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가지 인생 - 80

갑과을 작성일 19.02.02 21:2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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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1. 로키

 

리겔의 도발은 매우 지저분하고 저열했지만...... 그런 만큼 효과는 확실했다. 얼굴에 가래침을 뒤집어쓴 파시스트 놈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는지 몇 초간은 멍하니 얼을 타다가, 모든 상황판단이 끝난 뒤에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는 우리에게 욕설을 쏟아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 모든건, 우리가 정말로 원하던 바였다. 도발, 공격, 그리고 피해자 코스프레...... 주설이 계획했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했던 조건들 대부분이 충족되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아니 애초에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변수 하나가 툭 튀어나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그 얄미운 검은 말이 무엇인고 하면......

 

“이익!”

 

저놈의 주먹이 너무 느리다는 것이었다. 아니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합의가 될 정도로 느리다고 한다면 모르는 척 하고 맞아주기라도 하겠는데, 이건 뭐 달팽이도 한 수 접어줘야 할 정도로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이런 주먹에 맞기라도 한다면...... 크로스라는 스펙이 엉엉 울 뿐 만 아니라, 맞는 걸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거 완전히 자해 공갈단 아니야?’라는 뜻하지 않은 오해를 할 가능성까지 생길 것 같았다.

 

“아따, 뭔 주먹이 저렇게 느리요? 그래가지고 어디 라스알하게 넘덜 멱살이라도 잡겄소?”

 

이 대목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주설의 판단력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녀석이 우기다시피 해서 내게 리겔을 붙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저 느려터진 주먹을 어떤 식으로 맞아야 하는가.’를 두고 소모적인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리겔은 같은 고민을 두고도 녀석다운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아냈다. 녀석은 저 느려터진 파시스트 뿐 만 아니라, 그와 생각을 함께하던 다른 극우집단에게도 훌륭하게 도발을 해댔다. 녀석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들의 면전에 대고 가운뎃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대적하는 자가 너무 허접스럽다면, 적을 늘리면 된다.’는 것이 그의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그의 어그로 덕분에, 우리는 대략 스무명 가까운 이들에게 완전히 둘러 쌓였다. 그래 이쯤이면 우리가 몇 대 두들겨 팬다고 하더라도 정당방위였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겨먹을 생각은 말고, 적당히 뚜드러 맞어...... 우억!”

 

리겔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다가, PBRC 회원의 주먹에 얼굴을 얻어맞고는 비명을 질렀다. 이내 녀석에게 뭇매가 날아들었다. 나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맥락의 공격에 녀석이 얻어맞은 것이 황당해서 그를 쳐다보았지만, 녀석은 얻어맞는 와중에 내게 입을 뻐끔거렸다. 입모양을 보니 ‘연기야 연기’라는 것 같았다.

 

이제 나도 함께 얻어맞을 분위기이기도 하여, 나는 나를 둘러싼 PBRC 회원들을 살펴봤다. 일단 간이나 보자는 생각으로 그들의 공격을 받아내 보았지만...... 허 참...... 내가 생각하는 ‘공격’이라는 개념의 허들이 너무 높았던 걸까? 얻어맞기에는 녀석들의 공격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없었다. 공격하는 패턴들이 하품 나도록 단순했을 뿐 만 아니라, 그 뻔한 패턴마저도 그들의 어께는 ‘나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때릴 거야.’라고 광고하듯이 튀어나와 있었다. 음..... 이거 리겔에게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드는구먼, 나름 연기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란 놈은 액션 연기 쪽은 영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는 동안, 리겔을 성실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두들겨 맞고 있었다. 거기에 아예 컨셉까지 마련한 모양이었는지 연신 그들을 향해 꽥꽥 소리를 질러댔다.

 

“절대로 말 못헌다!”

“뭐?”

“절대로 안 분다고!”

“묻지도 않았어 이 새끼야!”

 

묻지도 않았는데 연신 말 못한다고 소리를 질러대니, 그들도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개중에 한 명이 조금은 장단을 맞춰주려고 했는지 그에게 의사소통을 시도했다...... 이렇게 말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뭘 안 분다고 하는 거냐?”

“그럼 하나만 물어봐봐.”

“그래 뭘 물어볼까?”

“절대로 말 못헌다!”

