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11-귀족노조(두번째)

l죠리퐁l 작성일 22.05.06 12: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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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11-귀족노조(두번째)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역사는 매우 짧습니다. 서양에서 100년에 걸쳐 발생한 일이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수 십 년 만에 일어납니다. 지극히 한국적 이랄까요? 사실 한국에서 단시간에 노동운동이 활발히 성장한 여러 사례를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노동 환경이 서양보다 더 열악했으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더 험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 노동운동은 한 때는 세계 노동운동사에 귀감이 될 정도였습니다. 이런 한국 노동운동사에 등장하는 노동귀족은 어용노조의 설립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노동 운동의 역사는 세계 노동 운동의 흐름과 비슷한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한국의 노동 운동의 시작은 쇄국정책과 집권세력의 다툼으로 인해서 역사적으로 늦게 잉태되었습니다. 다만 유럽의 시민혁명과 비슷한 형태의 혁명도 등장한다는 점에서 세계 여러 나라와 비교했을 때 큰 틀에서의 역사적 흐름은 비슷하게 이어졌습니다.

조선 후기 시대에는 양반에 의한 양인과 노비 계급의 착취가 매우 심했습니다. 이는 기득권 세력의 수탈에 지방 양반까지 착취에 가세하여 농노와 노비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죠. 군인에게 지급할 쌀에 모래를 가득 섞은 것이 계기가 되어 발생한 난 이었으니 당시 백성의 어려운 생활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러니 기존의 계급 질서를 바꾸기 위한 민중의 바람은 매우 컸습니다. 1884년 10월에는 김옥균을 비롯한 사회 지식인을 중심으로 봉건 시대에서 근대주의 국가로 이행을 위한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조선말 봉건 사회에 대한 개혁의 열망에 사회 불만이 더해져 유럽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같은 혁명이 벌어졌으니 이른바 동학농민혁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조정의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갑오개혁을 단행하는 단초가 됩니다. 대한민국의 시민혁명은 1884년부터 시작해서 지난 2016년 겨울까지 이어졌으니 132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네요. 하여튼 대한민국은 봉건체제에서 근대 국가로의 전환이 서양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서양이 봉건 사회의 문제를 깨고 새로운 근대 사회로 전환을 이루었다면 조선은 그런 문제의식보다는 지배계급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근대 사회로 전환이었습니다. 서양은 이런 역사적 전환을 계기로 시민계급이 등장했죠. 계급 질서가 무너지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한 사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봉건 시대 계급의 틀이 그대로 대한제국으로 이어졌습니다. 단지 양방과 양인. 노비라는 호칭만 사라졌지 사회적 기능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한일 합방을 당합니다. 대한민국은 서양과 같은 역사적 이벤트 없이 자본이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됩니다. 특히 일본 자본가와 일본에 협조한 반민족주의자 자본에 의한 수탈은 극심했습니다.

제국주의 자본은 자원과 이윤을 본국으로 가져갈 뿐 확대 재생산을 위한 재투자를 하지 않았고, 노동력의 양성이나 노동조건의 양보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식민지 자원은 고갈되고 노동자는 극도로 피폐해졌습니다. (이원보-한국노동사회연구소. 2013년)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마냥 당하고 산 것만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인 서양열강의 식민쟁탈이 극에 달하는 조선 후기부터 노동자의 투쟁은 있었습니다. 한국 노동자의 최초 투쟁은 1888년 함경도 초산의 광부들이 가혹한 세금과 핍박에 분노해서 관청을 습격했습니다. 1892년 경북 예천, 1898년 강원도 당현의 파업. 1901년에는 운산금광 노동자가 노동 조건개선뿐만 아니라 채굴권이 미국과 독일에 넘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집단 파업이 있었습니다. 전남 목포에서는 부두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 반대와 중간착취 거부 등을 요구하며 일본 기업인을 상대로 8차례에 걸친 동맹파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노동자의 파업과 투쟁은 식민지배 시기에 접어들면서 노동조건 개선과 임금 인상뿐만 아니라 민족해방 투쟁을 병행하게 됩니다.

한일합방 후 일본의 식민지 수탈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제의 식량 수탈로 인해 토지를 잃은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몰려들면서 1930년대 실업자 수는 100만 명에 달했습니다. 특히 상용 노동자는 반농 반노의 계절노동자와 중국인 노동자와도 경쟁을 했었습니다. 급여는 일본인 남성 노동자의 월급을 100으로 했을 때 그 절반인 50이었고 성인 여성 노동자 임금은 25%였을 정도로 저임금에 시달렸습니다. 게다가 1910년 급여를 100으로 했을 때 1917년에는 49.1로 떨어지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까지 있었습니다. 여기에 노동자의 일 평균 노동시간은 12~16시간이었고 년간 작업 일수는 인쇄. 제본 노동자가 297일, 연초공장 노동자가 350일에 달할 정도로 극심한 노동강도를 견뎌야 했습니다.

