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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글터] 새 사무실 이야기 4. (완결)
5. 사실 우리는 우리가 봤던 게 착각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세우고 접근해 봤습니다. 만일 귀신이라면 저희는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동시에 목격한 사람들이니까요.일단 목격했던 인상착의는 둘이 똑 같습니다.키 172~174 정도 남자, 회색 기지 바지, 청색 반팔 카라 셔츠. 혹시 엘리베이터를 착각 했느냐.그럴리 없습니다. 옆에 있던 2호기는 그때 B2층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누가 들어가자 마자 천장 통로로 빠져 나간 게 아닐까?엘리베이터 높이가 적어도 3미터는 됩니다. 문이 닫혔다 열린 시간은 고작해야 3~4초 사이 였구요. 잠깐 문이 열렸다 닫혔던 그 시간에 그렇게 높은 천장으로 빠져 나간다는 건 불가능 합니다. 솔직히 그때 우리가 뭔가 착각했기를 바랬습니다 만,아무리 따져봐도 그럴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때 우리는 패닉에 빠졌는데 그 이유가 귀신이 너무 실체적이고 생생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귀신이면 귀신답게 소복도 좀 입어주고, 긴 머리도 좀 풀어 헤치고아니면 홀로그램처럼 흐릿하게 보인다거나 뭔가 원한에 찬 표정도 지어주고 해야 하는데그냥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구분 가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오다 제가 똘이군 에게 말했습니다. "야, 이게 무서운 게 만일 우리가 본 게 귀신이면 살아있는 사람과 귀신을 어떻게 구별하냐?" 그때 저희 건물 앞, 사람 다니는 도로에 어떤 노인이 패팅을 입고 퍼질러 앉아 빵을 먹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노인을 가르키며 말했습니다. "저 봐, 저 노인네가 사람이 아닐 수 도 있잖아? 안 그래?" 그러자 똘이군이 노인을 쳐다 봤다가 갑자기 제 어깨를 덜컥 잡습니다. "사...사장님. 그런데 저 사람 이 더운 한여름에 왜 패딩을 입고 있을까요?" 어? 진짜 그러네? 그때가 팔월 한여름 제일 더울때 였습니다. "으아.....시부럴꺼. 이게 뭐야. 혹시 넌 진짜 사람 맞냐?" 제가 너스레를 떨자 똘이군이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다 혼자 곰곰히 생각 하더니 뭔가 말 합니다. "사장님 그런데 이게 안 좋게만 생각할 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의아해져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왜 있잖아요. 가수들도 귀신보면 대박 난다 그래서 일부러 귀신보게 해 달라고 빈대잖아요.아무래도 우리 사업이 대박날 징조 아닐까요?" "그....그런가?" 휴, 다행입니다. 녀석이 이 건물 무섭다고 출근 못 하겠다고 하면 난감합니다. 기왕 말 나온 김에 우리 맞은편 회사 박 사장님이 봤다는 귀신 얘기도 해줬습니다. "야, 사실 너 놀랄까봐 말은 안 했는데 우리 맞은편 박 사장님네 있잖아. 거기 박 사장님도 자기 사무실에서 귀신 봤대.밤에 혼자 사무실에 있다 화장실 다녀 왔는데 누가 자기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더래" 제가 그렇게 말하자 똘이군이 슬쩍 겁을 먹은듯한 표정입니다. "와, 진짜 무서웠겠어요. 자기 사무실에 모르는 사람이 앉아 있으면......" "아니, 그게 저......모르는 사람은 아니라던데." "그럼 아는 사람이 있었대요?" "아니 그것도 아닌데 그게 저......광수가 자기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더래." 제가 말하면서도 이게 뭔가 우스광스러운 기분이 듭니다. "네? 누구요? 광수요?" "어? 응 광수."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런닝맨 광수요?" 말을 하는 중에도 똘이군 표정이 한심하다는 듯한 늬앙스를 풍기는게 느껴집니다. "그러게? 우...웃기지?" "하아.......런닝맨 광수요?" 그만 물어봐라 이눔 자식아. 하여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본, 혹은 똘이군과 같이 봤던 상황 중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짠지.이게 지금 현실에 맞는 일인지 혼돈에 휩싸이게 됐습니다. 아, 이야기가 한 가지 더 남았네요. 위 이야기한 시점에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입니다. 그 날 비도 오고 해서 낮에 제가 편의점에서 맥주 두캔을 사들고 사무실로 올라 갔습니다. 똘이군에게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하니 사무실에서 마시지 말고 옥상가서 마시자 더군요.옥상 정원이 있는데 제법 잘 만들어져 운치가 있다고 해 같이 올라 갔습니다.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 정자처럼 만들어 놓은 곳으로 갔습니다. 옥상에 인조 잔디로 바닥재도 되어 있고 제법 정원처럼 꾸며 놨더군요.정자 아래서 비를 피하며 맥주캔을 땃습니다. 원래 사람이 없는건지 비가와서 사람이 없는건지 옥상에 똘이군과 나, 그 옆 쪽으로 있는 흡연공간 같은 곳이 있었는데어떤 20대 처자 한명이 담배를 피고 있더군요.스키니 진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어깨즈음에 겨우 닿는 정도 길이 였습니다. 그 날 여름이어도 비가 쏟아 붓는 날이어서 제법 쌀쌀했습니다. 어쨋거나 똘이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어요.그러다 여자가 담배를 다 피우고 일어나서 가더군요.피가 퍼붓는데 뛰지도 않고 천천히 입구 문쪽으로 걸어가요. 그러더니,문으로 가지 않고 그냥 벽쪽으로 스윽 사라졌어요. ㅋㅋㅋㅋ.그런거 있잖아요.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벽안으로 스윽 들어가는거. 그걸 보자마자 똘이군은 말한마디 없이 잽싸게 문으로 먼저 튀었습니다. 뭐 저도, 놀라서 억 소리 낼 틈 없이 그냥 냅다 튀었죠. 그냥 이런 이야기 입니다. 이번 이야기 쓰면서 다른 이야기까지 섞어서 가공을 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그냥 간단히 에피소드만 들려 드리는게 나을것 같습니다. 이 얘기들 외 몇 가지 더 있는데 그 이야기까지 하자면 더 길어질 것 같아 그냥 마무리 합니다. 이 이야기들은 올 여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야기 들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저는 그 사무실을 쓰고 있습니다. 낮에는 특별히 무섭거나 그렇진 않은데, 똘이군과 저는 가능하면 어두워지기 전 사무실을 나갑니다. 아무래도 밤에는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돈 벌어서 사무실을 빨리 옮기던가, 귀신하고 계속 같이 놀던가 하겠죠 뭐.아 참, 앞 사무실 박 대표님은 사무실을 뺏습니다. 말도 하지않고 이사가서 귀신때문에 나갔는지는 모르겠네요. 어느 날 보니 사무실이 비어 있더라구요.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엘리베이터에서 귀신 본 다음날 관리실 가서 혹시 엘리베이터 cctv 볼 수 있냐고 물어 봤었습니다. 규정상 보여줄 수 없다면서 왜 그러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이걸 귀신때문이라고 어떻게 말 합니까, 그냥 좀 궁금한 사람이 지나갔다고 눙쳤죠. 안된다는 말을 듣고 돌아 서는데 관리실 안쪽에 앉아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어머, 저기 또 귀신 나왔다보다." 라고 옆자리 사람에게 작은 소리로 말하는건 똑똑히 들었습니다. 이번 에피소드는 이 정도 입니다. 아직 계속 사무실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앞으로 어떤 일들이 생길지 모르겠네요. 그런 일이 또 벌어지면 이 이야기로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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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94
Channel 1. 로키 아차 싶어서 우리는 파전을 먹다 말고 후다닥 내달렸다. 파전집 주인장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우리의 등에 대고 ‘나중에 계산 하러 와!’라고 소리치며 배웅해주었다. “씨발! 씨발! 씨발!” 리겔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먼저 선두로 치고 나섰다. 그의 터질 듯한 등을 보면서,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하기사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도 않았을 터다. 우리는 운터브룩으로 달렸다.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역한 탄 냄새가 우리의 비강으로 밀려들어왔다. “으아아아아!”“얼른 이쪽으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운터브룩의 쓰레기 산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불지옥처럼 불타고 있었다.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붉은 화마가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온 산은 열기로 잔뜩 들떠있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빈대 집은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다가 엎어지고 나자빠져버렸다. 사람들은 물 바가지를 들고 진동한동 내달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턱없이 산만했고, 불길은 사람들의 발버둥을 비웃듯이 더 많은 집들을 집어삼켰다. “아......안 돼!” 답답이는 가늘게 탄식하며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리겔은 무릎을 잡고 헉헉거렸다. 나는...... 나 자신을 잃고 믿기지 않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든 붉은빛 도는 살코기를 쏙 빼가버린 것처럼 내 머릿속은 진공상태였다. “정신들 채려!” 판의 안대를 제일 먼저 집어던져 버린 건 주설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일갈하며 정신을 차릴 것을 촉구했다. 그녀의 추상같은 호령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 잠깐이지만 자신의 행동을 그만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믄 고대로 다 타죽어! 얼렁 줄서서 양동이부터 날러!” 그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띠를 만들게 하였다. 긴 인간의 띠는 인근의 미테러 울프 스트림까지 이어졌다. 그곳의 하천에서 후미가 양동이에 물을 퍼오면, 그것이 인간 사슬을 타고 화마까지 전달되도록 한 것이었다. 그녀의 카리스마에 사람들은 최면이라도 걸린 듯이 자기 자리를 찾았고, 양동이는 빠르게 미들 울프의 하천으로 옮겨졌다. “질 먼저 입구부텀 꺼야 써! 그쪽으로 물을 퍼 날러!” 그녀의 호통에 사람들은 서투르게나마 호흡을 맞춰 물 양동이를 퍼 나르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나와 리겔이 선두에 섰다. 우리는 끊임없이 몰려오는 양동이의 물을 입구의 불구덩이에 뿌려댔다. 처음으로 날아온 조직적인 공격에 화마는 거칠게 저항했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조금씩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인자 여그를 중심으로 부채꼴로 확대하는 거여, 간격을 얼렁 넓혀!” 