“이 새끼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개그만화에서 봤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에 소름을 느끼며 나는 녀석에게 ‘이 무슨 개같은 연기야?’라고 퉁을 놓았다. 그게...... 실수 였던 걸까? 녀석은 얻어맞다말고 벌떡 일어서더니, 자신을 두들겨 패던 PBRC의 발을 움켜잡았다. 그는 자신의 발을 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다가...... 리겔의 주먹에 힘이 싣리자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리겔은 뜻밖의 반전에 사람들이 움찔하는 사이에 내게 다가오더니, 내 배를 강하게 후려쳤다.

 

“야이 씨..... 난 왜 때리냐?”

“너만 멋지게 보이는게 꼴뵈기 싫어서 그런디?”

“그럼 너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대본 안 읽냐? 니 처럼 해불믄 연극이 되겄냐고.” 

“그래 그건 인정하고...... 어쨌거나 너 이제 한 대 남은 거 알지?”

“아닌디? 두 대 남았는디?”

“뭐라는 거야? 아까 니 밟던 놈 발 으스러뜨렸잖아.”

“고것은 때린 게 아니라, 씨게 움켜잡은 것이여.”

“이러니...... 양아치 소리나 듣고 있지.”

“뭐래냐? 사람 목숨으로 갔다가 장사나 허는 것이......”

“손들어! 블라우 브룩 경시청이다!”

 

우리의 티격거림이 더 치졸해지기 전에 수비대가 우리가 있던 현장을 덮쳤고, 그들은 PBRC의 참가자들을 체포했다. 리겔은 그 특유의 인상 탓에 처음에는 그들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지만, 시기적절하게 주설이 나선 덕분에 체포되는 것은 면했다. 수비대원은 그의 손에 들린 수갑을 풀어주며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리겔은 괜찮다면서 잠깐 자신을 일으켜줄 수 있냐고 물었다.

 

리겔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에게 ‘무엇을 물어주랴?’라고 했던 PBRC 참가자에게 다가가, 녀석의 뺨을 두 번 후려갈겼다.

 

“요거로 쌤쌤 치자잉?”

 

 

 

 

 

 

 

Channel 2. 아이리스

 

로키군과 리겔의 연기, 그리고 주설씨가 섭외해왔던 라스알하게계 라스알게티 시민의 신고 덕분에 시기적절하게 수비대들이 블라우 브룩으로 들이닥쳤고, PBRC 회원들의 상당수가 그들의 손에 체포되었습니다.

 

“신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블라우 브룩 경시청의 알 샤인 형사라고 합니다. 여기 대표분이......”

 

그는 리겔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리겔은 턱으로 주설씨를 가리켰고, 주설씨가 그의 손을 맞잡았어요. 

 

“반가워유. 지는 The Cloud의 주설이라고 헙니다.”

 

주설씨는 그의 손을 잡으며 득의연한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 샤인 형사는...... 주설씨가 ‘빨대’로 활용하기엔 적절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거든요. 수비대라는 직책도 직책이지만...... 이름을 미루어 보아 프로하기온계 일 테지요. 그렇다면 그 역시도 남의집살이를 하는 처지이니 만큼...... ‘필그림’들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일 게 분명했습니다.

 

“The Cloud요?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무역회사에유. 대륙 여그저그서 물건 띠어다가 팔고 그러쥬.”

“아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시국이 참 어렵겠습니다. 최근에 라스알게티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많이 힘드실 텐데. 힘내십쇼. 반란이 진압되면, 저런 극우 단체야 자연스럽게 사라지겠죠 뭐.”

“덕담 감사합니다.”

“하하, 객식구들끼리 서로 응원하며 사는 거죠 뭘. 그럼 앞으로도 어려운 일 있으면, 블라우 브룩 경시청에서 저를 찾아주십시오.”

 

그녀에겐 덕담이 될 수 없는 덕담을 남기곤, 그는 PBRC 회원을 압송하는 다른 수비대원들과 함께 블라우 브룩을 떠났습니다.

 

“스타일 괜찮은데?”

“저런 범생이 같은 것이 괜찮다고?”

 

리겔이 주설씨의 말에 퉁을 놓자, 그녀는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라는 얼굴로 손가락을 저었습니다.

 

“얼굴만 봤구나? 팔뚝에 핏줄 돋은 거 못 봤어? 완전 섹시하던데.”

 

주설씨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이 저를 바라봤고, 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 반응에 리겔 뿐 만 아니라 로키군의 얼굴도 데쳐지는 시금치 마냥 팍 구겨졌어요.

 

“여자들이란.”

“어쨌거나, 잘해줘서 나쁠 건 없는 사람이여. 잘만 구슬리면...... 우리 쪽에 좋은 빨대가 되 줄 게 분명하잖어?”

