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남자 / 사랑하는 여자 (5)

진짜킹카 작성일 22.04.13 14:09:31 수정일 22.04.13 14: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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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이야기 -

 

 

 

서러움에 실컷 울고 잠에서 깨어났을 땐 오히려 개운한 기분이었다.

 

언제 집에 왔는지 인기척도 없던 언니는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고 깨지 않게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전날 많은 눈물을 쏟아낸 눈가가 붙지는 않았는지 거울 앞에서 양옆으로 살짝 살짝 도리질을 하며 살펴봤다.

 

이미 바짝 메말라버린 눈가에는 예상과 달리 눈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얼굴을 살펴보다 그 오빠를 만나기 위해 몸을 깨끗이 씻고 욕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앉아 도대체 왜 그 오빠는 그렇게도 마음의 상처를 남기려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야속하던 오빠를 막상 본다는 생각에 괜히 만나는 건 아닌지 고민도 되었지만 만나기로 약속도 했고 물어볼 것이 많았기에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오빠를 만나면 내게 왜 아린 상처를 줬는지, 꾸밈이나 거짓으로 나를 대하는지, 

 

나를 얼마나 가벼이 여기는지, 몇 마디 대화를 해보고 오빠에게 조금이나마 열려져 있던 마음을 정리하려 했다. 

 

   ‘오빠가 오해라던데 무슨 오해인지 들어나 봐야겠다. 그나저나 왜 자꾸 어제 그 기억만 머릿속에서 잘려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설마 그 오빠 괜히 나 때문에 대구에 가는 건 아니겠지?’

 

아주 짧은 동안에 또다시 오빠 걱정을 하는 거울 안의 내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왠지 오빠와의 인연은 쉽게 비켜가지 않고 앞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올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묘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살짝 가로저으며 약해진 마음을 다시 독하게 고쳐먹고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다.

 

밋밋한 모습으로 오빠를 만나는 것보다 예쁜 모습으로 당당히 오빠를 만나 도도하게 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내 모습을 바라 볼 오빠의 놀랄 모습도 상상하며 한동안 바르지 않았던 손톱의 매니큐어까지도 정성스레 발라 입김을 불어 말렸다. 

 

자신감 있게 내가 할 말도 하고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만남에 더 당당하게 행동하기 위해 더욱 화장에 신경을 썼다.

 

여러 외출복 중 고르고 고른 검은색 정장치마와 연한 노란색의 블라우스를 입고서야 나갈 준비를 마쳤다.

 

바퀴가 달린 짐 가방을 가지고 언니 집에서 나서려다 곤히 자고 있는 언니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삶에 찌들려 있는 언니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가 악몽 같던 지난 기억이 대구에서도 떠오를 것 같아 얼른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리고 화장대 위에 그 동안 고마웠다는 메모지를 남기고 조용히 현관문을 나섰다.

 

   ‘안녕 언니, 그 동안 고마웠어.’

 

전날에 비가 왔다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눈부신 봄 날씨는 불어오는 살랑바람에도 촉촉한 기운이 남아있었다.

 

큰길로 이어진 보도블록을 신고 있던 하이힐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었다.

 

걷다보니 몇몇의 보도블록에 작은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있었고 신고 있는 하이힐을 적시지 않으려 조심히 걷던 중 택시 한 대가 내 앞을 막아섰다.

 

내 몸을 실은 택시는 금세 오빠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에 도착을 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 시계를 보니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10여분 지나있었다.

 

저 앞에 보이는 오빠는 언제부터 나를 기다렸는지 말갛게 웃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점점 다가올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오빠의 얼굴은 마치 밤을 새운 사람처럼 남루해 보였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잤나? 정말 내가 오해하는 걸까?’

 

또다시 약해지려는 마음을 독하게 고쳐먹으려고 어제 속상해 울컥거리며 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나 매섭게 쏘아보는 내 기분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오빠는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은주야, 안녕 잘 잤니?”

 

전날 저녁을 같이 먹었을 때보다 낯설어 보이는 얼굴로 말을 건네던 오빠는 내게 주려고 했던 건지 음료수 두 개가 손에 쥐여있었다. 

