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4-노동의 역사는 왜 계급투쟁의 역사인가?(두번째)

l죠리퐁l 작성일 22.03.25 09:3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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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4-노동의 역사는 왜 계급투쟁의 역사인가?(두번째)

 

 

1601년 영국에서 '구민법'이 시행됩니다. 이 법은 1495년 헨리 8세가 제정한 이른바 ‘피의 입법’에 근간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1562년에 만들어진 '도제에 관한 법률'①이나 1662년 '정주법', '강제 취로법'은 모두 '경제외 강제법' 개념을 갖는 전형적인 악법입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등지에서는 농노와 같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핍박이 극심한 상태였습니다. 농업에서 산업화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부유한 지주계급이나 신흥 부르주아지 계급은 일반 시민으로 대변되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에 대해서 폭력적인 착취를 일삼습니다. 계급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을 노예와 같이 취급하는 것이 크게 문제 되지 않기에 중앙 정부(왕실) 조차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방법으로 시민을 착취하는데 일조합니다. 특히 양모 산업이 농업보다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기에 많은 지주가 대부분 농토를 목축지로 바꿉니다. 같은 토지를 비교했을 때 농사를 지을 경우에는 토지에 투입되는 인원과 생산품을 팔아 버는 수익이 크지 않은 반면 양모를 생산하는 목축업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을 투입하면서도 높은 부가가치의 양모를 생산하기에 많은 지주가 토지를 목축지로 바꿉니다. 살 곳을 잃은 시민(영세 지주를 포함한 농노와 소작인)은 공유지로 내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척박한 공유지조차 지주 계급에게 수탈 당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당시 국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은 거지 노릇조차 면허가 있어야 가능할 정도였으며 사람이 가축처럼 팔리는 인신매매가 성행하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습니다. 

 

-폭력적으로 토지를 수탈당하고 쫓겨나 부랑자가 되었던 농민들은 기괴하고 무서운 법률로 말미암아 암노동제도에 필요한 훈련을 받도록 채찍을 맞고, 낙인을 찍히고 고문을 당하였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진전됨에 따라 교육이나 전통 또는 관습에 의해서 이 생산양식의 요구를 자명한 자연법칙으로 인정하는 노동자계급이 발전해 나간다. 일단 완성된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조작은 모든 저항을 분쇄하고, 상대적 과잉인구의 끊임없는 창출을 통해서 노동의 수요-공급 법칙을 유지하며, 그 결과 임금수준을 자본의 증식 요구에 알맞은 범위 내에서 유지... (자본론: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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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으러 도시로 몰려듭니다. 농노나 소작농 뿐만 아니라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도 가진 토지를 강제 징수 당하면서 고향을 등지게 됩니다. 당시 유럽 사회는 방적 산업이 활발한 시기였지만 아직 대규모 공장이 들어서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도시로 몰려든 서민은 대부분이 빈민으로 추락합니다. 일자리는 부족한 반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많아졌으니 노동 단가는 떨어지게 되고 자본가의 노동 착취는 극심해집니다. 실제 하루 벌어서 먹고사는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과도한 집세(집이 부족한 반면 사람이 넘쳐나서 집 가격이 폭등합니다)를 낼 수 있는 형편이 못되어 거리에서 잠을 청했으며 먹을 수 있는 빵을 사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결국 하루 종일 일을 해도 형편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생활에 부담이 되기에 일을 하기보다 오히려 구걸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기에 구직을 포기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결국 이런 악순환은 사회 문제화됩니다. 빈민 소굴이 늘고 각종 질병이 창궐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양산 ② 합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일자리를 갖지 않은 도시 빈민을 강제로 일하게 하는 법률을 만듭니다. 이른바 빈민 구제사업으로 포장된 위 법률들은 사실 일하지 않는 빈민의 노동을 활용하도록 강제하는 법률로써 노동 단가를 떨어트리고 노동 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도구로 활용됩니다. 정부는 포화 상태가 된 노동시장을 조절하는 노력 대신 구민법을 통해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도록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 정부는 강제 노역장을 직접 설치해 노동자는 물론이고 그 자녀까지 강제 노역을 하도록 하는 법률을 시행합니다. 이는 16세기 중반 프랑스에서도 노역장이 등장하고, 18세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법을 통해 빈민이나 고아, 수용소 제소자를 대상으로 직업훈련을 시켜 저임금 노동에 활용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합니다. 이러한 방법은 "국가권력은 자본에 대한 노동의 ‘정상적인’ 종속의 확립과 관계의 ‘정상화’실현이라는 논리로, 새롭게 출현하는 부르주아지의 이윤 취득을 입법 수단을 통해 보장했다. 이는 일을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게으른 사람’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일을 시키려는 국가의 ‘극진한’(?) 관심을 나타낸다. (USSR Academy of sciences 1980)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817년 프랑스 리옹에 위치한 모자 제조공장 노동자는 임금 인하에 반대해서 대규모 파업을 일으킵니다. 1824년에는 목면 공장에서 식사시간을 30분으로 줄인데 항의하는 대규모 파업이 일어납니다.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노동자의 작은 권리를 찾는 이러한 종류의 파업을 주동한 지도자는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1830년 8월에 루앙에서 일어난 파업 조건은 '하루 노동시간 12시간으로 축소하고 지각에 대한 벌금 규정을 철폐하며, 불량품 발생 시 노동자 임금에서 공제하는 제도를 철폐하라'라는 주장이었습니다. 1820년대 중반부터 벌어진 미국 노동자 파업의 중요 사안은 '하루 노동시간 10시간으로 축소'였습니다. 1811년에 노팅엄에서는 임금 수준을 명시하고 불량품 생산을 금지하는 조건을 내건 노동자의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거의 한 세기에 달하는 노동자 파업, 저항운동을 제압한 주체는 고용주가 아니라 대부분 정부와 군대에 의해 제압을 당했습니다. 자본가와 정부가 어떤 유착관계였는지 쉽게 짐작이 가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파업의 결과는 지도자에 대한 사형이라는 무거운 처벌입니다.