“어쨌건, 잘해줘서 나쁠 건 없겄제. 잘만 구슬리믄...... 아야! 왜 때리는거여?”

“넌 그런 게 재수가 없어.”

 

리겔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주설씨의 말을 따라하다가 그녀에게 등짝을 얻어맞고는 눈물이 핑 돌아 그녀에게 소리쳤지만, 주설씨는 냉정하게 그의 말을 딱 잘라버렸습니다.

 

“로키군은 저런거 따라하지 마요.”

“왜? 재미있지 않나?”

“저게요? 전혀요!”

 

제 반응이 조금 신경질적이었는지 로키군은 저를 뜨악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렇다고 사과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늘 잘해줄 수는 없잖아요. 안되는건 안된다고 딱 잘라서 말을 해줘야지......

 

“근디 주사장......”

“아 예. 신고해주셔서 고마워유.”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운터브룩의 장로들이 그녀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건넸고, 주설씨는 그들에게 고개숙여 감사의 말로 되돌려주었습니다.

 

“고맙기는 뭘...... 동포덜 간에 그런것도 못 하면 안되제. 그나저나 쪼깐 걱정이구먼, 저것들이 하루는 저렇게 잡혀가도 담날이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활개를 쳐버리더라고.”

“걱정 말어유. 현장에서 잡혔으니께 나올라믄 한참 걸리겄쥬.”

“쟈덜이 고렇게 만만한 넘덜이 아녀...... 우덜이라고 쟈덜이 패악질 부릴 때 신고 안혀봤겄는가. 어휴...... 본국에서는 무슨 부귀를 누린다구 반기를 들어가지구......”

 

장로들의 한숨에....... 그녀는 울컥해서 뭐라고 쏘아붙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그도 그럴 밖에요. 처한 입장이 다르니, 의견이 다른 것은 당연할 거에요. 그녀에게 라스알게티는 극복해야할 대상이겠지만, 운터브룩의 라스알하게 인들에게 있어서 라스알게티는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 되어버린걸요. 입장은 달라도, 동포는 동포니까라고 주설씨는 스스로에게 되네었을 테죠.

 

“그나저나 전번에 운터브룩을 가보니께 다들 팍팍하게 살던디. 워째유 사는 것이?”

“죽지 못혀서 사는 거지 뭐....... 반란 전에야 다덜 어떻게든 취직이라두 혀서 입에 풀칠이라도 혔다마는, 인자는 엔간한 아덜은 죄다 짤렸다지 아마?”

“.......”

“그래두 이 어려운 시국에 주사장이라두 일어나니께 다행이구먼. 여그가 텃세가 심허긴 혀두, 어느정도 기회는 있는 곳이니께...... 맘만 독하게 묵으면 얼마든지 성공할거유.”

“음...... 그러믄 말이어유. 지랑 일 한 번 혀보겄어유?”

“일자리 맹글어 주겄다는데 마다할 멍청이가 있겄는가? 우덜두 주사장헌티 힘 싣어줄라구 여그 왔으니께,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허면 말허슈.”

“잉 감사혀유. 당간에 사업 아이템 하나 뽑으면 말씀 드릴라니까. 꼭 좀 도와주셔유.”

 

 

 

 

 

 

 

Channel 1. 로키

 

1624년 7월 25일

 

나와 리겔의 활약 덕분에 PBRC의 상당수는 체포됐고, 그중에서 리더격을 차지하는 몇몇은 구속까지 되었다고 한다. 일전에 우리와 면식을 텄던 알 샤인이라는 자는 우리에게 이 소식을 전하면서 ‘최장 6개월 동안은 안심하셔도 됩니다.’라고 말했다.

 

요 며칠사이 나와 답답이는 The Cloud를 지키고, 주설과 리겔이 운터브룩을 바쁘게 오가는 일상이 반복됐다. 나와 답답이는 아무래도 그곳에 다시 발걸음을 하기엔 불편하지...... 사정을 들은 주설은 어차피 PBRC놈들도 없겠다. 일은 자신과 리겔이 알아서 하겠노라고 했다. 그녀는 운터브룩에 사는 라스알하게계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업에 대한 구상을 나누었다. The Cloud가 있는데 무슨 사업 구상이냐고? 저번 장로와의 대화를 통해 그녀는 느끼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역만리 타지에서 부평초처럼 떠도는 자신의 동포들을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하더라도 새로운 사업을 하나 더 시작하기로 했다.