 

평범히 건넨 인사에도 가슴속에서 욱하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맺혀 있던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오빠 같으면 잘 잤겠어!’

 

목구멍 바로 밑까지 올라왔던 말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기는 싫어 간신히 삼켜버렸다.

 

그러나 잔인할 만큼 독한 말을 뱉었던 오빠에게 화가 난 표현 정도는 하고 싶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냥…… 뭐. 울어서 기운이 없으니 잠은 잘 오더라.”

 

“아침 안 먹었지? 자 이거 받아.”

 

오빠는 미안한 눈빛으로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본 후 다정한 미소를 곁들이며 손에 든 두 개의 쌀 음료 중 하나를 살며시 내밀었다. 

 

   ‘이렇게 보면 자상해 보이는데…… 어제는 왜 그렇게 날 아프게 했을까?’

 

서운함과 섭섭함은 여전했지만 일단 건네주는 쌀 음료는 새침한 척 받아 쥐었다.

 

   ‘날 울리지만 않았어도 정말 좋았을 건데.’

 

자상하게 챙겨주는 이런 행동이 고맙기도 하고 또 이 친절한 모습 이면에 다른 모습이 숨겨져 있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자상한 모습에 어제의 설움은 조금씩 밋밋해져 가고 이제는 약간의 서운함만 가슴에 남아있었다.

 

그래도 당장 화가 풀려가는 모습을 보이긴 싫어 아주 짧고 사늘하게 들릴 수 있도록 대답을 했다.

 

“고마워.”

 

“고맙긴…….”

 

미안한 표정과 불안한 시선으로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는 못하는 오빠에게 더 이상 심하게 쏘아붙일 수가 없었다.

 

“내가 무조건 미안해…….”

 

그저 갈퀴눈으로 째려보며 화가 난 척을 했고 그런 내 눈에 시선을 겨우 걸치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오빠는 사과를 했다.

 

움츠려있는 오빠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쏘아붙일 기회를 놓칠까 싶었고 또 미안하다는 말 한 번에 서운한 기분을 풀고 싶지도 않았다.

 

“어제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는데!”

 

“아니, 그냥 너 도와주려고.”

 

지금 상황과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이 이상하게 들렸지만 무시한 채 계속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그렇게 쉽게 보이는 여자였어?”

 

눈썹과 눈썹사이에 근심이 가득하던 오빠는 한참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쉽게 보이는 여자였으면 오늘 나오지도 않았어. 지금도 난 네가 상당히 어려워.”

 

아무리 화를 내고 쏘아붙인다고 해도 내가 너무 어렵다는 말이 그렇게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다그칠수록 오빠는 심리적으로 불안해져오는지 입술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고 그런 모습이 또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오빠, 진짜 오늘 대구 가는 거야?”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오빠의 모습에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어 말을 돌렸고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일도 있고 은주도 보고 싶고 해서.” 

 

“치! 말만 잘해. 에이그!”

 

분위기가 바뀌자 다행이라는 듯이 짧은 한숨을 내쉬던 오빠는 입가에 환하게 번져가는 미소를 내게 보였다.

 

그래서일까, 어제 밤 잠들기 전부터 불편했던 마음은 조금씩 안정되었고 더구나 장난까지 치고 싶어 오빠 뺨을 살짝 꼬집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속 썩이는 남자가 내가 뭐 좋다고 이러는지.”

 

오빠도 내 행동에 마음이 놓였는지 미소 뒤편에 조금 남아 있었던 옅은 그늘이 사라졌다.

 

“여기도 꼬집어주라. 이렇게 꼬집어서 은주 화가 풀린다면.”

 

환하게 웃으며 반대쪽 뺨을 내밀던 오빠의 능청스러운 애교에 까르르 한바탕 크게 웃었다.

 

“오빠, 지금 대구 갈 건데 시외버스 타고 갈 거지?”

 

“응, 안 그래도 너 나온다고 해서 10시30분 차표 2장 끊어 놨어.”

 

대수롭지 않게 건네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정한 미소가 머물러있는 오빠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럴 때 보면 되게 생각이 깊고 자상해 보이는데…….’

 

감동을 자아내려고 했던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아주 조금 남았던 서운함마저 다 녹아내리고 말았다.

