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둑코 전투와 전차 산탄[散彈]포격

슈퍼스탈리온 작성일 08.11.03 22: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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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탄은 엽총에서 발사되는 탄환이다.

발사되면 한발이 아니라 수십개에서 수백 개의 작은 납탄이

퍼진 탄막을 형성한다.

사냥꾼들이 흔히 꿩탄[4호탄]이라고 하는 탄이 산탄이다.


이런 산탄을 대형화 해놓은 포탄이 전차포에서도 발사가 된다.

나의 군 생활시  M48 전차마다 몇 발씩 적재되어
있던 이 전차포 산탄을  보고 그 기이하게 생긴 모습에
신기 해 했던 기억이 새롭다.

 

탄두가 다른 포탄처럼 원추형으로 되어 있지 않고 마치 칼로
잘라놓은 무우처럼 평면인 것이 특징이었다.


발사하면 900개의 납탄이 500미터 유효 사거리 내에서
탄막을 형성해서 살상 효과를 발휘한다고 했지만 발사하는
훈련을 받아 보지는 못했었다.

마치 크레모어 원격 격발 폭탄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것 같아

적의 밀집 공격을 공격하기에 유용하겠다는
생각은 여러번 해보았다.


현재 120mm 포는 구경이 더 커져서 발사하는 산탄 숫자도
훨씬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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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mm 전차 산탄. 이라크에서 M1A1 전차가 사용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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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캐니스터[canister]탄이라 부르는 전차 산탄이

대 활약한 곳은 주월 맹호부대의 일개 중대가
대승한 둑코[Duc Co] 전투에서였다.


산탄으로 싸운 주인공들은 둑코 한국군 중대 전술기지에

지원 나왔던 미군 25사단 69전차 대대의 전차소대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역시 같은 전투에서 최고의 전투력의 발휘했던

한국군 보병과 포병의 대활약에 밀려 거의 알려져 오지 않았었다


둑코 전투는 1966년 8월9일 맹호 부대가 미군의 요청에 의해서
캄보디아 국경에 파견한 기갑연대  3대대 소속으로서
캄보디아 국경에서 불과 십여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독립 중대
전술기지에 주둔했었던  9중대가 같이 파견된 포병대대의 지원으로  
막강한 박격포와 기관총을 앞 세우고 기습한 월맹군 2개 대대를
격멸한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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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뒤 수습된 월맹군 전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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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했던 부대는 월맹 정규군 88연대 소속 2개 대대
700명의 병력이였다.

2개 대대의 월맹군은 맹호 중대 병력보다도
여섯 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월맹군이 전술기지에 비 오듯 퍼부은 박격포탄의 세례를 보면
이 대부대에 배속된 화기 중대도 대폭 증강된 부대로 보인다.


그러나 월맹군은 이렇게 대군을 동원하면 한국군 일개 중대쯤
확실히 끝장을 낼 줄 알았던 것 같다.

월맹군은 월남군의 작은 중대 규모의 전술기지를  압도적인

병력의 투입으로 유린하고 부대원을 전멸시킨 경우가 자주 있었다.

전투는 무려 여섯 시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끝장 난 부대는
한국군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무려 176구의 유기 시체가 발견되었고 그들이 도주한 숲속에서
무수한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이 그랬고 월남 전 때 월맹군도 그랬지만 공격하고

퇴각할 때 동료 전사자의 사체만은 확실히 챙기고 후퇴한다.

그리고 상황이 안 좋으면 가매장이라도 하고 패주한다.

이 사실로 보아서 월맹군은 전사자는 300명은 확실히 넘었을 것이고

전상자를 합치면 절반이 넘는 500여명의 전투원이 잃는 궤멸적인
패배를 당했다고 판단된다  .

대단한 전과를 올린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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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 이춘근 대위. 당일 이임하는 중대장이었지만
후임 중대장이 적 포격에 사망했기 때문에  전투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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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 전술 기지내 한국군 보병들은 잘 싸웠다.

그날 밤 중대 최전방의 기관총 한정이 일 만발이 넘는 기관총탄을

발사했다고 하니 얼마나 치열한 전투를 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더해서 한 하사는 소수의 적병이 철조망을 뚫고 침투 한 것을 발견하고

총검 돌격으로 이들을 해치우기도 했다.