 

그녀는 라스알하게계 주민들이 고통을 받는 데는, 그들이 이 도시에서 철저하게 ‘을’의 입장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자신의 사업체를 가지지 못했고, 교육 수준까지 낮아 블루칼라의 일 외에는 딱히 취직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업무 특성상...... 종사자가 소모품 취급을 받게 마련이지. 그녀는 이번 사업을 통해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숙고의 결과, 그녀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정했다. 그건 백화점 사업이었다. 클라허 타히에서 보았던 사업 형태인데, 큰 건물에 여러 개의 작은 점포들을 입점 시켜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시장과 비슷하긴 하지만...... 인테리어가 화려하고, 이른바 ‘검증된’ 업체들을 입점시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특히, 많은 가게들을 입점하기 위해 건물의 형태는 이전의 것과는 달리 크고 높았다. 클라허 타히에서는 이런 마천루가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그렇다면, 운터브룩에도 자부심이 될 만한 마천루를 만든다면...... 그들도 분명 점점 더 나은 처우를 향해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업 아이템을 정했지만 문제가 없는건 아니다...... 바로 돈이지. 그녀가 프로하기온에 적재해 놓은 도자기와 비단 등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비단쪼가리와 도자기 몇 개로는 백화점을 짓는 건 꿈도 못꾸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수로 백화점을 지을 거냐고? 그래서 지금 우리는......

 

“다들 잘 챙겨 입었냐?”

“오매! 오매! 오매..... 징허게 찡기는디? 요러게 입는게 맞는 것이냐?”

 

리겔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로 내게 자신의 옷을 선보였다. 그 꼬락서니를 보니 허파에 들숨과 날숨이 불규칙하게 돌았다. 옷을 빌릴 때 세탁소 주인이 난감해 하면서 ‘이게 제일 큰 사이즈인데.....’라고 하긴 했지만, 그걸로도 녀석의 거대한 육신을 틀어막기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었다. 리겔은 자신의 사타구니쪽이 불편한지, 엉거주춤하게 그것을 움켜잡고 있었고, 혹여나 찢어질까 숨 쉬는 것 마저도 조심스러워 했다.

 

“맞기는 한데......”

“오매 씨벌...... 아주 그냥 죽여라 그냥.”

“다 입었어...... 큭! 푸하핫! 저게 뭐야!”

 

문을 열고 들어온 답답이는 리겔의 모습에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리겔은 답답이의 그 작태에 호통을 치려고 했지만, 숨을 마음껏 들이쉬지도 못하는 상황에, 결국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왜 이리 시끄러워유.”

“아따 주사장, 요거는 좀 아닌거 같은디, 큰 거 더 없소?”

“음....... 확실히 이대로 입고가믄....... 비웃음밖에 안 살 것 같네. 일단 벗어봐봐. 니는 안되겄어.”

“뭐여? 그럼 나는 안가도 되는거여?”

“그럴 리가 있나...... 옷 맞춰 가야제.”

 

주설의 말에 리겔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답답이는 주설의 말에 ‘응? 진짜로요?’라는 얼구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 리겔이 그녀에게 ‘니는 헌 옷 핏이 맞아서 참 좋겄다?’라며 깨알같이 놀려댄 것은 덤이었다.

 

“좋아할 거 없어...... 다음 달 니 월급에서 깔건디 뭐.”

“......”

 

 

 

 

 

 

 

Channel 2. 아이리스

 

1624년 7월 25일

 

지금 저희는...... 모처럼만에 클라허 타히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클라허 타히가 다 니꺼냐?’ 라고 악의적인 질문이 날아올 수가 있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할게요. 저희는 지금 클라허 타히에 소재하고 있는 로스차일드 타워 앞에 와 있습니다.

 

라스알게티, 아니 그걸 넘어서 대륙 전체의 부가 모여드는 곳이니 만큼, 이곳은 다시와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높은 마천루들이 즐비해있었어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로스차일드 타워가 있는 테헤란 스트리트에는 지금 축제 분위기이에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은 로스차일드가에서 스폰서를 맡은 파티가 열린다고 합니다. 대륙 최고의 금권가가 스폰서를 맺은 덕분에, 이곳에는 그동안 신문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각종 유력인사들이 대거 모여들었어요. 저기 봐봐요. 라스알게티 시장에, 상원의장들과 같은 정치계 거물들이에요,

 

“엄청난데요?”

“.......”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로키군.”

“지금 엄청나게 놀라는 중이다.”