 

“그래, 오빠. 고마워. 그렇다고 내가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야!”

 

“알아. 앞으로 우리 은주 만나면서 어제 쌓였던 서운함 내가 조금씩 다 풀어줄게.”

 

화가 완전히 풀린 모습을 벌써부터 보이기가 싫어서 여전히 새침한 척 말을 건넸지만 나를 칭하는 우리 은주란 말에 얼굴에 묻었던 도도한 표정마저 녹아내리고 말았다.

 

   ‘우리 은주? 예전에 엄마가 나를 부를 때 하던 말인데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네. 그러고 보니 앞으로 나를 만나면서?’

 

오빠의 달달한 더 듣고 싶어서일까, 그 대답을 유도할 수 있는 물음이 엉겁결에 생각났고 그 기대하는 말들이 다시 한 번 오빠 입에서 나오기를 바라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오빠, 이젠 대구에서 여기 안 오는데 우리가 어떻게 만나려고 앞으로 나를 만난다고 그래?”

 

단지 나를 보러 대구에 자주 온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오빠는 제법 긴장을 한 것처럼 얼굴은 빨갛게 변해버렸고 몸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어제 가만히 생각해보니깐…… 나 진짜 너 많이 좋아하는 거 같더라.”

 

수줍은 듯 매끄럽지 않은 오빠의 말투와 또다시 일렁이는 괜한 설렘 때문인지 목소리가 제법 높아졌다.

 

“정말? 그래서?”

 

“그 동안 여기 포항에서 주말 내내 있었는데 부모님에게도 죄송하고 해서 이젠 자주 대구에 내려가려고…….”

 

지금 내 뱉는 말이 나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 온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치! 대구 오면 내가 만나준데?”

 

“만나줄 때까지 계속 전화 할 꼬야.”

 

새침한 내 콧소리를 흉내 내는 오빠의 애교가 귀여워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꼬야는 뭐야, 치. 알았어. 대구에 있을 때 오빠가 전화 오면 시간 봐서 한 번 만나주던가.”

 

오빠는 손가락으로 찔린 옆구리를 움찔거리곤 따뜻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주시하며 다정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다.

 

“은주야.”

 

“응?”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곤 살짝 눈을 내리깔고 뭔가를 망설이던 오빠는 다시 내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진짜 나쁜 뜻 없이 말하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꺼내려는 말이 또 상처로 다가올까 무섭기도 하고 긴장도 되어 떨리고 있는 오빠의 입술만 빤히 쳐다보았다.

 

“한 번 안아 봐도 될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내 눈이 커진 듯 오빠 얼굴이 내 시야에 가득 차 들어왔다.

 

요동치는 심장 뜀박질과 묘한 흥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태연한 척 말하며 양팔을 벌렸다.

 

“응, 안겨.”

 

잠시 머뭇거리던 오빠는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고 그 때 풍겨오는 오빠의 살 냄새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동안의 남자들은 가슴이나 만지려하고, 키스나 하려하고, 잠자리만 생각했었는데 이 오빠는 여느 다른 남자들보다 다르긴 달랐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따스함이 온 몸으로 서서히 퍼져나가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조금 휘청거렸다.

 

“미안해. 은주야.” 

 

온몸에 힘이 빠져 거의 내 몸을 맡기 듯 안겼었고 그 때 들려오는 자상하고 낮은 목소리에 아침부터 이성적인 기분은 감상적으로 바뀌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다.

 

지분지분 스며오는 눈물이 오빠 얼굴을 가릴 것만 같아 눈물을 꾹 참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빠, 앞으로 나 아프게 하지 마. 앞으로…….”

 

오빠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그저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칼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거리에 오고가는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도 세상은 너무 조용했다.

 

 

 

- 남자 이야기 -

 

은주의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후에는 잠을 잘 수가 없어서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다가 새벽에 알람을 맞추고 간신히 잠이 들었다.

 

하지만 근심이 제법 컸던 탓인지 알람시간 보다 조금 더 일찍 눈이 떠졌다.

 

간단하게 부모님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은주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보다 1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밖으로 첫발을 내딛었을 때 밤새 내내 내리던 비가 어둠을 다 쓸어갔었는지 너무나 환한 아침이었다.