그녀의 지시에 사람들은 홀린 듯 진형을 부채꼴로 바꿨다. 빡빡하던 대형이 조금 헐거워졌지만, 그만큼 진화의 폭이 넓어졌다. 나와 리겔을 비롯한 운터브룩의 장정들이 화마에 맞서 싸워나갔다. 입구를 베이스캠프로 시작한 우리의 진화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갔다. “선두는 인자 다음 주자랑 교대허구, 다음 주자가 선두로 가야뎌!”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를 지배했던 공포와 혼란은, 그녀의 카리스마있는 지시에 시나브로 희미해져 갔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각자의 역할에 충실했어요. 사람들의 조직적인 연대와, 지휘를 맡은 주설씨의 넓은 시야는 화마에 적절하고 효율적으로 대응해 나갔고, 어느덧 화마와의 싸움은...... 밀리던 싸움에서 버티는 싸움으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주자 교대혀!” 그녀의 지시에 선두에서 불을 끄던 이들이 후발 주자와 교대를 하러 오고, 우리는 후발주자에게 물 양동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아마 한 번 더 선두를 교대하게 된다면, 제가 선두에 서게 될 것 같아요. 찰랑거리는 물 양동이를 받아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작업이 반복되다보니, 어께며 목이며 어느 곳 하나 얼얼하지 않은 데가 없었고, 손바닥은 피가 철철 흘러내렸지만, 저는 어금니를 꽉 깨물어 가며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거대한 자연의 재앙 앞에서 제가 해야 할 건, 그리고 할 수 있는 건...... 그것 말곤 달리 없었거든요. “허억! 허억! 허억!” 잘난 듯이 이야기 하긴 했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결국 체력이 바닥을 드러내...... 이윽고 양동이를 들어올릴 힘도 남지 않아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 안돼요. 지금도 저 불은 쓰레기 산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는데...... 지금이라도 일어서야....... “어! 이봐 괜찮아?! 그만 쉬라고. 여긴 우리가 나설테니까.”“안 돼......요...... 저는 신경.....쓰......지 말고..... 전..... 제가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저를 도우려 드는 사람들의 손을 허위허위 뿌리쳐보았지만, 그 행동으로 몸을 지탱하던 나머지 팔 힘마저 날아가 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혀버렸습니다. 몸이..... 무거워요. 분명 전 돌바닥 위에 서 있었는데. 그 돌바닥이 천천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하하, 이러다가 정말 가라앉는 게 아닌가 싶어요. 으으...... 지독하게 저는 무능한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이겨내기는커녕 그대로 가라앉아서 썩을 날만 기다리는 게 제게 어울리는 결말인 걸까요? 이대로 가라앉기는 싫어요..... 누군가가 나를 좀..... 도와줬으면..... 싶은데..... “그럼 내가 도울게,”“어.....?” 익숙한 목소리가 땅 속으로 속절없이 가라앉으려 드는 제 몸을 일으켜 세우곤, 입과 코에 무언가를 씌웠어요. 차가운 바람이 쉭하고 제 코와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저는......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토.....라?”“오랜만이야 언니?” 귀신이라도 만난 기분이었어요. 지독한 열기로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지만, 제 머리 거죽만큼은 빈데미아트릭스에 가져다 둔 것처럼 서늘했습니다. 그녀의 예쁜 얼굴을 보노라니,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고 울고 웃던, 그리고...... 그녀와 지독하게 얼굴을 붉혀야 했던 마지막 순간까지 말이죠.아주 멍청한 처사였습니다. 운터브룩이 ‘하샤신’들의 소굴임을 알면서도 이곳에 태연이 발을 들였다니...... 그들이 마음만 먹었다면 저와 로키군의 목을 가지고 볼링을 치는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어......그...... 그래. 오랜만이네.”“일단.” 그녀는 제게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건네주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긴 불 끄고 하자구.” Channel 1. 로키 모두가 반나절이 넘는 시간동안 진화에 매달린 끝에 간신히 큰 불길을 잡았다. 이제 남은 건 뭐...... 장작 수준의 잉걸불 정도? 그나마 체력이 남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절뚝이며 남은 불씨를 밟아 으스러뜨릴 동안, 그럴 체력도 없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모든 것이 잿더미로 돌아갔다. 살비듬처럼 산에 다닥다닥하게 가옥이 달라붙은 궁색한 마을이었지만, 그나마도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니 어디 부터가 집이었고, 어디까지가 나무였는지 구별도 안 가게 홀라당 다 타버렸다. 을씨년스러운 건듯바람이 날린 잿가루 들이 우리 머리위로 부스스 쏟아져 내렸다. “지옥이 따로 없...... 어? 찾았다!”“뭐슬?”“이거......” 나는 주설에게 타다 남은 ‘The Claudia’의 현판을 꺼내보였다. 길쭉한 현판은 일부 불에 그을려 있긴 했지만, 화재가 산을 집어삼키는 규모였다는 걸 생각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상태가 멀쩡한 편이다. 이래서 세콰이어 나무로 만들자고 했던 걸까? 주설의 선택이 의도치 않은 선견지명이 된 셈이었다. “......” 그녀는 내게서 받은 현판을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나는 그녀의 어께가 가늘게 들썩거린다는 것을 간파하고, 리겔을 불러 그녀를 챙기도록 했다. 이 순간만큼은 리겔도 웃음기 쫙 빼고 주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설은 리겔의 어께에 머리를 기대다가...... 녀석의 팔뚝에 머리를 파묻곤 울음을 터뜨렸다. “여!” 주설이 감정을 추스른 뒤, 현판을 챙겨 일어나려는 차에 누군가가 알은 체를 했다. 설마 싶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오랜만이야?” 토라였다. 그녀도 화재 진압에 참여했는지 그녀의 얼굴은 검댕이 잔뜩 묻어있었다. 피곤에 절은 얼굴이며, 검댕을 뒤집어쓴 입성이며......아마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그녀를 아는 어느 누구도 그 형상이 토라였다고 짐작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어색한 만남이었지만, 무시할 능력도, 그리고 그럴 처지도 아니었다. “......반갑게 맞이하기엔 영 어색한 얼굴을 만났군 그래.”“어색하긴 무슨! 평생을 동고동락한 동료를 만났는데 반응이 왜 이래?”“......” 그녀는 넉살좋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망설이다가......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나름 각오를 하고 잡았건만, 그녀의 손에는 싱거울 정도로 가볍게 느껴졌다. “오랜만이네.”“그러게.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했더니...... 술집은커녕 술병 하나도 남은게 없을 것 같네.”“......”“뭘 그렇게 시무룩해 하냐? 하긴 뭐..... 우리가 헤어질 때 얼굴을 좀 붉혔어야 말이지.”“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사실 오빠네 반응이 궁금하던 차였거든. 덕분에 우울할 때 마다 떠올릴 수 있는 좋은 기억 하나 남기게 됐어. 아이리스 언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나를 알아봤을 때 그 얼굴은 정말.....” 이야기를 더 했다간, 그녀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들 판인지라, 나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다행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도 순순히 화제전환에 따라와 주었다. “됐고, 지금은 피차 마음 편하게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나? 정 안부가 궁금하다면, 나중에 식사라도 하는 게 어때?”“그래 좋아. 조만간 찾아갈게.” Channel 2. 아이리스 “아따 저 쌔끈인 뭐시다냐?” 리겔은 멀어지는 토라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을 하다가, 주설씨에게 호되게 옆구리를 얻어맞고는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평소 같으면 재채기 하듯이 그의 불량스런 언행에 대한 지적을 한 보따리 넘게 쏟아낼 저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어요.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우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옛 동료.”“옛 동료? 그럼 쟈도...... 거시기냐?”“그렇지.”“워매...... 잘못 껄덕 거렸음 고대로 시상 하직할 뻔했소잉.” 뜻밖의 정보를 들은 리겔은 진저리 치며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습니다. 하긴 그럴 법 해요. ‘하샤신’의 악명은 대륙 어디를 막론하고 퍼질 대로 퍼져있었으니까요. “그러고 봉께, 쪼깐 궁금한 것이 있어야?”“뭐?”“여그에 니 옛날 동료가 있는거 뻔이 알 것인디, 으째서 한 번을 안 오고 그렸냐?”“사정이 복잡해. 그닥 명예롭다 할 수 없는 명예퇴직을 했거든.”“관둠서 얼굴 붉혔다 하믄 되제는...... 뭣헌다고 복잡시럽게 혀쌌냐. 주사장, 다 들었소?”“.......잉.” 주설씨는 현판을 꼭 안고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녀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게 부어있었지요. “거 듣자허니...... 식사 한담서유? 그김에 우덜 좀 소개 해 줄 수 있남유?”“하샤신을......? 그렇게 친해져서 좋을 건 없을텐데요?”“괜자나유...... 거 혹시 알어유? 벨 생각 없이 친해졌는디 난중에 쓸모가 있을란지?”“‘그들’과 친해지려면 우선 너 역시도 쓸모가 있어야 할 거다. ‘그들’은 실용주의자들이니까.” 로키군은 끙하고 기지개를 켜면서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어요. 관절을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어 본 뒤에, 그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잿더미를 툭툭 차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쓸모라...... 있는건 꿈과 야망 뿐인디?”“그리고 물건이 있잖아. 돈 될 만한.”“그거야 그럴것이지마는...... 재물은 그짝이 더 많지 않어?”“좀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정말 녀석들이 네 꿈과 야망을 보고 우리에게 접근하려고 드는 걸지도 모르겠군.”“뭔 소리여?” 주설씨는 ‘Cloudia'의 간판을 쓰레기 더미로 휙 하고 던져버리곤 로키군에게 바싹 다가갔어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지만...... 