 

이 목석같은 사람도 놀라움을 느낀다는 것에...... 놀랍다기 보다는 뼈가 저리게 수긍이 되는게 참 아이러니하네요.

 

“왐마, 저 가시내 보이냐? 낯짝이 제법 반반 허구마잉.”

“음..... 저건 그냥 여자가 아니라, 크노스페잖아. 프랭크먼 크노스페.”

“어..... 음..... 그니까. 그 뭐냐.....”

“백야행에서 주인공 역할을 했었지.”

“어 그래...... 그러니까 지금 저게 그 양반이라 이거여?”

 

리겔도 놀라워했지만, 그걸 설명하는 제 입장에서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에요. 세상에 프랭크먼 크노스페를 여기서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정신 바짝 채려유. 여그서 쫄리지 말라구 옷도 까리하게 맞춘거니께.”

 

주설씨는 우리에게 단도리를 단단히 하고 앞장서서 레드카펫을 밟았습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습니다. 제가 이곳에 산지 23년이 다 되가는데 이런 곳에 오리라고는 상상조차도 못했어요. 그리고 놀랍고 어리둥절한 한편으론..... 간절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사업상이라지만...... 이런 곳은 저랑 정말 안 어울린다구요.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사업을 위한 것이었어요. 백화점 사업을 하기에는 우리 ‘삼민상단’은 자본도, 정치적인 뒷배도 모두 부족하니까요. 프로하기온에서 보았지만, 하나의 사업을 일으키긴 위해선, 자본도 자본이고, 공무원도 구워삶아야 하며, 유력인사와 얼굴을 트는게 중요해요. 프로하기온에서야 주설씨의 입담으로 어찌어찌 해냈지만, 지금 이곳 왕도는...... 개인의 기량만으로 커버가 될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때마침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모이게 되었어요. 그걸 주설씨가 놓칠 리가 없잖아요?

 

어떻게 기회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설씨는 이곳 파티장에 초대를 받게 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까지 이런 억지춘향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하아..... 걱정이에요. 주설씨는 꿀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왕도에서 내노라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에서 아무런 배경도 없는 저희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신분증을 제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입구에서는 수비대원들이 신분증을 검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행사가 행사이니만큼, 왕도에서도 신경을 써준 모양이에요. 아, 저기 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입니다. 알 샤인씨에요. 아마 이곳의 행사를 지원해주기 위해서 파견을 온 모양입니다. 범죄자를 잡는 형사가 이곳에서 경비를 선다는 것이 어색하긴 하지만, 그는 그닥 개의치 않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신분증을 내밀었고, 형식적인 절차가 끝난 뒤에 우리를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주설씨는 그에게 고맙다며 말했지만...... 알 샤인씨는 머뭇거리며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어요.

 

이제..... 진짜 시작입니다.

 

 

 

 

 

 

 

Channel 1. 로키

 

이곳 파티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이솝 이야기의 ‘까마귀의 깃털’이라는 이야기 한 토막을 떠올렸었다.

 

평소에 공작의 화려한 깃털을 동경했던 까마귀는 어느 날 숲에 떨어진 공작의 깃털을 발견하고 자신의 몸에 꽂아보았다. 그 모습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까마귀는 숲을 뒤져 다른 새들의 깃털까지 자신의 몸에 꽂아 화려하게 자신을 꾸몄다. 그 모습에 도취된 까마귀는 다른 새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자신의 깃털을 자랑했지만, 다른 새들은 ‘이 깃털은 내 것이잖아!’ 라면서 까마귀에 꽂혀있던 깃털들을 모조리 뽑아갔고...... 결국 까마귀는 꼴사나운 모습으로 그 무리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내용이다.

 

지금 우리 ‘필그림’들의 행태가, 까마귀의 그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지독하게 멸시받고 쫓겨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파티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든 걱정이었다.

 

우리는 까마귀들이었을지언정, 파티장의 사람들은 새들이 아니었다. 나의 이런 걱정들이 뒤통수가 간질간질해지도록, 그들은 우리의 의복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이디, 한 곡 추시겠습니까?”

“아하하! 감사합니다만...... 제가 좀......”

 

답답이는 뭇 남자들에게 둘러쌓여 춤을 출 것을 제안 받았고, 답답이는 그것들을 거절하느라 무던히 진땀을 빼야만 했다. 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탁자의 샴페인 잔을 비웠다. 주설 또한 내 옆에서 샴페인을 마셨다.

 

“어허 이거 참. 한 명 씩들 오시오 한 명 씩들!”

