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유학에서 제사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율곡 이이 선생이 지은 격몽요결이라는 책에 나오는 제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격몽요결 제7장에 성묘와 제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우선 성묘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각 절기마다 성묘를 했다. 절기는 달마다 있으니 한 달에 한번이상은 성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격몽요결 내용에는
<근대에 들어 일상생활 자체가 바빠지면서 곡절(俗節)을 지키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그러나 큰 명절인 음력 설날이나 추석, 그리고 한식날만은 반드시 성묘를 해야 한다는 인식은 남아 있다. 특히 식목일이 가까워오는 한식날은 산소에 떼를 입히거나 산에 나무를 심기에 좋은 때이므로 주로 이날 성묘를 하는 추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상 생활이 바빠서 중요한 제례중 하나인 성묘를 제대로 할 수 없음을 이야기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시대가 변하고 샹활양식이나 문화가 변천하면서 제사, 성묘를 간략히 하는 문화가 비난 받거나 문제시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율곡 이이 선생이 세상의 변화를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는 이랬는데 요즘에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으로 세태의 흐름을 인정해 주고있다는 점이다. 전통 유교는 절대 꼰대 스럽지 않았다.
또한 제사를 지낼 때의 태도도 이야기 한다.
<재계할 때의 태도는 오로지 고인을 추모하는 것에 전념한다. 이와 같이 재계를 할 때에 그 거처를 생각하고, 그 웃음과 말소리를 생각하고, 그 뜻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 즐거워하는 바를 생각하고, 그 즐겨하는 바를 생각한다. 이렇게 한 후에 제사상 앞에 가서 서면 자연히 꼭 그 자리에 제사 지낼 분이 보이는 것과 같고, 돌아서 문으로 나오면 肅然히 꼭 그 음성이 들리는 것과 같고, 문에 나가서 들으면 愾然히 꼭 그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같게 된다. 이러한 것이 효도의 마음이며 정성스런 산재와 치재의 제사 태도다. 무릇 제사는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함을 중심으로 삼을 뿐이다. 가난하면 家産의 있고 없음에 맞추어 할 것이요, 병이 있으면 筋力을 헤아려 치르되, 재물과 힘이 미칠 수 있는 자는 스스로 마땅히 예법과 같이 해야 할 것이다.>
제사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를 지내는 후손이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에 달려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제사의 절차는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함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했다.그래서 형식을 진행하는 데만 신경을 써서 집안의 경제적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제사를 치른다면, 그 제사가 아무리 호사스럽고 풍성하며 세련되게 잘 치러졌다 하더라도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부모가 죽었는데 관을 짤 돈이없어 거적에 둘둘말아서 묻더라도 극진히 정성들여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禮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喪은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그래서 제사는 형편에 따라 지내라고했다.
첫 번째는 각 가정의 경제적 형편이다.물 한 그릇만 올리고 제사를 지내도 탓하는 이가 없었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가세가 기울어 밥 한 끼먹을 형편도 못되는 몰락한 양반도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니 제사는 음식의 풍성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나라의 형편이다. 가뭄이 들거나 역병, 전쟁 때에는 제사를 생략했었다.
또한 제사를 지내고 난 후에 병을 얻는 다면 그 제사는 잘 못된 제사라고 했다.
(재계함에 있어서도 제사 지내는 사람의 건상 상태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야지 지나치게 형식에 매어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키는 것 역시 제사를 제대로 치르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제사란 집안의 형편과 제사 지내는 사람의 건강에 따라 힘닿는 데까지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학에서는 제사는 남녀가 같이 준비하라고 했으니 남자는 술마시고 놀고 여자만 죽어라고 음식하는 문화는 유학의 전통 문화가 아니었다. 전통 유학의 문화를 현대롸 비교해 보면 전혀 꼰대스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