 

   ‘오늘 안 나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생각은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손쉽게 잡은 택시는 시외버스터미널에 금세 도착을 했고 매표소에서 10시30분 차표 두 장을 사곤 다시 바쁘게 움직여 다시 약속장소로 출발했다.

 

일요일 오전에는 도로가에 차가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또 금세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서두른 만큼 은주를 만나려면 20분이나 더 있어야 했다.

 

잠시 서성거리다 인근 편의점에서 쌀 음료 두 개를 사고는 가슴을 졸이며 은주를 기다렸다.

 

어느새 약속시간은 지나가고 있었고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은주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한참을 불안한 시선을 여기저기 던지다 한숨을 폭 내쉬고 맥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은주가 안 나오면 어쩌나? 만약에 나온다면 어떻게 은주를 달래야 하지?’

 

은주가 나와도 고민이었고 나오지 않아도 고민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고민 할 것이라면 은주가 나와서 고민하는 것이 훨씬 나을 듯 했다. 

 

그렇게 초조하게 시계만 보면서 은주가 모습이 드러나길 기다렸다.

 

   ‘정말 은주가 경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주고 싶은데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고민에 벌써 약속 시간은 5분이 더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저 앞에서 택시 한 대가 정차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방향으로 걸음을 떼며 유심히 쳐다보자 어떤 여자가 날 보며 도도하게 서 있었다.

 

   ‘어, 은주랑 많이 닮았는데? 진짜 은주 맞나?’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은 은주의 얼굴은 유난히 예쁘고 청순하게만 보였다.

 

몇 번이나 눈을 찔끔 감고 뜨기를 반복해도 예쁜 은주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까이에서 그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은주가 서 있는 곳으로 향해 재촉했다.

 

눈초리가 싸늘한 은주의 얼굴이 선명히 보이기 시작했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더 다가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정색을 하는 은주의 모습도 너무 예쁘게만 보였지만 이내 입가에 묻은 웃음기를 털어냈다.

 

   ‘내가 이런 여자에게 상처를 줬던 거였구나.’

 

서로의 시선이 뭉쳐졌을 때 어떤 말을 꺼낼까 잠시 망설이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은주야, 안녕 잘 잤니?”

 

“그냥…… 뭐. 울어서 기운이 없으니 잠은 잘 오더라.”

 

기분이 상한 듯 시큰둥하고 토라진 말투조차 가슴을 떨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와 줘서 그리고 이렇게라도 반겨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일부러 차갑게 대하려는 은주였지만 뭔지 모를 애틋한 감정에 제대로 눈을 마주 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조건 미안해…….”

 

미안하다는 사과를 했지만 은주는 어제 일이 떠올랐는지 북받쳐 오르는 흥분에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어제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랬는데!”

 

그녀가 차갑게 소리를 질러대도 어제처럼 또다시 울어버릴 것만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아니, 그냥 너 도와주려고.”

 

시선을 내리깔며 뱉은 작은 목소리는 은주에게 전달되지 못했는지 혼잣말이 되어버렸다. 

 

   ‘정말, 난 정말, 널 도와주려고 그랬었는데…….’

 

은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문 채 그녀 본인도 아프겠지만 나 역시 무척이나 아파오는 말을 꺼내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그렇게 쉽게 보이는 여자였어?”

 

은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내 의사를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쉽게 보이는 여자였으면 오늘 나오지도 않았어. 지금도 난 네가 상당히 어려워.”

 

계속 화를 낼 줄 알았던 은주는 심적 동요가 일었는지 다시금 따지듯 묻지도 않았다.

 

여전히 눈을 흘기는 은주였지만 입가에 웃음기가 돌아오기 시작했고 더 이상 싸늘한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가슴속의 불안함을 쓸어낼 수가 있었다.

 

너무나 떨렸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을 때 은주는 내 뺨을 살짝 꼬집었지만 그 느낌은 꼭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속 썩이는 남자가 내가 뭐 좋다고 이러는지.” 

 

들으라고 했던 말인지 아니면 혼잣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였다.

 

   ‘은주도 정말 날 좋아하긴 하는구나.’