 

리겔은 여러 여자들에게 둘러쌓인 채 호탕하게 웃어젖히고 있었다. 여리여리한 체구의 왕도 남자들과는 달리, 우락부락한 그의 몸은 여러 여자들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그의 팔뚝을 만져보며 탄성을 질렀고, 기회가 닿으면 그의 가슴팍에 자신의 얼굴을 묻어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샴페인을 잔을 비웠다. 주설 또한 내 옆에서 샴페인을 마셨다.

 

“저렇게 입혀놓으니 스타일이 꽤 좋은디......? 담부터 교섭을 할 때는 아이리스씨를 저런 식으로 입혀놓고 다니면...... 될 것 같어.”

“응 그래.”

 

우리 둘은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나가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의 주제 자체가 지속적인 성격을 가지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이 침묵을 덮어버리기 위해, 무의미한 소음을 난사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했지만....... 서로의 생각은 잘 알고 있었다. ‘왜 쟤들이 잘 나갈 동안, 우리는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라는 자괴감 섞인 질문이 우리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물론 내게 있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건 몹시 어색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행들이 주목을 받는 동안, 이렇게 찬밥 취급을 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다못해 주설 녀석이 사업에 대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이 정도의 기분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근데 이 녀석은...... 정작 멍석이 깔리니까 아무것도 못하고 있느냔 말이다.

 

“잘 즐기고 있는가?”

 

이런 우리 둘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리겔놈은 여러 여자들을 대동하고 우리 앞에 걸어왔다. 녀석의 얼굴은...... 주먹을 한 대 꽂아주고 싶을 정도로 자신만만해 보였다.

 

“아무리 즐겨도 너만 하겠냐?”

“옴마? 뭔 말을 그라게 껄적지근하게 허냐. 좋은 날인디 겁나게 못 놀고 있는 동료가 걱정 되가꼬 말 한번 걸어줬구만. 아 맞다. 인사들 허씨요. 아까 말 혔제? 우리 보스여.”

“어머,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리겔의 팔을 안고 있던 여자들은 주설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건 겉치레였을 뿐, 그녀들의 눈은 주설을 위 아래로 훑어보기 바빴다. 주설도 그런걸 느꼈던 걸까?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리겔을 올려다봤다.

 

“팔자 폈네잉?”

“팔자가 피기는,...... 나가 원체 스타일이 좋아야 말이제라. 주사장은 여적꺼정 그것도 몰랐소?”

“......”

“암튼, 나넌 여그 아가씨덜 허구 서로에 대해서.... 좀 더 거시기허는 시간을 가질라니께, 일 있으면 불르씨요. 안 불르면 더 좋고!”

 

그런 거들먹거리는 말을 남긴채 리겔은 아가씨들을 데리고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드는 생각이......

 

“저거...... 저번일을 담아둔거 맞지?”

“그런거 같은디? ......생각보다 쫌생이였구먼.”

“술이나 한 잔 더 하자고.”

 

이럴 때 우리에게 손을 네미는건 술잔 뿐이구나 라는 착잡한 생각을 하며, 술잔에 손을 뻗으려는데...... 으응? 내가 조금 무리했었나? 술잔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내 손으로 슥 하고 날아왔다. 이상한 노릇이군. ‘그들’에 입단하기 전에 여러 가지 적성검사를 했을 때는, 분명 ‘사이코 키네시스’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다는 판별을 받았었다. 그런류의 초능력은 ‘트라우마’나, ‘욕구’가 기저에 깔려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뒤늦게나마 이런 능력을 발휘할 정도로 내가 잠재력이 높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술 맛이 제법 괜찮지요?”

 

고개를 들어보니, 외눈안경을 낀 노신사가 내게 잔을 건네주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사이코 키네시스는 무슨.

 

“네..... 맛이 괜찮네요.”

 

노신사는 나와 주설에게 잔을 건네준 뒤에, 자신도 잔을 들어 우리와 건배를 했다. 우리는 뜻밖의 인사에 얼떨떨 하며 잔을 받았다.

 

“오늘 귀한 손님들이 오시니까, 특별히 준비를 했습니다. 샤토 무통이라고 들어보셨죠? 거기에서 특별하게 주문했어요.”

“아아...... 그렇군요.”

“샤토...... 무통이면,..... 무르짐 산맥쪽에 있는 와이너리 아녀유?”

“네, 맞습니다. 잘 아시네요? 거기는 대륙 최고의 와인 산지로 잘 알려져 있죠.”