너무 빠른 태세전환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리겔은 그래도 자신이 힘들여 주운 물건이 저리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것이 씁쓸했는지, 주설씨가 던져놓은 현판을 집어들고 그 것에 잔뜩 낀 그을음을 쓱쓱 문질러 닦아내더군요. “뭐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려운 추측의 영역이지만......”“엉 그려도 말 혀.”“그냥 작은 단서만 놓고 본다면, 나와 답..... 아이리스가 이 도시에 발을 들였다는 걸, 그쪽에선 모를 리가 없거든. 게다가 아무리 중앙에서 지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사고사’로 처리할 수 있을 만큼 나와 아이리스에 대한 녀석들의 원한은 제법 크단 말이야. 그리고 충분히 그럴 능력도 있고.”“근디 뭐?”“그런 놈들이 우리를 석 달 가까이 가만히 두고 있었다는 건...... 신경 쓰지 않아서 그랬다기 보단,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거고, 굳이 말하자면....... 나와 아이리스를 지켜봤다기 보단 널 지켜봐왔단 거겠지. 주판알을 굴려가면서 말이야.”“....... 그 결과가 지금 밥 한 끼 묵자 이건가?”“작은 단서로 만든 한 편의 소설이야. 맞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닐 가능성이 더 높은 건 사실이지.”“그려두...... 흥미로운 건 사실이여. 참말이믄......” Channel 1. 로키 토라가 말했던 ‘조만간’과, 우리가 말했던 ‘조만간’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던 모양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The Cloud'에 도착했더니, 토라가 우릴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늦었네?”“누가 보면 니가 여기 주인인 줄 알겠네. 어떻게 들어왔어?”“그거야 뭐......” 토라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쭉 펴낸 클립을 보여주었다. “기본 소양 아니겠어?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토라라고 합니다. 로키오빠의 직장 동료였어요.” 그녀는 특유의 사교적인 목소리와 태도로 주설과 리겔에게 인사를 건넸다. 주객이 바뀐 것이 분명했지만, 그 둘은 얼떨떨해져 악수를 나눌 뿐 어떠한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다. 특히, 리겔의 경우에는 얻어맞은 강도로 보았을 때, 옆구리의 욱씬거림이 채 가시지 않았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토라에게 완전히 얼빠져있었다. “지는 그..... 리겔이라 허요. 아까츰에 뵌 거 같았는디 이렇게 또 만나게 됬소잉.”“아아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토라는 다시 한 번 사교성을 발휘해 리겔의 손을 맞잡았고, 그것이 그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만들었다. 그는 ‘인자 이 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씻어야겠다.’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다가 주설의 눈총에 그 덩치가 잔뜩 수그러들었다. “실례라는 건 알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분을 만나야겠단 생각에 이렇게 불쑥 찾아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래요.”“아녀유. 실력 좋다는 거 알았음 됐쥬. 근디 저희가 손님 맞을 채비를 하나두 못해서 그런디 쪼깐 씻어두 되겄어유?”“아 예, 일 보세요. 저야 뭐 기다리는 건 프로급이거든요.” 주설은 나와 답답이에게 씻을 동안 손님을 접대해줄 것을 부탁하곤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리겔은 한참동안 그녀 곁에서 서성거리다가, 나와 답답이의 시선을 받고는 미적미적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로 우리랑 식사를 하겠다는 건 아닐테고...... 용건이 뭐야?”“.......”“일단 우리 목을 따러 왔을 리는 없겠지.....? 그것도 혼자서.”“아닐 거라고 확신하는 건 무리 아닐까?” 토라가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너머의 맞은편 건물의 옥상에 그림자 두 개가 어른거렸다. “오빠랑 얼굴을 붉히게 되면 어떻게 될 지 모르는데 나 혼자 왔겠어?”“이거 고기라도 썰려다가 미간에 바람구멍이 날지도 모르겠구먼.”“그냥 보험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크로스’까지 했던 사람을 무방비로 만나느니. 화약가루 뒤집어쓰고 담배를 태우는 게 더 안전할 테니까.” 토라는 우리를 보며 싱긋 웃고는 ‘The Cloud’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진열대에 있는 도자기를 보고는 감탄을 했고, 벽에 걸려있는 비단 발을 보고는 경탄을 했다. ‘이런 귀한 걸 발로 쓴다니 직접 확인해보니 정말 거물이잖아?’라는 말을 덧붙여가면서 말이다. “어.....음..... 이런 말 할 입장은 아니지만. 다들 잘 지내지?” 답답이의 질문에, 이곳저곳을 누비던 그녀의 시선이 딱 멈췄다. 질문 하나에 분위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급변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티나지 않게 조심해가며 알기에바를 발동해두었다. 토라의 얼굴은 분위기만큼이나 어두워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잘 지내지. 일단 내가 이 지부의 장이 되었으니까. 스벤도 곧 있으면 ‘크로스’ 승단 심사를 볼 예정이고, 붙잡혔던 동료들도 잘 구해냈어. 그리고...... 그 녀석도 그럭저럭 잘 지내.” 그 말에 답답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가...... 한숨을 쉬곤 ‘다행이다.’라며 짐짓 밝은 티를 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우리의 대화는 주설씨와 리겔이 들어오면서 매듭을 짓지 못한 노끈처럼 이리저리 흩날린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들이 듣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만 한 화제도 아닌걸요. 주설씨는 ‘오랫만에 회포좀 풀었어?’라고 묻고는 얼른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젠 저와 로키군의 차례겠지요. 그녀가 우리 없는 사이에 무슨 말을 할지 몰라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그들의 대화에 합류했습니다. 다행인지, 아니면 제가 눈치 없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토라가 주설씨 듣기 거북한 이야긴 한 건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주설씨와 리겔은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제게 대해주었거든요. 하긴...... 제가 아는 토라는 그럴 위인은 아니까요. 식사동안에는 정말 다양한 대화가 오고갔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화제는 주설씨의 사업 ‘The Cloud'이었습니다. 토라는 그녀가 취급하는 상품에 대해서 물었고, 주설씨는 토라의 질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판오디콘은 어떻게 공략한건가?” 로키군의 질문에 토라는 살짝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가...... 이내 표정을 고쳐 역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의 대답을 해주었어요. “따지고 보면, 그쪽 도움이 컸어. PBRC와, 이에 반기를 드는 ‘The Cloud'의 대결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거기에 쏠려있었거든. 기사단들도 잔뜩 긴장을 하며 그쪽을 주시하느라 판오디콘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더라구. 뭐 그덕분에 판오디콘에 무혈입성 할 수 있었지. 그래도 나름 조용하게 작업을 한 거야. 괜히 이슈가 이쪽으로 쏠려버리면 곤란해지니까.”“그런거 치곤 기사단 쪽에선 반응이 없어도 너무 없던데? 왕도가 발칵 뒤집어 지고도 남을 이슈인데.”“에이 아니지. 안 그래도 PBRC 때문에 욕을 몇 바가지로 뒤집어쓰고 있는데? 일단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 시키고 은밀하게 우리 뒤를 캐려고 할걸? 하지만 우리가 거북이도 아니고, 갑옷 칭칭 두른 그 느림보들에게 잡힐 리가 없지. 모르긴 몰라도 언론사로 보도통제 지침 보내고 난리도 아니었을 거야.” 토라의 말을 듣노라니, 로키군과 리겔이 암시장을 다녀오고 나서 전했던 그 충격적인 소식이, 왜 신문의 구석에도 보이지 않는가 했던 의문에 충분히 대답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나저나 대단한 포부에요. 처음엔 백화점을 지으려고 했다는 거죠?”“뭐...... 포부는 대단허다 혀도...... 결과는 영 황이었는디유 뭘.”“그래도 대단한거죠. 스테반 로스차일드의 명함도 받았다면서요.”“에 뭐 그거야.......” 주설씨는 계면쩍은 듯 웃었지만, 토라는 그 이야기를 그만 둘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쯤되니 저도 그녀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었어요. 토라는 ‘The Cloud’와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있는 거였어요. 생각해보니 의문이 들긴 합니다. 사업가라지만 이곳에 발을 디딘지 얼마 안 되는 뜨내기에게 손을 내미는 걸까요? 이곳엔 그녀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사업을 굴리는 사업가들이 수두룩뻑쩍한데 말이에요. 신선함과 패기에 끌렸다고 하기엔, 그들은 ‘실용주의자’들입니다. 라스알게티 지부의 새로운 지도자는 무슨 생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걸까요? “솔직히 테마파크를 짓는다고 했을 때, 무릎을 쳤어요.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는 명분과, 거기에서 돈을 벌어들인다는 실리까지 죄다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요.”“뭐...... 지금은 잿더미가 됐쥬.......그려두 좋은 날은 있지 않겄어유?.”“시련 속에 있지만 절망하지 아니하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한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네요...... 비록 음지에 몸을 담고 있지만, 실은 시선을 항샹 양지에 두고 살아오고 있었어요. 하지만 양지를 지켜 볼 때면...... 음지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곤 했어요. 강자가 약자를 먹이로 삼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조롱하고, 노력은 출신 앞에 가로막히는 것을 보면서...... ‘저곳에 과연 희망은 있을까?’라고 동정해온 게 사실이에요.”“그러긴 허네유. 아무래도 한 발짝 떨어진디서 봐 왔을 테니......”“그런데 주설씨의 행보를 지켜보고, 이렇게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다 보니, ‘그래도 조금은 희망을 가져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아이구, 어질어질 허네유. 지가 뭐라고 너무 띄워 주시는거 아녀유?”“아니에요. 객관적으로 봐 왔으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전 주설씨가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바꿀 의지와 그걸 실현시킬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말해서 능력 부분은....... 