다. 그곳은 메카(Mecca) 인근의 하라 산이었다. 이슬람력으로 라마단월 하순 어느날, 그는 걷잡을 수 없는 힘에 붙들려서는 어디로부턴가 들려오는 음성을 듣게 된다.“읽어라!”사내는 대답했다.“저는 읽고 쓸 줄 모릅니다.”그러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네 알라(하나님, 신)의 이름으로 , 알라께서는 한 방울의 응혈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꾸란 -96:1-2) 사내는 훗날 이 목소리이 주인공이 천사 가브리엘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처음 그 목소리에 사로잡혔을 때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 채 덜덜 떨기만 했다. 그 사내의 이름은 무함마드 메카에서 무역상을 하면서 부유한 삶을 살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히라 산에서 명상에 빠져 들었다. 그러다가 서기 610년 라마단월 하순 어느 날, 천사를 통해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된 것이다. 천사의 목소리를 듣게 된 무함마드는 몸을 떨며 기어가다시피 해서 겨우 집에 도착했다. 천사를 통한 신의 계시는 이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알라는 무함마드를 신의 뜻을 대신 전하는 ‘예언자’로 발탁했다. 그리고 알라를 알지 못한 채 다른 신을 섬기는 인류에게 올바른 길을 전하고 그들이 알라에게만 예배하도록 이끄는 역할을 맡겼다. 훗날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꾸란>의 첫 번째 구절을 전달받은 밤을 ‘권능의 밤(알라 알-카드르<Laylat al-Qadr>)’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모든 무슬림들은 바로 그날을 기려 라마단월 한 달 동안 금식을 하면서 지낸다. 지금도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 문화권에서 가장 큰 행사로 여겨진다. 무함마드는 자신이 전하는 종교를 ‘복종’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슬람(Islam)'으로 칭했고 자신을 따르는 공동체를 ’움마(Ummah)'라고 불렀다. 당시 아라비아 중세 무역의 중심지였던 메카에는 빈부격차가 심했는데, 일부 권력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광경이 흔한 모습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는 이에 맞서 무슬림들 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짖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은 유목민들의 수평적인 부족 문화와 맞물려 메카 사회 전반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나아가 무함마드는 메카에 만연하던 다신교 전통을 강력히 비판했다. “오직 유일신이신 알라에게만 예배하라!” Scene 02 누가 예언자의 후계자인가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632년 고열로 쓰러진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엄청난 카리스마로 거대한 움마(이슬람 공동체)를 이끌어간 지도자가 부재로 무슬림들은 당황했다. 무슬림들은 모범적인 삶을 살아간 무함마드가 알라의 선택을 받은 예언자이며 알라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어 인간들에게 자신의 뜻을 전달하도록 했다고 믿었다. 현존하는 유일신 알라의 대리인이자 알라의 메시지를 완성한 최후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지닌 권위는 다른 사람이 대체 할 수 없는 탁월한 것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이를 둘러싸고 무함마드와 함께 초기 이슬람 세계를 확산시키던 무슬림들(이들을 ‘사하바’라고 한다)은 두가지 견해로 갈라졌다. 한쪽은 무함마드의 혈족이 후계를 이어야 한다는 주장(시아파), 또 다른 하나는 신에 대한 경건함을 지닌 그리고 무슬림들의 모범이 되는 사람 중 유능한 인물이라면 혈통과 상관없이 예언자의 후계자로 선출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수니파). 전자를 따르는 이들은 예언자의 혈족이라면 보통 사람과는 달리 분명 뛰어난 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이런 관념은 자연스러웠다. 부족 중심 사회였던 아랍인들 입장에서 부족장의 후계자는 그의 혈족이 이어받는 일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슬람 공동체 원로들은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고 결국 아부 바크르가 초대 칼리파로 선출됐다.칼리파로 선출된 아부 바크르는 아라비아 반도 정복을 완료했고 이슬람 세계의 팽창을 위한 정복활동을 지속해나갔다. 634년 아부 바크르는 불과 27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뒤로 한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병이 악화될 무렵 아부 바르크는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2대 칼리파 우마르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물리쳐 이슬람 제국을 확장한 정복자였으며 제국의 기틀을 다진 법률가이자 입법자라는 대업을 남겼다. 우마르는 페르시아 출신 노예에게 암살당해 생을 마감했다. 그가 칼리파에 오른지 10년만의 일이다. 우마르의 측근들은 우스만 이븐 아판을 3대 칼리파로 선출했다. 우스만은 전임 칼리파 우마르가 임명했던 총독들을 해임한 후 그 자리에 자신의 가문 우마이야가의 인물들을 지방총독에 앉혔다. 폭정에 한거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군과 면담 하던중 정문을 지키던 호위병 몰래 벽을 넘어 칼리파 우스만을 살해당한다. 어찌됐든 우스만이 죽은 후 드디어 알리가 4대 칼리파로 등극한다. 