 

그제야 가슴속의 불안함을 쓸어낼 수가 있었다.

 

그 검고도 맑은 눈동자를 지그시 쳐다보던 중 홀린 것처럼 그녀를 안으려다가 또 실수할까 싶어 움찔했다.

 

안아보고 싶다는 말도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로 은주는 너무 쉽게 상처를 받고 너무 많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은주야.”

 

“응?”

 

“진짜 나쁜 뜻 없이 말하는데…….”

 

은주의 가냘픈 어깨를 안으려는 생각에 마른 침을 삼켰고 그 때 은주의 시선은 내 목울대를 스치듯 지나 다시 내 눈자위로 돌아왔다.

 

“한 번 안아 봐도 될까?”

 

멀뚱히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이내 다행이라는 표정과 긴장된 모습을 감추려는 표정을 번갈아 지으며 대답했다.

 

“응, 안겨.”

 

은주의 좁은 어깨를 안고 가만히 있는 순간에 어렴풋한 떨림이 감싸고 있던 내 팔로 전해졌다.

 

그리고 은주에게 꼭 해야 할 말 같아서 안겨 있는 그녀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미안해. 은주야.” 

 

“오빠, 앞으로 나 아프게 하지 마. 앞으로…….”

 

그 동안 포항에서 은주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안겨 있는 은주의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안타까웠다.

 

지금 눈가에 어려 있을 눈물을 내게 들키지 않고 말릴 수 있도록 한참을 포근히 안아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따뜻하게 안고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아침 햇살을 환하게 반사시키며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그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하던 중 은주 손에 쥐어진 휠 백을 문득 건너다봤다.

 

별 생각 없이 시선을 던진 가방 하나에 창식이 어제 했던 말이 떠올랐고 또 어제부터 마음먹고 결심했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정말 은주 도와주고 싶은데…….’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무턱대고 말한다면 은주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또다시 바보 같은 실수를 한다면 은주는 이번엔 영영 떠나갈 것만 같았기에 터미널에 다다를 때까지 마냥 망설이기만 했다.

 

그렇게 여전히 마음에만 담아둔 채 대구행 시외버스에 올라탔다.

 

언제부턴가 내 옆에서 나란히 걸어왔던 은주의 왼손이 내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다.

 

여전히 모르는 척 손을 꼭 잡으려 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은주는 내 손에 맡긴 손을 거둬가며 때 묻은 시외버스 커튼을 활짝 젖혔다.

 

버스 기사가 통로를 다니며 좌석을 확인한 후에야 버스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은주는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지 처연히 창밖만 보며 아무 말도 없었다.

 

   ‘정말 은주가 대구에 팔려가는 걸까? 그렇다면 혼자 가지는 않을 건데…….’

 

주체할 수 없는 궁금증을 내색도 하지 못하고 창밖을 보는 은주의 옆모습만 쳐다봤다

 

시외버스가 고속도로에 막 올라 포항을 빠져나갈 때 손에서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창밖을 보던 은주가 내 손을 잡았던 것이었다.

 

흠칫거리며 손을 내려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은주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내 얼굴로 옮겼다.

 

그리고 몇 가닥의 머리칼을 귀 위로 조심스레 쓸어 넘기곤 쑥스럽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예뻐? 계속 쳐다보네?”

 

내 얼굴로 향해 있던 눈을 마주하며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주는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돌려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웃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려 보일 듯 말 듯 한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과해줘서 고마워.”

 

“잘못했으면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하잖아.”

 

“최근 몇 년 동안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사람이 오빠가 처음이야.”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맥없이 속삭인 말에 가슴속에 맺혀있던 안타까움을 자극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마음고생을 한 모습이 상상이 되는 순간 뾰족한 바늘 하나가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그런 내 표정을 오히려 걱정스럽게 보던 은주가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오빠, 나 사실…….”

 

“사실 뭐?”

 

슬그머니 꺼내려는 말이 왠지 너무 불안해서일까, 듣기 싫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은주의 입술에 손가락을 살며시 갖다 대는 상상을 했다.

 

그런 불안한 예감은 전혀 아니라고 힌트를 주고 싶었는지 은주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쳤다가 지나갔다.