약간 부족한 감이 있긴 하지만.”“......칭찬허는 거 맞쥬?”“그럼요. 그리고 전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요. 기왕이면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꿔 나가기를 응원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아까도 말씀 드렸다시피 세상이 워낙 녹록치 않으니......” 토라는 두 손에 깍지를 낀 채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습니다. 그 바람에 주설씨의 얼굴과 토라의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어요. “우리가 ‘The Cloud’에 힘이 되 줄 수 있을 거 같은데...... 어때요?” Channel 1. 로키 토라의 제안에 나 뿐만 아니라, 답답이까지 펄쩍 뛰었다. 대충 그녀가 주설에게 접근하려는 의도는 진작에 간파했지만, 지금 그 말은 ‘The Cloud'와 ’하샤신‘이 손을 잡자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그런 명분이 뭐......?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꿔나가자고? 아니 지금 여기 경력자가 떡 버티고 앉아있는데 그런 헛소리를 한다고? “물론 그냥 일방적으로 돕겠다는 건 아니에요.” 토라는 우리를 흘끗 본 뒤에 다시 시선을 주설에게로 돌렸다. “마음 같아선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런 순수한 선의가 타인들의 신뢰를 얻기에는...... ‘우리’가 그간 쌓아온 악행들이 발목을 잡고 있으니까요.”“믿음을 주기 위해 뭔가를 얻어 가겄다...... 이건가유?”“그렇죠. 주요한 목적은 전자에 있지만요.” 주설은 머리가 아파왔는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업이 좌초될 위기 순간에 찾아온 뜻밖의 제안이 그녀로 하여금 망설이게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아무리 목이 마르다 해도 누가 봐도 독이 잔뜩 들어간 성배같이 보이는 판에, 허겁지겁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결정을 쉽게 하려면 정보를 제공해야겠죠? 오늘은 정보만 제공해 드릴테니, 제가 가고 난 뒤에 찬찬이 생각해 보시길 바래요.”“좋아유. 들어 봅시다.” 토라는 주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조직의 존속을 위해 왕도를 비롯한 각 도시의 지배계층과 가져온 유착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실명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던진 말들을 조합해보면, ‘그들’의 메인 파트너는 ‘로스차일드’였다. 물론 거기까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실...... 그 말을 듣는 내내 안절부절 못했는데, 혹시나 그녀의 입에서 ‘얼마 전에 죽은 이스트민스터 수녀원의 원장수녀 있죠? 그것도 로스차일드와 우리 작품이에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물론 토라도 답답이와 원장수녀의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그러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있었으나...... 사람일은 또 모르니까. 주설은 물론이고 리겔과 답답이도 그녀의 말에 빠져 들어갔다. 나는 대부분의 정보가 나 역시 알고 있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대충 흘려들었지만, 토라는 내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는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들이 이젠 자체적인 무력을 마련하려고 하더군요.”“자체적인......무력? 대륙엔 기사단이 있잖아유? 갸덜이 그런 자기들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인디......”“그들이 가지려고 하는 무력은 기사단을 겨냥한게 아니에요. 기사단은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식적인’ 무력이라면, ‘우리’는 그들이 즐겨 사용한 음지의 수단이었죠.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로스차일드는 요즘 들어 ‘우리’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듯 해요. 그렇게 해서 뭘 얻으려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에겐 불편한 이슈인건 확실하죠.”“잠재적인 적이 될 수도 있다......”“한편이라면 최고의 파트너도, 척을 지면 최악의 상대가 될지니...... 큰일 나기 전에 자구책을 마련해야겠죠?”“좋아유...... 뭐 대충 사정은 알아 묵겄어유. 일이 잘 돼서 우덜과 파트너십을 맺었다고 쳐보자구유. 그렇게 허면, 댁덜은 우덜에게 뭘 해 줄 수 있는거에유?”“유통망......”“잉?”“그리고 신변의 안전이죠.” Channel 2. 아이리스 토라씨의 말을 들으면서 저는 몇 가지 사실에 놀랐습니다. 첫째로는 ‘하샤신’이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권력과의 유착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두 번째로는 그들만의 리그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그들이 ‘The Cloud’를 생각보다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권력의 유착은 뭐 어제 오늘 일은 아니라고들 하지만...... 솔직히 충격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설쳐대고도 여지껏 존속할 수 있는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운동장이 이만저만 기운게 아니잖아요. 토라는 양지를 바라보면서 ‘저들에게 희망이 있을까?’라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말하지만, 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몰래 웃음을 지은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런 부조리함이 그들을 존속시켜온 핵심 원동력이었던 거잖아요. ‘우리 의도대로 서로 미워하고 짓밟는 구나 멍청한 우민들’이라고 비웃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죠. 하지만 악법도 법이라고, 그러한 부조리 속에서 살아가야하는 시민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해 오고 있었어요. 그 악법에 의해 운동장이 잔뜩 기울어졌지만, 잡초는 뿌리만 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기울어졌다는 건 그닥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에 금이 간다는 것은...... 이젠 그 운동장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질서가 깨어진다면...... 아마 엄청난 혼란이 시민들의 삶의 기반 자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겠죠.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이 부조리한 도시에서 발 디디고 살고 있다는 것 밖에 없을진대, 피해를 감내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기반마저도 산산이 부서진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될까요? 그리고 그 희생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걸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라는 우리가 이곳에 온 뒤로 행적을 지켜봐왔다고 말했다지만......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The Cloud’를 지켜봐 왔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토라는 주설씨가 사업을 하면서 그 속에 담겨있는 그녀의 사상을 철저하게 간파하고 있었거든요. 그건 하루 이틀 지켜봐선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고백하자면, 나름 오랫동안 그녀를 봐왔다고 자부하는 저 조차도 그녀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제가 만약 그녀의 생각을 이해했더라면, 그녀가 ‘The Cloudia’를 지어보이겠다는 말을 했을 때 놀라지 않았을 거에요. ‘서생의 눈으로 세상의 문제를 짚어내고, 상인의 눈으로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라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그것의 일환이 바로 'The Cloudia'이었을 거에요. 그걸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한 저에 비한다면, 토라는 그녀가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생각을 술술 읽어냈어요. 그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파트너를 물색해왔을 것이고...... 이상을 바라보면서도 꽉 막힌데는 없는 그녀는 최고의 파트너라고 결정내렸겠죠.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뜨내기까지 찬찬이 지켜보는 그들의 정보력은 생각하면 할수록 등골이 서늘해졌어요. 하긴...... 그러니까, 제게 토라가 술주정을 부리면서 저에 대한 정보를 줄줄 읊어내릴 수 있었던 거겠죠.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대륙의 중심’을 자처하는 우리 라스알게티인들이 사실은...... ‘하샤신’들에게 사육당하는 새장 속의 새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들었답니다.
갑과을작성일 2019-11-06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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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공일기장] 두가지 인생 - 91
