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7-노동자? 근로자?(세 번째)

l죠리퐁l 작성일 22.03.29 08:12:11 수정일 22.03.29 11:5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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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7-노동자? 근로자?(세 번째)

3.노동자는 누구인가?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인 능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생존에 필요한 재화나 현물을 받는 행위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노동자는 당연히 계약관계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쪽입니다. 공장을 만든 사용자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자신의 필요에 의해 노동을 제공할 사람을 찾는다면, 노동자 역시 생존하기 위함이라는 필요에 따라 재화(임금)를 받는 조건으로 사용자에게 노동을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합니다. 노동계약(혹은 근로계약)은 자동차를 사거나 부동산을 매매할 때 계약서를 쓰는 행위와 동일한 거래 행위입니다. 단지 거래하는 물건이 상품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행위라는 점이 다른 것뿐이죠. 그래서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는 갑과 을의 관계가 형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는 사장의 업무 지시를 따르는 것은 맞지만 본연의 업무. 즉 계약에서 벗어난 업무지시는 이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른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하는 것이죠. 또한 사용자가 계약한 시간을 초과하는 시간에 노동을 요구할 때는 추가 수당을 지급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노동 계약과 노동법의 기본 바탕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단지 계약에 포함된 사람을 말할까요?


노동의 개념을 알아본 첫 번째와 두 번째 게시물을 보면 정신적 행위도 노동의 본질로 이야기합니다. 정신적 노동자로는 <교사>나 <학자> 같은 계층이 대표적입니다. 그러니 이런 직업군도 노동자에 포함됩니다. 이 외에도 노동자에는 소 상공인도 포함됩니다. 엄연히 <대표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자본가 계급에 포함되기는 소유한 자본이 너무 미비한 수준이죠.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한 고용주라 할 지라도 직원과 같이 일(노동)을 하면, 고용주라는 신분을 갖더라도 노동자의 개념에 포함됩니다. 또한, 큰 자본에 귀속된 자본가도 노동자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존재한다는 프랜차이즈 ‘00 통닭집’ 사장님도 본인은 사용자(가계 주인)지만, 더 큰 자본가인 본사 회장님에 귀속되어 자본가의 일방적인 계약 관계에 속해있으니 노동자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노동자에 속 할까요? 거대 자본가도 그냥 놀고먹지는 않습니다. 대 그룹의 회장님도 엄연히 자신이 맡은 <일>이라는 것을 하죠. 그 사람들도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어떤 행위를 통해 적정한 수준(?)의 대가를 지불받습니다.

 

2029년 5월 31일 대법원은 승객이 현금으로 낸 2400원을 횡령한 혐의로 회사에서 해고된 버스 운전기사가 낸 해고 무효소송을 이유 없음으로 기각시켰습니다. 횡령 금액이 적고 현금을 받아 미쳐 정리하지 못한 단순 실수라는 기사의 해명보다는 횡령은 해고에 해당한다는 사규에 입각한 버스 회사의 처분이 합당하다고 본 사례입니다. 경력 17년 차 버스기사는 올해 53세의 나이로 해고되어 앞으로 생계가 막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사례와 비슷한 결과를 보여주는 사례는 자본가가 횡령하여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가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고 해서 생존에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같은 실직 상황이라도 노동자와 자본가의 실직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노동자의 노동은 생존과 직결되지만, 자본가의 노동은 생존을 넘는 다른 개념이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근대 사회학자들은 자본가의 노동을 쾌락에 의한 노동으로 분류합니다. 노동자가 육체적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노동을 하지만 자본가의 노동은 육체적 생존을 넘어 정신적 쾌락을 위한 노동을 한다고 결론 내린 것이죠.


프랑스 철학자 샤를 푸리에의 <노동이 발전하면 쾌락을 위한 노동을 한다.>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의 노동은 순수하고도 고결합니다. 비록 하는 일은 하찮거나 더러운 물건을 만진다고 해도 그 의미는 매우 순수하고 순결한 노동입니다. 만일 노동자의 행위가 하찮거나 더럽다고 여긴다면, 인간 생명도 하찮거나 더럽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인간 생존에 따른 노동은 인간이 탄생했을 때부터 존재했습니다. 과일을 따 먹든, 풀을 베어 먹든, 생존에 필요한 육체적 활동은 노동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사회가 발전한 현대에서 청소를 직업으로 하든, 사무실에서 펜을 굴리든 생존을 위한 노동이라면 모두 고귀한 노동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어떤 노동이 귀하고 어떤 노동이 더럽다면 인간 자체가 귀하고 더러운 인간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노동 행위는 모두 똑같이 고귀합니다. 여담이지만 위 버스기사의 법적 판단은 <법 감정>을 저버린 판결이라 하겠습니다. 노동의 본질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 판결인 거죠. 차라리 횡령한 금액을 정량적으로 환원시켜 판단하는 게 더 낮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을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상황으로 내 모는 대표적인 판결 사례입니다.

자본가의 노동은 육체적 노동이기보다는 정신노동에 해당합니다. 자본가의 노동은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노동은 아닙니다. 자본가는 이미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간혹 자본가가 자신의 육체를 이용한 노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노동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 육체적 노동도 생존과는 동떨어진 노동인 거죠. 이른바 쾌락을 위한 노동입니다.