 

“나 사실 지금 집에 가는 거야.”

 

“응? 집에?”

 

“나 오빠 처음 본 날 그 날이 마지막이었어.”

 

“마지막?”

 

“응. 이제 난 이제 그런 일 안해.”

 

아무리 미소를 보이고 있어도 은주가 어떤 말을 꺼낼지 조금 긴장은 했었다.

 

하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조금 전까지 나 혼자만의 상상에서 고민을 했던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미안했다.

 

그런 내게 은주는 뜬금없는 말로 잠깐의 정적 사이에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빠, 내가 선물 줄까?”

 

그저 입술만 물끄러미 쳐다보다 은주의 목소리에 흠칫거리며 눈자위로 시선을 옮겼다.

 

“무슨 선물?”

 

“오빠가 사과를 했으니깐 내가 선물을 주려고.”

 

은주는 좌석 위쪽 선반에 올려놓은 가방에서 모래시계를 꺼내며 대뜸 내 앞으로 내밀었다.

 

주먹 두 개 크기의 모래시계는 주황색에 가까운 분홍색 모래알을 품고 있었고 언뜻 처음 은주를 보던 날 화장대 위에 있던 모래시계도 떠올랐다.

 

“내가 아끼던 모래시계야. 포항에 와서부터는 모래시계를 모으는 게 취미였거든.”

 

왜 은주가 포항에서 모래시계에 집착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건네 준 모래시계는 그저 받아 쥐었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모래시계를 뒤집어 모래알을 흘러내렸다.

 

“그럼 대구가면 뭐 할 거야?”

 

그 모래알들을 보며 잠시 감상에 빠진 듯 보이는 은주에게 슬쩍 물었고 내 물음에 흠칫거리던 은주는 살며시 내 팔짱을 끼며 웃어보였다.

 

“공부할 거야. 공부해서 전문대라도 졸업해서 취업해야지.”

 

“오빠가 뭐 도와줄게 있을까?”

 

“그냥 지금처럼 자상하게 아니 편하게만 대해주라.”

 

“알았어. 그 정도쯤은…….”

 

슬그머니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은주는 또다시 아무 말이 없었다.

 

또 얕은 감상에 빠진 듯 보이는 은주를 방해하지 않으려 그저 옆모습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천천히 내게로 고개를 돌리던 은주는 무슨 결심을 한 듯 그리고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 입술이 무척이나 떨리고 있었다.

 

“오빠…… 오빠는 내 과거를 알잖아…….”

 

다소 긴장한 은주에게 편안하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과거를 다 알지만…… 나랑 사귈 수 있을까?” 

 

먼저 말하려고 기회를 보던 중에 오히려 더 먼저 말을 꺼내는 은주가 얼마나 사랑스럽게 보이는지 요동치는 심장과 함께 나 역시 입술이 떨려왔다.

 

“나 지금 대구 너 때문에 가는 거야. 네가 너무 좋아지고 있거든…….”

 

은주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팔짱 낀 팔을 당겨 몸을 붙이곤 내 왼쪽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얹었다.

 

그리고 차창 밖에 저 멀리 떠있는 흰 구름으로 시선을 던지며 나지막이 말했다.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귓가에 나긋하게 들려오는 은주의 말에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농담처럼 물었다.

 

“왜? 그 때로 돌아가서 오빠 안 만나려고?”

 

“아니, 오빠 만나기 10분 전으로 돌아가서 그랬던 모습 안 보여 주려고…….”

 

별 생각 없이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여러 번 생각을 했던 것처럼 눈빛이 너무 쓸쓸했다.

 

마냥 안타까운 마음에 왜 그토록 은주가 모래시계에 집착을 했는지도 약간이나마 알 것 같았다.

 

   ‘모래시계를 돌려놓으면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갈 것 같아서 그렇게 집착을 했던 거니? 항상 타임머신을 떠올릴 만큼 포항에서의 생활을 되돌리고 싶었던 거구나…….’

 

그 순간부터 은주의 시선을 붙들고 있는 창밖의 흰 구름에 나도 같이 시선을 묻었다. 

 

여전히 은주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손을 꼭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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