 

돈 냄새를 맡았는지, 주설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노신사는 와인의 진가를 알아보는 그녀의 말에 신이 나서 자랑단지를 엎어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약간의 부끄러운 안도감에 몸을 맡겼다.

 

“라스알게티에서 와인 맛을 아는 분을 만나니 참 반갑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지는 주설이라구 헙니다.”

“아..... 아! 신문에서 봤습니다. 블라우 브룩에서 고생이 많으셨죠? PBRC 그 더러운 놈들이.....”

“괜잖어유...... 그래도 든든한 경호원이 둘이나 있어서 생각보단 피해가 적었쥬.”

“경호원이라면......”

 

이 대목에선 내가 나서야 할 듯 싶어 재빠르게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를 했다. 노신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께를 두드렸다. 그런데 잠깐...... 이 사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백발이 반쯤 섞인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 그러면서도 사람 좋아보이는 눈매와 입가...... 강단어린 인상과, 푸근한 인상이 섞인 이 모순적인 인상의 사내를 나는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아아, 그렇군요. 듣자하니 자네 솜씨가 제법 좋다고 들었네. 다수 대 두 명의 상황에서도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지? 그러면서도 크게 다치지도 않고 말이야. 자네들 활약으로 당분간은 PBRC놈들도 잠잠해 졌으니 우리도 덕을 좀 보았구먼 고맙네.”

“칭찬 감사합니다.”

“그리고 듣자하니, 새로운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떤 사업을.....?”

“아 그건......”

 

주설이 그의 질문에 설명을 하려던 차에, 노신사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속삭였다. 노신사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깜빡 했다며, 미안한데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냐고 양해를 구했다. 다시는 오지 않겠구나 하는 예감에 나도 주설도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 경험많은 노인은 우리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주설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 명함에는......

 

“네 있다가 뵙겠습니다. 스테반 로스차일드씨.”

 

 

 

 

 

 

 

Channel 2. 아이리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파티장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레이디, 혹시 함께하는 일행분이 있으십니까?”

“아, 저 그게......”

“혹시, 시간이 나면 같이 한 곡 추시겠습니까?”

 

제법 많은 수의 남자들이 차례대로 제게 와서 춤을 출 것을 권유해댔습니다. 파티장이 처음이라 이곳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는 잘은 몰라도, 눈치를 보아하니, 남성분들은 이렇게 여성분들에게 춤을 출 것을 권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곳 클라허 타히의 남성분들은 상당히 예의가 바른 셈이겠지요. 저에게도 와서 꼬박꼬박 예의상 춤을 추자고 권하는걸 보면 말이에요.

 

제가 춤을 출 수 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좋다고 할 만한 사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제가 그들의 실력을 받쳐줄만한 춤 솜씨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요. 저는 미안한 마음을 매순간 가지면서 그분들의 권유에 사양을 하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었습니다.

 

“어! 로키군!”

 

저는 로키군을 향해 알은체를 하려고 했지만, 로키군은 야속하게도 저의 시선을 피하고 술만 들이켜 댔습니다. 흐음..... 운터 브룩에서도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않던 사람이, 여기 와서는 술을 꿰짝으로 마실 기세에요. 아니 이렇게 파트너가 진땀을 빼고 있으면 와서 구해주지는 못할망정...... 이럴때는 정말 눈치라고는 발톱의 때만도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대체 저래서 어떻게......

 

에휴, 원망은 원망이고, 제 살길은 제가 알아서 찾아야죠. 언제까지나 그의 도움만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저는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남성분들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도망을 가야만 했습니다.

 

“어이고, 아까 보니께 존나게 바빠보이드라?”

“어?”

 

리겔이었습니다. 그는...... 오 아버님 맙소사. 한 팔에 두 명씩, 도합 네 명의 여성분들을 끼고 이곳 파티장을 누비고 있었어요. 한껏 곧추선 그의 어께며, 으스대는 태도며...... 최악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 어디 너만 하겠니.”

“아까부터 너거들은 왤케 시비여?”

“응?”

“아녀, 부창부수라는 말이 떠올라서 그려봤다.”

“아, 오빠, 이사람도 아는 사람?”

“어? 어. 야는 직장동료여. 직장동료 B정도 되는 애제.”

 

리겔의 말에 그의 팔뚝에 안겨있던 네 여자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어요. 마음 같아서는 그의 과거를 낱낱이 드러내 이곳에서 개망신을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저 또한 무사할 리가 없겠지요. 서로 다 죽고 보자는 식으로 모두가 폭로를 해버린다면, 우리 네 명은 당장 체포되어 콩밥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저는 그 생각에 꾹 참고 최대한 돌려서 한마디 쏘아붙일 수 밖에 없었어요.