Channel 1. 로키 1623년 8월 31일 드디어 오늘이다. 오늘의 태양을 보기까지 리겔과 각종 뻘짓들을, 그리고 답답이와는 더한 뻘짓들을 해오면서, 나는 가슴속에 소용돌이를 키워오고 있었다. 바다라는 곳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태어나 하늘을 뒤덮고 땅을 찢어발기는 소용돌이처럼, 내 가슴속의 소용돌이도 시간과 인내심을 먹으며 꾸역꾸역 덩치를 키워나갔다. 소용돌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대륙을 덮치듯, 내 가슴속의 소용돌이도 오늘 아침의 햇살이 내 망막에 들어차는 순간 왈칵 넘쳐흐르려고 했다. 3년간 울지도, 날지도 않은 새가 있다. 하지만 그 새가 한번 우는 순간 천지가 흔들릴 것이고, 한번 날개를 젓는 순간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리라는 고사(故事)와 같이 내 혈관은 덥혀지다 못해 터지려고 했다. 하지만 “.......”“.......” 나와 리겔은 움직일 수 없었다. Cloud에는 나의 노도같은 격양에 감히 침묵이라는 재갈이 물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재갈을 손에 쥔 것은 알 샤인이었다. 이 망할 자식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이 잘못된 건, 나의 그릇된 판단 때문이었다. 녀석에게 ‘유품’의 존재를 이야기 한다면, 녀석의 관심이 그쪽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 나의 첫 번째 실수였다. 녀석은 내 이야기를 ‘판타지 소설’같은 허황된 이야기 정도로 밖에 여기질 않았거든. 그 뿐만 아니라, 녀석은 내 말을 자신이 틀어진 우리의 ‘약점’을 무마시키려 하는 블러핑정도로 평가절하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알기에바’를 전개한 것이 나의 두 번째 실수였다. 뭐..... 알기에바가 의욕적으로 나선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어쨋거나 그로 인해 알 샤인은 ‘유품’이 실재로 존재함을 인정하긴 했었다. 다만...... 그 이후가 문제였지. 녀석은 ‘위험인물’들인 우리가 ‘가공할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에 경악하며 더욱 ‘우리’를 감시해야겠다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수습하려 할수록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 것이다. “.......”“.......” 리겔의 눈이 시계를 향했다. 짧은 바늘은 1과 2의 사이에, 그리고 긴 바늘은 6을 넘어서 7을 향해가고 있었다. 이 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바깥의 소음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입 가진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내뱉느라 음파들이 뒤엉켜 의미를 해독하기 어려운 소음...... 하지만, 의미는 짐작하기 어려울 지언정, 그것이 싣어 나르는 감정은 어렵지 않게 해석할 수 있었다. 음파의 난상 속에는....... 증오와 경멸이 타르처럼 진득하게 배어있었다. 들려오는 소음들의 고저를 보아하니, 이곳에서 약 2Km정도 떨어져 있는 듯 하고....... 그럼 이곳에 다다르기 까지 약 삼십 분 정도 남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이 오기까지 삼십 분, 그리고 이곳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집회를 마무리 하는데 삼십 분, 그리고 이들의 수뇌부가 ‘스톤 메이슨’까지 오는데 한 시간...... 시간을 더는 지체하기 어렵게 되었다. 리겔도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녀석의 행위에 힘과 정당성을 싣어주기 위해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 둘의 행동에 알 샤인도 벌떡 일어났다. 위태하게 맞춰지던 침묵의 균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어디 가십니까?”“볼 일이 있어서.”“함께 가시죠.”“되얐소. PBRC가 들이닥치는 판국에 이곳 ‘Cloud’를 지키고 있어야제라.” 리겔의 순발력있는 답변에, 알 샤인이 머뭇거렸다. 그래, 기회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녀석은 우리의 논리에 대한 대항 논리를 펼칠 것이고, 그건 아마 우리의 발목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을 것이다. 덫에 걸려 버둥거리느라 피를 질질 흘리는건 이번 한 번이면 됐다. 덫이 헐거워 졌을 때, 빨리 발을 빼야 한다. 나와 리겔은 알 샤인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나섰다. 우리를 지켜보던 주설은 알 샤인이 모르게 우리를 향해 ‘환호’하는 감정의 사인을 보냈다. “이......이봐요! 야!” 문을 박차고 나가자마자 오후의 뙤약볕이 우리의 두피를 찍어 눌렀다. 습기 찬 공기가 우리의 어께에 내려앉았지만, 기분은 더없이 날아갈 것 같았다. 녀석의 순발력이 우리를 살렸다. 재갈에 묶인 채 그르렁 거렸던 내 가슴속의 소용돌이도, 환호하며 팔을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어이!”“응? 왜?” 알 샤인이 분하다는 얼굴로 씨근거리며 우리를 멈춰 세웠다. 어찌나 화가 나 있던지, 녀석의 주변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착각이 들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좋다. 녀석은 우리를 멈춰 세울 수 없었다. ‘공식적으로’말이지. “혹시나 허튼 짓거리 하면 그대로 쳐 넣어 버릴 거다! 알았어?”“......”“알았냐고!”“...... 해 보시던지.”“이익.....!” 녀석은 분노로 발을 쾅쾅 굴렀지만, 그래봐야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다. 그건 우리도, 그리고 녀석도 잘 알고 있으며, 서로에게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Channel 2. 아이리스 1623년 8월 31일 알 샤인씨의 왁 하는 소리와 함께 거칠게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주설씨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파안대소에요. 하지만 그 모습을 보노라니, 알 샤인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에게 나름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식으로 감정이 엇갈려버리니 말이에요. “와 진짜 리겔놈 어서 그렇게 애드립을 하는지 참.”“원래 가짜가 진짜보담 더 빛나는 법이유. 글고.”“그리고요?”“세금 안내고 허는 일이 세금 내고 허는 일 보다 몇 배는 더 빡시쥬.” 무심하게 한 말이지만, 곱씹을수록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쁜 일로 돈을 벌려면, 아무래도 생각이 더 많아야 할 테죠. 돈을 벌기위해 사람의 심리를 알아야 할 것이고,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기 위해선 법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할 테니까요. 어쩌면 이 넷중에서 제가 제일 편견과 아집에 쌓여있었던 걸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가진 배경에 주목하느라 제가 짐짓 그를 무시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멍청하다는 보장은 없었던 건데...... “이젠 어쩔 참이에요?”“뭐...... 딱히 할 일은 없쥬. 남정네 덜이 큰일 치르러 갔으니, 우덜이야 뭐...... 여그가 박살나지 않게 잘 살피는거 정도 아니겄슈?”“그것도 결국은 알 샤인씨와 그 동료들이 해줄테고요.” 주설씨는 제 말이 맞다고 말하면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습니다. 주설씨의 말이 맞아요. 리겔이 들으면 얄미운 소리나 한다며 이를 바득바득 갈 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할 일은 여기에서 꿀이나 빠는 것 정도에 불과한 걸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여기에서 죽치고 있는 것에 나름 명분이 있긴 해요. ‘알 샤인씨의 시선을 끄는 것’ 바로 그거에요. ‘필그림’들이 죄다 스톤 메이슨으로 우르르 몰려가버리면, 알 샤인씨가 우리를 의심할 테니, 저희 둘이서 그의 시선을 끌어야 하지 않겠어요? 뭐...... 그럴듯한 명분이지만, 실상은 가만히 앉아서 꿀 빠는게 현실이긴 하지만요. 어쨌거나 이번 오늘이 지나면 이곳에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길겁니다. 나름 음지에서 활동하던 PBRC는 더 이상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들의 오버그라운딩에 기사단은 좌시할 수 없겠죠. 냉전이 전면전으로 변할 겁니다. 그로 인한 혼란상에서 우리는 준비해둔 사업을 현실의 무대로 올리는 거죠. 그 사이에 ‘유품 소지자’까지 찾는다면 정말 깔끔하게 일이 마무리 될 겁니다. “구경 하러 갈래요?”“아녀라. 어제 술을 많이 묵었드만 골통이 지끈거려서....... 끝나면 불러줘유.” 주설씨는 방으로 들어갔고, 저는 혼자서 멍때리느니 구경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테라스로 나왔습니다. 와...... 봐봐요. 인간의 파도가 블라우 브룩 코앞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일자리 뺏는 기생충들은 당장 꺼져라!”“당장 꺼져라!”“로스차일드의 붉은 방패를 그들의 피로 물들여라!”“물들여라!” 지극히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증오의 메시지들이 귓전을 쩌렁쩌렁하게 울렸어요. 차라리 멀찍이서 무슨 소리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차라리 더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불타오르는 증오와 경멸의 구호에 저는 비애감이 들었습니다. 불과 몇 달전까지만 하더라도,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손을 내밀기를 주저하지 않던 시민들이, 어쩌다가 이렇게 약자에게 침을 뱉고, 모욕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단지 ‘일부’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그냥...... 변명일 뿐이에요. 일부가 난장판을 칠 동안 ‘대다수’는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냔 말입니다. 나름 새로 짜여질 판을 생각하며, 그들에 대해 ‘우매한 녀석들’이라고 비웃어주려고 했던 마음은, 생각보다 저질스러운 그들의 수준에 잔뜩 얼룩이 져버렸습니다. 같은 사람 껍데기만 쓰고 있지, 그 안에는 다족류의 유기물보다도 더 못한 저들의 저열함에 완전히 질려버렸어요. 상대도 하지 말고 잠이나 자야겠다는 주설씨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더러운 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져버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저도...... 결국은 비겁한 다수였던 거에요. 그냥 눈을 질끈 감고, 그것들이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 까지 기다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마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런 생각이었을 테죠. 다들 그러는데....... 제가 나선들 뭐가 달라지겠어요? 어차피 내일이 오기 전에 세상이 홰까닥 뒤집어 질 것이고, 점차 도태될 텐데요 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잘 알게되었네요.‘니들 세상 끝나기 전에, 실컷 지껄여라’라고 나름 통쾌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저도 주설씨 옆에서 잠이나 청할까 하고 테라스를 떠나려는 차에 “으아악! 이거 놔요!” 어떤 소리가 제 발목을 잡아끌었습니다. Channel 1. 로키 알샤인의 분통 터뜨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스톤메이슨에 도착할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둘은 꽤나 신이 나 있었다. 리겔은 자신의 순발력 있는 발언 타이밍에 대해서 거의 신화나 전설급으로 윤색했고, 나는 그에 질 새라 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을 상기시키는데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은 달궈진 쇠보다 빨리 식었고, 처음의 흥분과 통쾌함은 지겨움이라는 감정에 녹슬어갔다. 리겔은 나무위에 올라가 하릴없이 라스알게티 쪽 만을 응시했고, 나는 그 만큼이나 무의미하게 알기에바를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다섯 번 째 점검을 마칠 때 쯤, 리겔은 분통을 터뜨렸다. “지미럴 이 잡놈의 호로자석덜은 굼벵이를 삶아 처 묵었나, 뭣헌다고 여태 터럭 하나 안 비치는 거여!”“그러게......”“아야, 그 좆겉은 새끼가 우덜을 속여븐거 아니냐?”“그런가......”“아오..... 