 

당시 노동은 하루 벌어 살아가기도 빠듯할 정도의 저임금. 매우 열악한 작업장 환경.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시간이 대부분이었으며 여기에 더해 아동을 이용하거나 야간노동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했습니다. 1802년과 1819년 영국. 1893년 프로이센. 1841년 프랑스. 1845년 러시아 등에서 만들어진 '아동노동 금지법'은 실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오히려 1812년 작업장 기계를 훼손하는 노동자에게 주어진 14년 구속형이 사형으로 강화되는 법안이 시행됩니다. 1799년에 입법 청원한 '최저임금제 도입', 1811년 4월 '임금 인하를 반대'하는 입법. 5월 '임금 인하 반대와 최저임금 시행. 보조금 지급'을 명시한 입법과 같은 노동자를 위한 입법 청원은 모두 무산되게 됩니다. 하지만,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법률 ③은 빠르게 시행됩니다. 특히 1799년과 1800년 영국에서는 '노동조합 단결 금지법'이 시행됩니다. 의회는 "노동자들의 단결은 자신의 고용주와 수련공에 대한 모반의 성격을 띤 것이고, 직업의 확산에 필요한 ‘훈련’에 대한 파괴적 행위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노동의 근본 개념은 '생존권' 확보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동을 통해 생존을 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지난 글에도 밝혔듯이 그 노동이 지적 노동이든 육체적 노동이든 노동의 목적이 생존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생존의 관계는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사실입니다. 생존이 계급이나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한 조건이라면 생존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역시 평등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불평등 조건은 당연히 있겠지만 생존이 노동과 연결되는 조건 자체는 반드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러한 평등한 기준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노동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집단이 등장했으니 바로 지배 계급입니다. 여기서부터 불평등은 시작됩니다. 대표적인 지배 계급인 왕은 지적, 육체적 노동이 아닌 국가의 상징이라는 존재적 가치 하나만으로도 생존을 담보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면 직접 노동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얻습니다. 그렇게 번 생존에 필수인 '노동의 대가'의 일부를 떼서 국가를 상징하는 존재에게 받치는 거죠. 왕은 말 그대로 존재하는 것 자체로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지배자 주위에는 그와 생각이나 행동을 같이하는 귀족계급이 왕을 호위하면서 왕과 같은 방법을 통해 생존을 보장받습니다. 가깝게는 지금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 역시 직접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국가의 상징적 존재로써 생존을 담보 받습니다. 물론 왕과 같다면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키니 국가수반으로써 적절한 임무. 즉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았다고 말하는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노동에 상응하는 일을 한 것으로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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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귀족의 전유물인 노동을 하지 않고 생존을 하며, 국가 권력의 전체를 쥐고 흔드는 불평등한 계급구조에 다른 존재가 끼어들게 됩니다. 중세 기말부터 유럽은 권력자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수많은 전쟁을 했는데 이런 전쟁에 따른 결과는 왕실과 국가 재정이 파탄 나는 것이었습니다.