<누가 노동자인가?>를 알아봤는데 여기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무직 사원-엔지니어 직군>과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의 범주입니다. 우선 <사무직 사원도 노동자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렇다>입니다. 인력을 담당하든, 총무나 재무를 담당하든, 아니면 기술직에 속한 엔지니어라도 모든 사무직 직원은 육체적 노동을 하는 노동자와 같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정신적. 육체적 행위를 통해서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얻으므로 노동을 하는 것이고, 사용자와 계약관계에 있으니 엄연한 노동자입니다. 노무 관리를 하는 담당자가 회사를 대표해서 임금 교섭의 실무 위원의 역할을 하더라도 그는 엄연한 노동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무직 노동자가 현장직 노동자를 위한 정책보다는 사용자를 위한 일을 많이 하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같은 노동자라면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죠. 철학자 마르크스는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동이 미래에는 서로 분리된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 노동자는 육체적 노동자와 다른 길을 간다라고 예상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넘어 독점화되는 <독점자본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독점자본주의는 자본가들 사이에서 발생한 부의 양극화로 인해 특정한 자본이 다른 자본을 지배하거나 특정 자본이 대부분의 생산품을 독점 생산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의 자본이 여러 기업을 거느리는 형태인 그룹화된 자본의 출연을 이야기합니다. 공장이나 회사가 그룹화되면서 더 이상 특정한 한 사람이 전체 공장이나 회사를 운영하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창업자가 여러 회사를 모두 컨트롤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거대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영인이 필요하게 됩니다. 즉, 자본가에 의해 고용된 사장이 필요한 것이죠. 이런 현상이 사무를 위주로 하는 정신 노동자에게 열리게 되고, 정신 노동자는 육체 노동자와 분리되게 됩니다. 자본가가 될 수는 없지만, 자본가와 비슷한 신분까지 상승이 가능한 신분 상승의 길이 사무직군에게 열리게 된 것이죠. 그래서 사무직군은 노동자이면서도 노동자를 대변하지 않게 됩니다. 언젠가는 회사의 대표가 될 몸이기에 노동자보다는 사용자 측에서 노동을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다음으로 노동자의 범주입니다. 노동자라는 개념을 가진 직업군 이면서도 노동자와 분리된 사무직군과 같이 노동자 이면서 노동자의 범위에 속하지 않은 직업은 또 있습니다. 대표적인 직업이 바로 <학자>, <교사>, <예술가>와 같은 직업입니다. 이 직업은 큰 틀에서 <지식인 계급>으로 분류합니다. 이들은 학자나 예술인의 양심에 비추어 행동하므로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해서 활동하기보다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인 분석과 통찰을 통해 현재 사회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것을 신념으로 생각하는 집단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인 계급>이 갖는 위치와 영향력은 매우 중대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회주의 사상가는 <계급혁명은 상대적인 빈곤 계층인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하는 혁명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면서도 그 혁명이 샐 행 되기 위해서는 지식인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깨우치는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계몽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등 인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이론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무식한 노동자가 사회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키게 되면, 다음에는 엄청난 혼란만 남게 됩니다. 이 사회를 어떻게 유지시키고 발전시켜야 하는가?라는 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고, 부패의 온상이었던 구 시대 계급(귀족이나 왕족)과 다시 손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에는 지식인 계급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객관적인 시선과 생각을 가진 지식인은 <누가 정권을 잡느냐> 보다는 이 사회가 더 좋은 사회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왕정 사회에서 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했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도래한 세상에서도 시민을 돕기 위한 활동을 했습니다. 지식인 계급의 도움은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다리가 됩니다. 물론 이런 과정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은 아닙니다. 중국은 지식인 계급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문화 대혁명>이라는 엄청난 지식인이 숙청을 당해야만 했죠. 아이러니하게도 시민 혁명이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한국에서 지식인 집단의 도움을 통해 사회가 잘 유지되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약 일주일간 자연스럽게 일어난 현상입니다. 프랑스의 파리코뮌에 버금가는 광주코뮌의 등장이었죠. 시민군이 독재 군부를 몰아내고 전남 도청을 점령한 일주일간 광주는 무정부 상태였습니다. 이때 광주의 질서를 잡고 광주를 운영한 것이 바로 지식인 그룹의 활동이었습니다. 혼란한 시기에 오히려 자율적 통제와 시민 협조가 잘 이루어진 역사적인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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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980년 광주에서 자발적으로 시민군을 조직하고 파리코뮌처럼 자유와 민주주의가 민중 삶의 핵심 성격으로 자리매김되며 범죄율이 급감하는 등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뤘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어떤 관점에서는 파리코뮌(1871년)보다 세계 민주주의에 미친 영향이 더 크다”라고 강조했다.)

다음으로는 노동자 이면서도 노동자 계급과 분리된 계급이 농민 계급입니다. 농민 계급은 봉건 시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계급 계층이지만 산업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요 계급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또한, 초창기 노동자가 주도하는 혁명에서도 소외되었습니다. 이는 농민계급은 계급 혁명을 옹호하면서도 신 산업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업화에 따른 자신들의 역할이나 일자리가 축소되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죠.

노동의 개념에서 접근해 보면 노동자 계급에 속하면서도 산업 노동자와는 다른 형태를 가진 지식인, 농민, 정신 노동자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노동자는 누구인가?를 확인해 봤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자본가는 자유를 좋아하고, 노동자는 평등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노동조합이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는 이유와 자본주의가 따르는 자유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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