돌부처허구 야그하는게 낫제. 리액션에 야마 난 넘하고 뭘 헌다고......”“방금 뭐라고 말했냐?”“됐다...... 말을 말어야제.” 리겔이 지겨움에 몸살을 앓는 동안, 나는 녀석이 흘린 말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내가 그자식의 목숨 줄을 틀어쥔 것은, 여기에 없는 그 놈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은 상대에게 공포감을 낳았고, 그건 우리에게 틀림없는 전략적 자산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녀석이 뻔히 제 목숨 줄 틀어쥔 사람들을 속인다? 비합리적인 음모론에 가까운 망언이다. 그럴 리가 없지...... 그런데, 나는 흘려들을 가치조차 없는 말을 곱씹고 있다. 이것 역시 합리성을 잘라내는 행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녀석이 뱉은 저질스런 음모론을 왜 나는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비정한 마음’에 금이 간 뒤로 이런 증상이 생겼다. 매사에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명제를 가슴에 품고 나의 증상을 진단한다면, 이건 비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정한 마음’이 억눌러왔던 ‘감정’이라는 부분이 복구되고 있는 ‘정상화’ 수순을 밟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한쪽만 비대해진 날개로 펄럭거리던 새가, 묶여있다 풀려난 다른 쪽 날개로도 활갯짓을 하고자 하는 것이거든. 이런 심리적 작용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게 분명 이득이 될 것이 분명하다. 저질스러운 음모론에 경도된 것이 내게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돌아가 볼까?”“어딜?”“어디겠냐?” 녀석은 내 턱짓을 보자마자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분명 일리는 있었다. 알기에바를 작동할 수 있는 나라는 사람이 자리를 비운동안, 이 고장에 PBRC가 회의를 한다면...... 다 잡은 물고기를 방생하는 꼴이 될 테니까. 하지만 녀석의 말 대로 우리가 속은 것이라면, 아니 열 걸음 정도만 양보해서, 그들이 모종의 사정이 생겨서 이곳에 오지 못하게 된 것이라면...... 이곳에 죽치고 있는 것만큼이나 비효율적인 짓거리는 또 없는 셈이 아닌가. 이런 말을 해봤지만 리겔은 도통 수긍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 사실 그게 맞는 것이다. 내 주장을 정당화하기엔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한 게 사실인걸. ‘비정한 마음’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나는 아마 나 스스로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가슴 한 켠이 더없이 찝찝한 걸. 그 마음속의 구김을 반듯하게 펴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곳을 떠야만 했다. “아따 무슨 쇠심줄이라도 볶아 묵었냐? 설득을 헐라믄 제대로 허든가. 나이를 애널로 잡순 것 맹키로 왜 이리 땡깡을 부리고 지랄이여?”“뭐라 설명은 못하겠는데, 내 말 들으라고,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니까?”“같다고 같다고 허다가 일 그르치믄 어쩌케 헐라고 그러는디?”“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면 안될까?” 리겔은 내 대답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으로 한참을 얼타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은 작은 구멍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말보다도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차라리 욕이라도 한 사발 시원하게 퍼 부었다면 아웅다웅하는 중에 내 심장 속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었을 텐데......영리한 건지, 아니면 소가 뒷걸음 질 치다가 쥐를 잡는 것인지, 녀석은 도통 그래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샤신은 약쟁이들 소굴이라드만......”“소굴이라서 뭐?”“그냥 거까지 허자. 말 더 혀서 어따 쓰것어. 그냥 얼굴만 붉히는 거지 뭘.”“이익.....” 이렇게 시피보이는 상황에서 더 나섰다가는 이득은커녕, 밑도 끝도 없이 후드러까이겠다는 생각에 나는 주저앉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나 자신도 설득을 못하는 마당에 본전도 못찾을 짓 따위 해서 뭘 하겠는가. “다리 시짝 달고 태어났음, 사람이 묵직헌 맛이 있어야제. 잘 생각했...... 엥?”“......?”“옴마. 저것이 뭐시다냐?”“저기는......” 리겔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검은 연기가 뿜어지듯이 솟음치고 있었다. 무한한 창공을 향해 검은색 감자를 먹이려는지 한도 끝도 없이 솟구치는 연기의 시작점은...... 라스알게티였다. “아 뭣허냐, 얼릉 안 일어나고!”“그래. 가자.” Channel 2. 아이리스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소리가 제 발걸음을 붙잡기는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누가 도움을 청했는지 찾는건 막상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워낙 수많은 인파가 거리 곳곳에 뒤섞여 있는 터라, 그들이 내는 소리만 해도 ‘도때기 시장따윈 저기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라.’ 하는 수준이었거든요. 아마, 단 한번 들려온 비명이라면...... 몇 분정도 찾다가 ‘에이 못 찾겠다. 그냥 잠이나 자야지 뭘.’하고 쉽사리 포기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인파의 망망대해에서 찾아낸 유리병 속 편지같던 비명소리는, 오와 열을 무너트리지 않고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그 간극이 점점 좁혀지는 터라, 어느새 저는 테라스에 바싹 매달려서 사람의 파도속을 눈으로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습니다. “아아악!” 아! 드디어 찾았어요. 빽빽한 삼림속에서도 특히 더 사람의 장막이 빽빽하게 쳐진 곳이 있더군요. 미간을 찌푸려가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PBRC 내에서 린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거에요. 아이고 저런...... 군대개미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용암에 어느 운 나쁜 사람이 휘말려버린 모양입니다. 왕도에 사는 사람 치고, 토요일에 이런 혐오의 쇄설류가 흐르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인데...... 멋도 모르는 외지인이 이 고장을 지독히 좋지 않은 시점에 관광 와버린 모양이었나봐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기는 했으나, 솔직히 말해서 저 혼잡상에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저라도 이성따윈 내팽개친 저 증오의 물결에 발을 잘못 디뎠다간 뼛조각도 추릴 자신이 없었거든요. 어휴....... 정말 왕국 수비대는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저런 놈들 싹다 잡아가질 않구요...... 어? 잠깐만요. 저거....... “뭔일이유?”“저기에......그......” 언제 왔는지, 발닦고 잠이나 자야겠다던 주설씨도 소란에 테라스로 왔고, 그녀는 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한참동안 응시하더니, 린치를 당하는 당사자를 알아보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습니다. 그래요. 사업차 운터브룩을 오갔으니 몇 번 얼굴을 봤을 겁니다. 저기에서 인두껍을 뒤집어쓴 짐승들에게 당하고 있는건, 쓰레기산에서 목숨붙이며 살던, 거리의 아이들이었어요. “아니 쟤들은 저기가 어디라고......”“저 개놈의 자석덜이.....” 안타까움과 힐난이 섞인 제 말과는 별개로, 그녀의 목소리에선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 했습니다. 저도 그녀도 난간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버렸어요. “죽여! 죽여! 죽여! 죽여!” 피곤죽이 되어 의식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잔인한 어른들의 손에 들려, 마치 현수막이 펼쳐지듯이 손에서 손으로 붙들려 천천이 이동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태롭던지....... 저는 용암에 싣려 떠내려가는 바위를 보는 것 같은 착가기 들 정도였습니다. 그 아이들이 이 곳에 겁도 없이 얼쩡거린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그들은 알 샤인씨를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뻗치기를 하고 있었던거에요. 그러니까...... 저와....... 로키군 때문이었던거죠. “아......안돼.” 이성도 합리도, 동정심도, 연민감도 날려버린 순수한 악의의 물결은 죽음을 외치며 일렁였습니다. 저는 눈을 질끈 감고 싶었어요. 하지만......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눈과 말이에요. ‘그냥 부랑아 하나 죽은거 뿐인데 누가 관심이나 가지겠어?’‘그래 부랑아 하나. 어차피 콩찌개미 주워 먹어가며 살아가는 빈대같은 인생인데, 기왕 이용만 당하다 죽을 바에야 맛있는 거라도 입에 집어넣고 싶어하지 않겠어?’ 로키군의 말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던 당시에도 기분이 언짢아지는 말이었는데, 그것을 눈 앞에서 보게 될 줄은...... 안돼요. 이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시방 뭐하자는......? 아.....안돼유! 얼렁 내려와유!” 주설씨가 저를 말릴 새도 없이 저는 테라스에서 몸을 던졌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귓전에 스쳤지만, 바람이 제 머리카락을 펄럭이는 소리에 이내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어요. Channel 1. 로키 뭐라 합리적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아니 불가능하지만...... 라스알게티에 무언가 일이 벌어진 것은 분명했고, 나와 리겔은 그것이 ‘필그림’들과 관련된 것은 아니기를 빌면서 달려갔다. 라스알게티에서 스톤메이슨 까지 갈 때는 30분 정도 걸었던 것 같은데, 스톤메이슨에서 돌아오는데는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가슴 한복판이 찢어지다 못해 열려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어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어어! 정지! 정지!”“이...... 씨벌 새끼야!”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는 지금도 설명할 길이 없지만, 우리를 막아서는 경비병들을 발길질로 걷어차 버리고, 그대로 신서리티 게이트를 통과해버렸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등 뒤를 바짝 쫓았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았고 그것은 결국 멀어졌다. “하......씨. 잠깐만 쉬자.”“그래.” 