이런 일본제국의 착취 속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은 계속됐습니다. 특히 노동조합이 매우 활발히 조직되어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청년동맹조직, 여성운동인 근우회, 백정이 모인 형평사 등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병행하였는데 1926년 6.10 만세운동을 계기로 신간회라는 이름으로 통일됩니다. 1920년대 벌어진 원산총파업은 하나의 도시에 속한 모든 산업 노동자가 총파업을 한 세계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노동쟁의로써 우리나라 노동계급이 식민시대에 얼마나 성장을 했는지 잘 보여준 사례입니다.

1945년 해방 후에도 일제 강점기와 다름없는 수탈은 여전했습니다. 반민족주의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요 정치, 경제분야에 중용했었죠.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본에게 강제 취득한 산업시설과 토지를 재 할당하는 데 있어 자본가와 기득권 세력에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할당했습니다. 일제 식민시대를 거쳤다는 점에서 큰돈이 있거나 관공서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기존의 자본가, 기득권 자, 반민족주의자였습니다. 첫출발이 잘 못 되었습니다. 봉건국가에서 근대 국가의 전환이 기득권 세력의 입맛대로 이루어졌고 뒤를 이어 해방 후 실시된 사회, 정치, 경제분야의 재편 역시 기존 기득권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민중의 형편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노동자의 형편은 당시 혼란한 시국에 한국전쟁까지 겹쳐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 내용을 확인해 보면 노동 취업자는 1949년 26만 6천 명에서 1960년에는 23만 5천 명으로 오히려 감소했으며, 총수입 중에서 차입금이 14%에 달할 정도로 형편이 곤궁했습니다. 1957년 보건사회부 조사에 따르면 월평균 수입이 2만 153 환인데 생활비가 4만 509 환이었으니 매달 적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작업장의 환경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으니 국가는 해방되었지만 노동자는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1945년 전국 40여 개 지역에서 50만 명의 노동자가 모여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이하 전평)>라는 이름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노동조합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전평은 최저임금제와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주차와 월차휴가를 보장하며 단체협약권을 확립하고 공장 폐쇄나 무단 해고를 반대하는 등 노동 기본권 확립을 위해 많은 투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 타도를 기치로 1954년 정부 주도의 우익 노동조합을 별도로 결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노총>의 전신인 <대한독립 촉성 노동 총 연맹(이하 대한노총)>입니다. 대한노총은 주로 이승만 정권의 권력 유지와 자본가 및 기득권 세력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는데 특히 전평을 분쇄하기 위한 활동을 활발히 진행했으니 이 시기부터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 탄압이 시작됩니다. 이승만 정권은 여기에 더해서 1953년 자본가의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는 노동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노동법이 악용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 사업장에서 두 개의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복수노조를 금지하는 법안입니다. 이 복수노조 금지 법안은 대한노총이 전평을 분쇄하고 <어용노조>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듭니다.

기업에서 <어용노조>를 만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노동자의 권익을 중시하기보다 자본가의 입장을 대변하고 오로지 기업을 위해 일하는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어용노조는 사업장이 만들어지는 시점에 기업 주도로 노동조합을 자체 결성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애초에 기업의 편에선 노동자를 골라서 뽑고 그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형태입니다. 두 번째 방법으로는 기존 노조를 분쇄하고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형태입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할 경우 기업은 사업장을 일시 폐쇄합니다. 그리고 기업의 입장에 반대하는 모든 노동자를 해고해 버립니다. 기업은 용역깡패를 일시 고용합니다. 새로 고용된 노동자 -사실은 깡패 노동자-는 오로지 기존 노동자를 사업장에서 쫓아내기 위해 일시적으로 고용되었을 뿐입니다. 결국 투쟁 중인 노동자는 구타와 협박에 못 이겨 사업장 밖으로 쫓겨납니다. 회사는 친 회사적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어용노조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1953년 제정된 복수노조금지 법안은 어용노조가 자리 잡은 사업장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어용노조는 철저히 회사에 의해 회사를 위해 결성된 노동조합입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이승만의 정권 유지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어용노조가 활발히 결성됩니다. 대한노총은 공권력과 결탁하여 전평을 분쇄하기 위한 활동을 벌입니다. 결국 전평은 해산되기에 이릅니다. 전평의 좌익 용공화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지만 당시 시대상에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는 오로지 기득권과 자본세력만을 대변하였기에 전평의 투쟁 방향이 좌익으로 쏠렸고 결국 공산주의화되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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