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상인이 부르주아지 계급으로 형성되고 신분 상승을 노리는 부르주아지 계급은 기존 기득권 계급과 결탁하게 됩니다. 신분 상승을 꿈꾸는 돈 많은 사람과 돈이 필요한 기득권 계급이 돈과 신분을 맞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겨나는 것이죠. 바로 매관매직입니다. 이런 현상은 조선조 말에도 많았죠. 돈 많은 부유한 상인이 돈으로 신분(양반이나 귀족)을 사는 행위입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 따라 돈은 곧 권력이 되고 부르주아 계급은 지배권을 행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기존 귀족과 왕실 계급과 부르주아 두 계급 간 결탁이 이루어진 거죠. 이 과정의 방점이 부르주아 혁명입니다. 이런 혁명의 완성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흘린 많은 피가 바탕이 되었고 절대적 지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에 따르는 모든 열매는 부르주아가 차지합니다. 그리고, 입법 행위를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합니다. 이런 현상은 초기 산업혁명과 1차 식민시대를 지나 1차 세계대전, 대공황 그리고 2차 식민시대와 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프롤레타리아는 기존 투쟁 방법으로는 원하는 목적인 신분이 평등한 조건. 노동에 따르는 대가가 평등한 조건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파업이나 소요 행위로는 부르주아와 지배계급의 양보를 이끌어 낼 수가 없었던 거죠. 결국 프롤레타리아가 과거 시민혁명과 같은 피를 통한 방법이 아닌 평화적 혁명을 통해서 평등을 보장받으려면 민주주의의 근간인 '투표권'의 확보와 함께 입법 권한을 쥐고 있는 정치세계로 진출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혁명적 투쟁에서 한 단계 발전한 정치적 투쟁인 계급투쟁을 시작하게 된 거죠.

 

1836년~1837년 영국 런던에서 '노동자협회'가 창립합니다. 같은 시기 버밍엄에서는 '정치동맹'이 결성되고 북부와 서부에서는 '노던 스타지'가 발간되어 활발한 노동운동을 지도합니다. 1837년 가구 직공 출신이자 노동자 협회의 대표인 W.러빗은 '인민헌장'을 만들어 1938년 5월 영국 전역에 배포합니다. 1938년 8월 버밍엄 집회에 20만 명이 참가하였으며 맨체스터에서 5만 명, 요코셔집회 2만 5천 명이 참가하는 등 전국으로 확산된 이 노동자 운동은 영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민중이 지지하고 참가하게 됩니다. 이른바 민중혁명으로 알려진 '차티스트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보통선거권'을 얻기 위한 민중 투쟁으로 1848년에는 200만 명이 참가할 정도로 규모가 커집니다. 당시 영국에서 600만 명이 넘는 21세 성인 남자 중에서 투표권을 인정받는 사람은 기득권과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한 상위 84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극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현상입니다. 그런 현상은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현실이죠. 소수 기득권과 재벌 사이에 형성된 막강한 카르텔이 전체 국민을 지배하는 현실입니다. 일반 시민계급(프롤레타리아)은 소수 인원인 84만 명이 국가를 운영하는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는 자본가와 지배계급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보통 선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임금 노동자를 중심으로 '차티스트 운동'을 활발히 전개합니다. 차티스트 운동은 약 10여 년간 영국 전역에서 벌어졌다가 소멸되었지만 그 결과로 1867년 중. 소 상공업자와 도시 노동자가 투표권을 얻는 선거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추가로 1884년에 농촌 노동자와 광산 노동자가, 1918년에는 21세 이상의 남자와 30세 이상의 여자 모두가 투표권을 얻는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1928년에는 모든 21세 남자와 여자가 선거권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평화로운 방식의 민중 혁명인 계급투쟁을 통해서 정치혁명을 일구어 낸 거죠.