왕도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육체적인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온 터라, 우리는 마차 정류장에서 잠깐 한숨을 돌렸다. 스톤메이슨에서 보일정도니 말은 다 한 셈이다마는, 검은 연기는 왕도에 도착하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져서, 쉬는 동안 신선한 산소를 마셔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입과 코를 막고 얕은 숨을 몰아쉬어야만 했다. 거리의 사람들 역시 코와 입을 막으며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어이 여보쇼. 대체 뭔 일이 있습디까?”“아이고 말도 마쇼. 블라우 브룩쪽에서 난리가 났다니까요.”“블라우 브룩이요? 대관절 무슨 일인데요?” 마차 정류장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숨 돌리고 있던 마부는 우리에게 블라우 브룩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었다. 말은 길고, 경황의 다발이 얽히고 설켰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블라우 브룩에서 PBRC와 기사단 사이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 호로넘의 새끼들이 시위 허는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닐 건디 뭐땀시 그랬습디여?”“시위에 넝마주의들이 휘말려버렸다고 하더라구요. 넝마주의들이 봉변을 당하겠다고 어떤 여자 분이 말리러 갔다가 일이 엄청나게 커진 모양이에요.”“대체 어떤 나사 빠진 년이 그런 멍충구 같은 짓을 헌다요?”“내 말이 그거에요. 세금도 안내는 부랑아 몇 죽는 게 뭔 대수라고 허 참!” 그 말에 불현 듯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답답이라도 그런 불구덩이로 몸을 던질 리는 없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면서 말이다. “혹시 블라우 브룩으로 가줄 생각 있습니까?”“블라우 브룩에요? 미쳤어요? 저도 손님이고 뭐고 챙길 것도 없이 이제 막 탈출한 참이요. 같이 손님 기다리던 동료는 마차도 수습 못하고 몸만 빠져나왔다니까요? 충돌이 일어나니까 그놈의 개자식들이 바리게이트로 쓴답시고 마차를 때려 부수는 통에...... 허 참 제가 그놈한테 대물보험 들어 놓으라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 해도 끝끝내 안 듣더니 망했다고 징징 거리고 있는 상황이요.”“마차를 바리게이트로....... 그렇게 심각합니까?”“말해 뭐합니까? 그 몇 달 전에 뉴빌리지서 철도 민영화 시위 난 거 기억하죠? 그때 이후로 저런 난장판은 처음이요.” 뜻밖의 영 좋지 못한 추억이 소환되자 가슴 한 구석이 아려왔지만, 그걸 따질 계제는 아니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좋지 않은 예감이 단순한 예감을 넘어서 현실이 되는 것 같았거든. 나와 리겔은 마부에게 가격 협상을 몇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그 남자는 물론이고, 우리의 대화에 흥미를 느끼고 다가온 다른 마부들 역시 얼마를 쥐어준다고 제시를 해도 손사래를 쳐댔다.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일은 분명 벌어졌고, 거기에 우리 식구가 휘말렸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리겔은 욕지거리를 퍼부으려다가 녀석으로선 엄청난 자제심을 발휘해 다시금 뛰어가자고 말했다. 그래 발 달고 뭐하겠는가 일단 달리는 수 밖에.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비켜! 비키라고!” 블라우 브룩에서는 하수구가 역류하는 듯 한 인간의 파도가 세차게 흘러나오는 통에, 길로 가는 건 영 무리였다. 마부들이 손사래를 친 데에는 저것도 한 몫 단단이 했을 거란 말이지. 까딱하다 사람이라도 치는 날에는 그야말로 눈탱이 지독하게 맞는 셈이 될 테니까. 마차도 힘든 판에 사람이 가는건 더더욱 무리였다.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인가. “야......리겔.”“어 왜?”“나는 가능할 텐데, 너는 어쩔지 잘 모르겠어서 말인데......”“뭔디? 일단 제시나 혀 봐라와.”“저거...... 탈 수 있겠냐?” 나는 녀석에게 건물에 위태위태하게 붙어있는 비상계단을 가리켰다. “그거 타는거야 일이겄냐?”“고소 공포증은 있냐?”“글씨.......? 딱히 없는거 같은디? 왜그냐?”“그럼...... 지붕 넘어 가보자.”“뭐?” Channel 2. 아이리스 다리를 살짝 접지르긴 했지만, 걷는데는 큰 이상이 없었어요. 이상이 있다면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장면들이 문제겠죠. 거리의 아이들은 PBRC가 자행한 잔인한 폭력에 시달리느라 온몸이 피투성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을 밀치고 아이에게 다가갔어요. 어디까지가 얼굴이고 어디까지가 목인지 구별이 쉽지 않을 정도로 곤죽이 된 아이는 간신히 깔딱 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뭐야 이년은?” 그들이 해온 것 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인 저의 모습에, 그들은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동일한 생각, 그리고 그것을 담은 동일한 행동을 하는 동질집단에서, 아니오를 외치는 행동은 잠시나마 그들의 마음에 파문이 일게 만들었겠죠. 저는 아이를 안아 들고 몸을 일으켰습니다. 근처에 거울이 없는 지라,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를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건 그닥 어렵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저를....... “왜 그래?”“이익!”“너희 눈에는 내가....... 괴물로 보이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손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한 푸른 오오라가 기름먹은 천이 타오르듯이, 제 온몸으로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의 오오라는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번 오오라는....... 찬물에 몸이 던져진 것처럼 차가웠습니다. 8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말을 거는 제 입에서는 입김이 피어올랐지요. 새로운 기분이 들었어요. 뭐든지 알 수 있고, 그 이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감이 제 가슴이 터지도록 커져갔습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동족을 갈라치고 멸시하는 것 밖에 없는 비루한 것들...... 이 더러운 피조물들을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유기물 덩어리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대답해.”“히익!” 저와 눈이 마주친 몇몇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어요. 우스운 일이죠? 이쪽은 꼴랑 한 명이잖아요. 그런데 저들은 숫자로 치면 저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한 많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여자 한 명에 겁을 먹고 있습니다. 하! 그 꼬락서니를 비웃어줄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그중의 십분지 일만 이라도 제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들의 바지가 뜨끈하게 적셔지기엔 충분할 겁니다. 한번...... 해볼까요? 그때 천사님도 말 했잖아요. 제가 옳은 일을 해도 절대 칭찬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제가 바보같은 짓을 하더라도 절대 책망치 않을 거라고요. 그럼....... 제 마음가는 대로 해도 되는거 아니에요? “대답하라고!”“으아악!” 제가 몰아세우자 제 눈앞에 있던 남자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하하 저 꼬라지 보라지요! 정말 오줌을 지려버렸잖아요? 이 더러운 새끼....... 자신을 위해 먹을 것과 입힐 것을 예비하는 ‘아버님’의 은혜에도 할 줄 아는 거라곤, 음식을 똥으로 바꾸는 것과,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을 입에 담는 것 밖에 못하는 무능한 잉여 유기물....... 지금 당장 이 유기물 덩어리를 본질에 충실한 형태로 바꾸어 주어야겠....... “으음......” 제 품안에 안겨있던 거리의 아이가, 신음소리를 내었습니다. 저는 화들짝 놀라 그들을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아이의 상태를 살폈습니다. 오 이런...... 제 서늘한 냉기에 아이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어요. 이...... 이러면 아이의 상태가 위험하게 될 텐데...... 난감했습니다. 저 더러운 유기체들을 쓸어버리자니, 아이의 몸 상태가 그것을 견뎌낼 지가 의문이에요. 그렇다고 아이를 살리자니...... 저 더러운 극우 테러종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을 멈춰야 하고 말이죠. 난감함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운터 브룩 쪽으로 양떼구름이 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문득 ‘아드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바리사이’들과 얼굴을 붉혔던 일화가 떠올랐습니다. 창녀와 세금 징수인들과 같은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겸상하는 ‘아드님’을 보면서 바리사이들이 ‘저 치는 더러운 이들과 겸상한다’며 비웃자 ‘아드님’은 그들에게 ‘백 마리의 양을 가진 양치기가, 단 한 마리의 양을 잃어버렸다면,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에다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으러 산과 들을 헤매지 않겠냐’며 그들의 위선을 역으로 폭로해버렸지요. 애초에 잘못된 전제를 두고 갈등했어요. 사람의 목숨은 저울에 올려두고 잴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죠. 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우라를 꺼버렸습니다. “.....저년 뭔가 달라졌는데?”“그러게 말이야.”“아까는 오줌 지리게 쏘아붙이던 독기가...... 갑자기 사그라든 것 같단말이지.” 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니...... 무서운 생각이 스멀스멀 떠오르려고 하네요. 하하, 뭐......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부정할 수 없겠는걸요? Channel 1. 로키 내 생각이지만, 지붕을 타고 가는 건 탁월한 판단이었다. 거리에 몰려오는 사람들을 피할 수 있는 장점도 갖추고 있었지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각도로 움직이다보니,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거든. 마부의 말마따나 블라우 브룩을 중심으로 인의 물결이 흘러나가고 있는 것이 확실해보였다. 