포병 대대도 이날 적 살상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을 만큼 막대한 화력을 퍼부었고 이 포병전의 실질적인

지휘관인 포병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의 활약이 컸다.

한국군의 포병 대대가 포탄을 거의 다 쏴버리고

둑코 비행장에 주둔한 미군 포병대대의 지원까지 받은 엄청난

포병 화력 지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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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뒤에 전장을 둘러보는 주월 사령관 채명신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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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그러나 중대 전술기지에서 주둔했던

M48A3전차들의 역할도 대단했었다는 것은 짐작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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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48 패턴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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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그 무렵의 메스컴이나 그 후의 출판물에서 전차들의

활약에 대한 기록은 미국측이나 한국 측에서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내가 오다가다 얻어 볼 수 있었던 둑코 전투에서의 전차에 관한

정보는 극히 단편적이었다.


전투 직전 침투한 적의 침투조가 조명지뢰를 잘못 건드려 조명이
올려 지자 맹호 중대원이 역시 경계중이던 전차에게 서치라이트
조명을 요청했다.

전차의 서치라이트의 조명으로 공격해오는 대군을 발견했고 이어서
사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투가 발발했다는 사실 정도였었다.


그리고 5량 편제의 미 전차 소대가 전투에 임할 때 통상 분할해서

운용하듯이 둑코의 미 전차 소대도 세량의 소대장반 전차와 두량의

선임하사반 전차로 분리 운용되었다는 기록도 봤었다.


그러나 나의 군 복무 중에 만난 대 선배로부터 둑코 전투에서의

전차 활약을 들을 수가 있었다.

기갑 장교였던 그 분은 월남전에서 장갑차 소대장으로 참전했었다.

그 분에게 미 전차 소대의 분전을 들려준 사람은 둑코 전투에서

소대장으로 싸웠던 듯하다. 그 분의 동기생이었던 것 같다.


그 분이 말씀 하시는 둑코 전투에서 미 전차 소대의 역할도

한국군 보병과 포병에 못지않았다.

미 전차들도 큰 활약을 했다는 말이다.


전차들은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교대로 전차에 설치된

서치라이트로서 조명을 해가며 전투내내 산탄 포격 지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한 전차가 짧게 서치조명으로 표적을 잡으면 다른 전차가
재빨리 조준을 하고 산탄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조명과 사격의 임무 교대를 했다.

피탄 지점은 먼지가 자욱이 일어나 밤에도 산탄의

피탄 지점을 알 수가 있었다 .


전차들은 철조망에 접근한 근거리의 적들을 주로 공격했다.

맹렬한 화력과 보병들은 기관총 사격에도 불구하고 
월맹군들이 외곽선의 철조망에 붙은 일이  몇번 있었다,


용감했지만 그들이 전차 서치에 걸리면 수초도 안 되어서
용서 없는 수백발의 전차포 산탄 탄막이 그들을 강타해서
무더기 죽음을 안겨주었다.

전차들은 수시로 조명과 사격의 교차 임무를 되풀이 하며
적들을 강타했다.


한 순간 적의 일개 분대가 접근에 성공하여 철조망을 타 넘고자 

철조망에 붙었는데 전차의 조명이 일순 비추더니 산탄이

발사되었다.


조명탄 아래 먼지가 폭풍처럼 이는 것이 보였고 그 뒤 적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전투가 끝난 뒤에 전장 정리를 하면서 그곳을 살펴 보니 전신에
산탄 탄흔이 무수한 월맹군 일개 분대의 사체를 발견 할 수가 있었다. 


또한 간단없이 들리는 날카롭게 째지는 듯한 90mm 전차 포성은

중대원들의 용기와 사기를 북돋우어주었다.


보병과 포병의 화력에 전차포가 가세한 엄청난 화력은

월맹 선두 부대의 궤멸을 가져왔다.

철조망까지 접근했던 적은 후퇴하지 못하고 전멸해버린 것이다.


이 사실은 대부분의 전사한 적들 옆에서 개인 화기가 발견된

사실로 입증된다.