 

“조심하세요. 워낙에 위험한 남자니까요.”

“하하, 이 언니 되게 재미있는 사람이네. 요즘은 이런 위험한 남자가 인기라구요.”

“봤제? 봤제? 봐봐. 그 뭐냐 저번에 멸치 대가리 같은 넘보다는, 나같은 쾌남이 대세랑께라?”

“......윽.”

“글고 이 가시내야. 기왕 이런 소리를 할꺼믄....., 아까 주사장 있는대서 했어야제, 뭣 헌다고 이리 영양가 없는 년 앞에서 칭찬을 허고 그러싸냐!”

“아야! 이 오빠 참......”

“뭐 이년아 뭐!”

“사람들 보잖아......”

 

리겔이 여자 분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자, 여자 분은 심통 섞인 표정으로 리겔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리겔은 그녀의 말에 껄껄 웃으며 몇 번 더 엉덩이를 두드렸습니다. 세상에...... 말세가 얼마 안 남았나 봅니다. 이 모습을 본다면, ‘아드님’이 뒷목잡고 이곳에 재림하시지 않을까요?

 

지독하게 담배가 땡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파티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급사에게 담배를 부탁했습니다. 급사분은 흡연장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제게...... 파이프담배를 내밀었어요. 흠...... 궐련파인 저로서는 낯설었지만, 지금 이 정신상태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는 분명 아니었지요.

 

흡연장은 테라스였습니다. 그곳에서는 귀부인이며, 신사들이며 삼삼오오 모여서 끽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앞에서 그런 풍경을 보니 멈칫할 수 밖에 없었지만,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흡연욕은 제 등을 강하게 떠밀었고, 저는 별수없이 흡연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신사분들은 제게 담뱃잎을 채워주고 불을 붙여주었습니다. 저는 그분들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한 모금을 빨아들이는데......

 

“우읍! 큭! 켁켁!”

 

으아, 정말 독하디 독했습니다. 궐련을 빨아들이듯이 연기를 빨아들였더니, 매캐한 연기가 제 기관지를 타고, 폣속으로 빨려들어갔어요. 어찌나 연기가 매콤하던지, 제 기관지며 허파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않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어휴..... 오른쪽과 왼쪽 가슴 모두가 얼얼한 건 난생 처음이었어요.

 

“아이고 저런, 속 담배를 하셨나보군요. 파이프는 궐련처럼 피우시면 안 되고 겉으로만 피우셔야 합니다.”

“큽! 큭! 예...... 그렇겠네요. 아이고 매워라.”

 

저는 이분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너무나도 송구스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파이프 담배를 빨았어요. 하..... 아무래도 궐련에 너무 익숙해서일까요? 입으로만 담배연기를 머금는 건 정말로 적응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이 연기를 그저 입속에만 머금고 있어야 한다니...... 이 얼마나 감질 나는 노릇이란 말입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 것을 또 들이마시기라도 한다면...... 이젠 정말 눈물 콧물 다 쏟을 것 같아요.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려보았지만, 이곳의 어느 누구도 궐련을 피우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별수없이 파이프 담배를 빨아보았지만, 밍숭한 맛에, 점점 약이 올랐습니다. 아 정말 누군가 제게 궐련 한 개비를 건네주기만 한다면, 전 아마 그분을 향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지 않을까.....

 

“저기, 궐련 한 대 피우시겠어요? 아무래도 파이프 담배는 익숙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

“아, 정말요? 와! 감사합니다!”

 

저를 딱하게 보던 숙녀분께서 자신의 케이스에서 필터 궐련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반가웠던 나머지, 의례껏 해야하는 사양도 생략하고 그대로 그녀에게 궐련을 받아 물어 불을 붙였습니다. 하하.....하..... 적당히 뜨겁지만 매캐하지는 않은 부드러운 연기가 목구멍을 타고 제 허파로 퍼져나갔어요. 저는 눈을 감고 이 치명적인 연기를 맛보았답니다. 정말..... 그래요..... 이 맛이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궐련을 즐겨 피우시나봐요?”

“하하, 저는 잘 안피우고요. 예전에 만났던 사람이 궐련을 좋아라해서...... 그 관성으로 아직도 들고 다니고 있네요.”

 

저는 감았던 눈을 뜨고, 이 고마운 은인 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어? 언니?”

“어? 너...... 너! 네가 여기에 왜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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