저중에 PBRC가 섞여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부 다 PBRC일 수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건 간에, 수비대가 함부로 손을 대기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많은 수가 인종 차별적인 결사체에 가입한 마당에, 전원 체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 방식이 나의 기대치에 100퍼센트 부응을 할 수는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한 80퍼센트 정도는 만족하지만, 20퍼센트의 민원 요인이 내 마음에 걸렸다. 그것이 뭔고 하면 “으갸갸가가가가......”“......”“히익!”“입으로 뛰냐?” 리겔쪽이었지 뭐. 녀석은 지붕과 지붕을 넘나 들 때 마다, 앓는 소리를 하며 구르고 깨졌거든. 신기한건 그렇게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발을 헛디디거나, 도약 거리가 모자라서 추락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 뭐...... 초심자 치고 저정도면 잘하는 거라고 하자고. 그래도 히트맨 요원들과 비교했을 때, 기동성이 떨어지는건 사실이다. “이 미친새끼...... 나가 너여?”“애초에 고소공포증 없다고 말한건 너다.”“아니 시펄, 고소공포증이란 단어를 적용하는데는 어느정도 사회적인 합의가 된 선이란게 있는거 아니냐? 이건 뭐 선을 넘어도 한참 넘...... 하아.” 리겔은 자신의 앞에 놓여진 다음 건물을 보자 한숨을 쉬었다. 음..... 그래, 저건 좀 거리가 되는군 그래. 녀석은 절망과 희망이 반쯤 뒤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굳이 골라야 한다면....... “아 이건 못 넘어. 안댜.”“이게 지름길이야.”“그려 시펄 지름길이겄제. 5분 먼저 갈라다 한 50년 먼저 시원허게 가부리는.......” 리겔은 그 자리에 퍼질러 누워버리는 동안, 나는 우리가 있던 건물과, 반대편의 목표지점간의 거리를 어림해보았다. 그래...... 나도 어찌어찌 닿을 수는 있겠지만, 리겔같은 초심자한테는 확실히 무리겠구먼 여지껏 꽤나 운이 좋은 녀석이었는데. 그것도 여기까지인 모양...... 음. 잠깐만 “뭐혀 붕신아. 거의다 왔겄다. 그냥 여서부터는 걸어 가자.”“잠깐만 기다려봐.” 마침 운이 좋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공동으로 주거하는 건축물인지, 이곳 지붕은 도에 지나치다 싶을정도로 굴뚝이 다닥다닥 세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시험 삼아, 그나마 튼튼해 보이는 굴뚝 두 개에 알기에바를 로프형태로 전개했다. 장력도......음 이만하면 나쁘지 않겠는데. “뭐허냐. 얼릉 안내려가고.”“나 한번 믿어볼래?”“믿어? 뭐슬? 어? 어? 야 이 새꺄 뭐 허는거여 지금?” 나는 리겔을 붙잡아 로프에 단단이 고정시켰다. 녀석은 ‘설마 이새끼가.’라는 얼굴로 바둥거렸지만, 긴 시간 오버페이스를 한 그의 손은 아기 손 보다도 여렸다. “쫄지말고 그대로 달려야 된다. 알았지? 쫄면 감속이 돼서 힘들어.”“뭣헐라고! 아 잠깐 님! 님! 이건 아니제. 나 디진다고......이...... 씨벌새꺄!”“타이밍 맞춰서 잘 뛰고. 그럼 반대편에서 보자.”“야! 야! 고만..... 고만 해 새꺄! 이 개자석아! ......아이고 로선생님! 지발 살려주쇼. 야이 씨벌럼아. 개 씨벌새꺄. 나가 죽어도 니는 같이 델고 죽.......으아아아아!” 손을 놓자마자, 알기에바는 엄청난 인장력으로 원래 형태로 돌아갔고, 거기서 축적된 운동에너지를 그대로 이어받은 리겔은 그대로 지붕 끝까지 내달렸다. “이 씨펄 호로 새끼야아아아아아악!” Channel 2. 아이리스 나름 확신을 가지고 아우라를 꺼트리긴 했지만, 문제는 이세상 일이란게 동화책의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어요. 그들을 유기물 덩어리로 만들지 않겠다는 내 각오를, 나를 둘러싼 저 악의에 찬 사람들에게는 호의로 느끼기 보다는 대항을 포기한 것으로, 즉...... 포식자에서 피식자로 입장이 달라졌다는걸 의미하게 되는 거거든요. 단순히 말하자면, 제 생사여부를 저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손에 스스로 내맡겨버렸다는 것입니다. 저와 가까이에 있었던 이들은 제게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고 수근거렸지만, 다행이도 저와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은 아직까진 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소리를 죽여 가며 침을 삼킨 뒤에, 아이를 안아들어 그곳을 떠나려 했습니다. “비켜.” 서릿발 같은 차가움을 가장한 제 말에, 앞사람들은 움찔하며 자리를 터주었어요. 변화를 감지했지만, 제가 여지껏 보여준 모습이 잊혀 지지 않아. 인지부조화가 온 모양이었나 봅니다. 운이 좋다면, 이대로 모두를 속이고서 안전한 곳까지 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은 여전히 수군거렸고, 그 목소리가, 제 뒷목을 땅기게 만들었지만, 절대 티를 내선 안 될 노릇입니다. 제가 그들을 해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니까요. 한발자국 두발자국 걸음을 걸으면서 그들을 쏘아보았고, 사람들은 저를 동심원처럼 둘러싸긴 했지만, 다가갈 엄두도 못 내고 있었습니다. 거리를 어림해 보니 약 150걸음..... 그 중에서 열 걸음 까지만 남겨두더라도 저는...... “뭐 하는 거야? 왜 다들 멍청하게 얼 타고 있어?” 아..... 제발 닥쳐 좀. 미처 모든 상황을 지켜보지 못한 사람 하나가, 이 광경에 의문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열통이 터진 것인지, 사람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떨리는 가슴을 숨기고 그를 뚫어질 듯 쏘아보았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제 눈길이 그리고 그 속에 담은 의미가 그에게 닿지 못한 모양이에요. 뜻밖의 상황에 등 뒤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연극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거든요. 그가 퍼뜨리는 의문과 분노의 감정이 사람들을 잠식하기 전에 저는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하지만 동시에...... ‘너희는 한낱 유기물 덩어리에 불과하며,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희들을 태초의 모습으로 돌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라는 메시지를 연기해야 해요. 걸음걸이를 도도하게 하느라, 속도는 여전히 더딘 반면, 저 사람이 터뜨리는 불리한 정보와 감정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어요.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이라면 공격성의 기류가 물 컵을 서서히 채워갔지만, 아직 컵 밖으로 흘러넘치지는 않고 있다는 거에요. 더는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양의 물이 컵을 채워도, 표면의 장력 때문에 의외로 쉽사리 넘치지 않는 것처럼, 저는 공격성의 물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왜 다들 저 여자한테 쫄아 있는 거냐고! 왜!” 저 망할 자식이 증오의 잔에 또다시 물방울을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귀를 닫아야 해요. 저 말에 저까지도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들켜버린다면 집어 삼켜지는 건 의외로 순식간일 겁니다. 귀는 막고, 눈은 치켜뜨고, 도도한 걸음걸이를 유지하는 것,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다행이..... 아직까지는...... “깡!” 그의 손을 떠나온 깡통이, 제 머리를 정통으로 맞혔습니다. 머리를 맞고 튕겨진 깡통은 바닥을 구르며 금속성의 소리를 내었고, 그것은 메아리가 되어 흩어졌어요. 그리고 그 메아리는 증오의 잔을 더욱 더 채워갔고...... 소금쟁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다시 한 번 물 위로 발을 내딛었...... “저봐! 저년이 저걸 맞고도 가만이 있잖아! 쫄거 없다고!”“.......하 씨발.”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의 손이 저를 덮쳤습니다. 그들은 제 머리채를 잡고, 옷을 잡아당기며, 발길질을 쏟아 부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제 온몸을 바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크윽......”“니가 뭐가 된다고 우리한테! 씨발련이...... 죽어! 죽으라고!”“큭......” 솔직히 말해 지금의 심경을 말로 하자면, 그냥 아이가 죽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아우라를 다시 전개해야 하나, 그래서 저 유기물 덩어리들을 정말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조각조각 내버려야 하냐는 생각밖에 안들었어요. 하지만 아이를 끌어안다보니, 아이의 온기가 절절하게 제게 퍼져갔고, 아이의 숨소리가 제 귀에 작게나마 전해졌으며, 숨결이 제 볼을 타고 흘러갔습니다. 제가 제 몸하나 지키기 위해 아우라를 펼친다면, 이 작은 생명은 손짓하나 못하고 그대로 꺼져갈 판이었습니다. 저에 대한 그들의 조롱과 폭력으로 온몸이 다져지는 것 같았습니다. 어께며 팔뚝이며 등골이며 허벅지며 제가 느낄 수 있는 모든 부분의 감각이 비명을 질렀고, 이에서는 짠 맛을 내는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습니다. 아이의 이마에 저로부터 흘러나온 붉은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졌습니다. “크흑! 컥!”“나가 디지라고 이 씨팔ㄹ...... 으아악!" 폭력속에서 때아닌 산들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저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산들바람은, 엄청난 폭풍으로 변해 제 주변의 모든 것들을 쓸어버렸어요. 얻어맞을 때에 비해서는 빈도와 강도가 훨씬 약해졌지만, 바람에 의해 날아가는 사람들이 곱게 날아가지 못하고, 저를 치며 날아가는 바람에, 저는 이 바람이 끝나길 기다리며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대관절...... 무슨 일이 벌어지는거죠? 바람이 멎고, 더 이상 누군가의 발길질이 닿지 않는다고 생각할 무렵, 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봤어요. 넘어지고 깨져 신음하는 사람들 한가운데에 주설씨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등증 끄즈 느그므 쓰블 스끄드르!” 그녀의 손에는 ‘쉐다르’가 들려져 있었고, 시위를 문 그녀는 사람들을 쏘아보며 엄포를 놓고 있었어요. 뭉개져셔 알아듣기 어려운 발음이었지만...... 의미를 전달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이 슬금슬금 물러서려는 무렵...... “당신들을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법률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당장 끌고 가!” 알 샤인씨를 위시한 기사단원들이 완전무장을 갖추고, PBRC들을 체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하아...... 드디어 일이 끝나는가 봅......니...... “아이리스씨! 정신차려유! 오.....오매! 피! 어디 의사 없ㅅ......” 쉐다르의 시위를 놓고 저를 향해 달려오는 주설씨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끼며 제 의식은 어두운 구멍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갑과을작성일 2019-09-23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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