전사자의 사체를 가져가지 못하더라도 철수 시에는 반드시 전사자의

무기만은 회수하게 되었는데 이 개인 화기가 발견 된 것은

무시무시한 화력에 노출 된 적의 공격 부대가 후퇴한 병력도 없이

전부 몰사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날이 밝고 집요하던 적도 패주하기 시작했다.

전차들은 산탄 사격을 접고 패주하는 적들에게 고폭탄을 선사했다.

드디어 완전히 날이 완전히 밝자 밤새 잘 싸운 보병들은 전술기지에서

뛰쳐나와 적들을 추적하고 전장 정리를 했다.

미군들의 전차들도 기지 밖으로 나와 보병들의 엄호와 도주하는
월맹군들에게 포격을 지속했었다.


나는 적이 가진 RPG -2- 그때는 B40 적탄통이라고 불린 적의 대전차
화기-에  왜 피격된 전차가 없는가를  선배에게 물었었다.

이 대전차 화기는 월남전 후반 한국군이 고전했던 안케 패스 작전에서

한국군에게 막심한 인명 피해를 끼친 주요 무기이다.


선배 말씀은 미군 전차들은 포탑주변에 옷이나 모래까지 넣은
더플 백을 매달아서 그 나름대로의 대 전차 무기에 대한 대비를 했고

또 그날 전황이 적탄통 사수들이 사거리[300미터]내로 접근하기가
불가능 하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었다.

전차포 포수들이 그런 공용화기 사수부터 잡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짧은 조명과 포격을 교차로 실시하고 진지 변환까지 수시로

실시하는 전차를 치열한 포격 속에서 전차를 조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울러서 그 월남 참전 선배는 적전차를 의식하고 철갑탄[AP]과 대전차

고폭탄[HEAT],그리고 적 보병이나 차량을 공격하기 위한 고폭탄[HE]을 골고루 적재하는 한국의 전차와는 달리 월남의 미군 전차는
고폭탄과 산탄 위주로만 포탄을 적재했었다는 말도 해주었다.


나는 몇 년 전에 전투가 끝나고 미 전차 소대가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 장면이 제법 크게 소개된 그 당시의 대한 뉴스를

본 바 있었다.
대한 민국 정부가 그들의 무공을 인정했다는
표시일 것이다.


전투 병과에서 군복무를 하신 분이라면 보포기[步砲機-
보병, 포병, 기갑]의 합동 작전 훈련을 많이 해보셨을 것이다 .


공격에서의 보포기가 아니라 방어에서의 보포기 합동작전의 훌륭한

성공 사례가 이 둑코 전투인데, 이에 대한 치밀한 조사와 사례 연구를

보지를 못했다.


앞으로 한반도의 전투 양상이[만약 있게 된다면]한국 전쟁 때와 같이

산악전이 될 가능성도 있지만, 기동전이 위주가 될 가능성도 크고

시가전도 많이 치루게 될것이다.


시가전에서 이 전차의 산탄의 사용도 많아 질것이다.

이라크의 미군 전차 부대는 도시에서 반군들이 자주 사용하는
RPG 저격에 대한 최적의 수단으로서 산탄을 많이 사용한다.


따라서 전차포의 산탄 운용에 한국군의 연구가 필요한 것 같고

둑코 전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 둑코 전투에서 적이 패주한 그날 아직도 긴장을 풀지 않은
둑코 기지에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애꾸눈 장군 모세 다얀이
다녀간 것은 아는 사람은 많지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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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다얀 장군 -  1973년 욤 키프르 전쟁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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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때 공무에서 잠깐 물러나 어느 주요 통신사의 종군기자로서

월남전을 취재했었다.


그는 둑코 기지를 방문했던 짧은 인상기에서 한국군이 
치열한 전투 뒤에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과 하룻밤에
18,000발의 포탄을 쏜 포병들의 활약을 평가했다.


이 숫자는 그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이끌었던 1956년의 수에즈
전쟁 때 이스라엘이 쏜 포탄보다도 많다는 추기도 달았었다.


그는 월남 방문 뒤 전운이 감도는 이스라엘에 국방장관에 임명되어

6일 전쟁의 전격전(電擊戰) 신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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