수니파 이슬람에서는 초대 칼리파 아부 바크르부터 4개 칼리파 알리까지 4명의 칼리파를 일컬어 ‘라쉬둔(Rashidum)’이라고 한다. ‘올바른 길을 간 칼리파’라는 뜻이다. 수니 이슬람에서는 라쉬둔이 통치했던 시기를 후대가 본받아야 할 이슬람의 황금기로 묘사한다. 알리가 칼리파에 오르기 위해 우스만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제국 곳곳에 들불처럼 번졌고 사하바 원로인 탈라하와 주바이르 등의 예언자의 젊은 아내였던 아이샤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이샤와 알리는 무함마드의 친족으로 집안 식구였으나 서로 견제하는 입장이었다. 예언자의 총애를 받았던 아이샤는 무함마드가 죽은 이후에도 종종 자신의 권위를 칼리파 위에 두려고 했다. 예언자가 살아 있을 때에 남긴 언행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고 있었던 그녀는 <꾸란>의 편집과 해석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칼리파와 아이샤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알리는 659년 카와리지 세력을 공격해 퀘멸시켰다. 그러나 이공격에서 살아남은 카와리지 중 한 명인 이븐 물잠이 661년 쿠파의 대모스크에서 알리를 암살했다. 이처럼 라쉬둔의 시대는 우마르 이후 3명의 칼리파가 모두 암살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알리가 죽자 그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가 추종자들에 의해 칼리파로 추대됐다. 이제 하산과 무아위야, 두 명의 칼리파가 경쟁하게 됐다. 무아위야는 이집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고 세력을 점점 더 확장해나갔다. 반면 하산을 비롯해 알리를 지지한 사람들은 이라크를 근거지로 한 지방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무아위야는 하산에게 많은 돈을 주며 양위할 것을 요구 했다. 힘으로 무아위야를 당해 낼 수 없었던 하산은 결국 퇴위를 선언하고 무아위야를 칼리파로 인정했다. 살해된 알리가 속해 있던 하심 가눔을 포함해 알리를 따르던 사람들은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을 우마이야가문에 내주고 말았다. 이후 알리를 지지했던 무리들을 ‘시아트 알리(알리의 무리)’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이슬람의 소수파인 ‘시아파’의 유래가 됐다. 이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에서 후계자가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예언자의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라 후계자를 지지했던 이들을 일컬어 ‘수니파’라고 부른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 ‘순나(sunnah)’를 따르는 자들이란 의미이다. 무아위야 이후 혈통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수니파가 이슬람의 다수파가 됏다. 수니파의 지도자가 칼리파라면, 시아파의 지도자는 ‘이맘’이다. 수니파에게 ‘이맘’은 이슬람 신학자인 울라마들 중에서 예배를 이끌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붙이는 존칭인 반면 시아파에서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종교 지도자를 의미한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를 초대 이맘으로 추앙했다. 그리고 알리의 장남 하산이 2대 이맘, 카르발라에서 죽은 후세인이 3대 이맘으로 추대됐다. 이슬람 세계는 두명의 칼리파, 즉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파와 카이로의 파티마 왕조 칼리파가 경쟁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1174년경 수니파 술탄 살라딘에 의해 파티마 왕조는 멸망하게 되고 시아파의 정치적 위세가 약화됐지만 16세기 페르시아 지역에 사파비왕조가 다시 등장하면서 시아파가 수니파의 아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소수세력인 시아파의 경우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 발전했기에 다양한 형태로 변형됐다. 12이맘파와 이스마일파 외에도 여러 갈래의 시아파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신비주의 또는 기존 민간신앙과 결합하는 등 한결 더 유연한 형태를 보인다. 이 때문에 훗날 와하비즘과 같은 수니파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에서는 시아파를 이단으로 여겨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다. Scene 03 술탄 메흐메드 2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다 튀르크 전성시대 “메흐메드 2세는 오늘날까지 터키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술탄이다. 그의 별명은 ‘파티히(정복자)’다. 무려 1100년 동안 유럽의 심장 역할을 하며 오리엔트 세력과 맞서 기독교 문명을 수호해온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틴 제국을 정복해서 얻은 별명이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곳만 정복한다면 동서무역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어 나라가 부유해질 테고, 유럽으로 진격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어 대대적인 영토 확장의 기회가 생겨날 것이 분명했다.” 책 저자, MBC라디오 피디 박정욱 작가가 직접나와 씨리즈로 책과 중동이야기를 합니다.
로오데작성일
2021-12-28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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