 

물론 선거권을 획득한다고 해서 노동자의 처지가 한 번에 좋아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노동자의 착취는 여전히 있었고 노동자에 불리한 법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선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은 기존에 있었던 노동자의 권리 요구가 단순 청원운동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나타났음을 의미합니다. 유럽 주요 국가에서는 '사회민주당(사민당)' '노동당' '공산당'같은 노동자를 위한 정당이 만들어지고, 노동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입법 활동을 활발하게 하게 됩니다. 이 게시물 서두에 이야기한 상황과 비추어 본다면 말 그대로 천지가 개벽한 상황까지 이루어 낸 거죠. 이런 결실에는 수많은 시민이 피와 목숨을 담보로 한 시민 혁명과 수많은 노동자의 단체 행동이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새로운 형태의 민중 운동을 통해 이루어낸 계급 투쟁의 결실은 시민을 위한 입법의 기초가 됩니다.

 

흔히 인류의 역사는 그 자체로도 계급 투쟁의 역사라 합니다. 그 이유는 유일한 하나의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수많은 암투와 전쟁이 인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대화된 형태의 국가가 나타난 이후에는 계급 투쟁이 기존에 나타났던 특정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 계급에 걸쳐 나타납니다.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가기 위한 신분 상승의 꿈은 개인뿐만 아니라 일부 집단에게도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봉건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 실현된 거죠.

 

계급투쟁의 역사가 18~19세기에 끝난 것은 아닙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는 노동자의 계급 투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도 노동자의 계급 투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입니다.<끝>

 

----< 주 >---

① '도제에 관한 법률'이나: 도제제도는 중세 유럽 시대에 시작된 제도로써 일반 노동자가 기능직 일을 배우는 데 있어서 산업 현장에서 직접 일을 하면서 배우는 제도로 기능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별도로 추가되는 학습 비용 없이 고급 기능을 습득할 수 있고, 기능을 가리키는 장인 입장에서는 노동력을 거의 무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도제법은 향후 노동력 착취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도제 학습의 잔재가 남아 있는데 한국에서는 직업계 고등학생을 2학년 때부터 현장실습을 나가도록 하여 안전사고나 폭력 등 인권 침해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특히 2017년 제주도에서 현장 실습 도중 사망한 학생의 경우 과중한 업무와 안전대책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다가 발생한 사고로 중세 시대부터 시작된 문제가 많은 도제법이 아직 한국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친화적 법률이 아직 존재하고 있습니다.

 

도제법은 1563년 엘리자베스 1세에 의해 제정된 도제법의 정식 명칭은 '직인. 일용 노동자. 머슴 및 도제에 관한 법률입니다. 이 법은 농촌 공업을 억제하고 도시 공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노동시간, 임금 규정을 정한 것으로 1814년에 폐지됩니다.

 

② 많은 문제점을 양산: 한 좁은 지하실에서 10명이 살고 있다... 빈센트 스트리트, 그린 에어 프레이즈 및 리즈에는 1,450명의 주민, 435개의 침대 및 36개의 변소를 가진 223채의 집이 있다.... 하나의 침대에 평균 3.3명, 때로는 5~6명이 자는데 침대가 없는 사람도 있다.(자본론:마르크스)

 

③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법률: 14세기부터 '단결금지법'이 철폐된 1825년까지 노동자의 단결은 중범죄로 취급되었다. 1349년의 노동자 법과 그 후속 법령들의 정신은 국가가 임금의 상한선은 정하지만 그 하한선은 결코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단결금지법은 노동자 조직의 설립이나 활동을 금지한 법률로, 1799년과 1800년에 영국 의회가 채택했다. 1824년 의회는 이 법률을 폐지했지만, 그 후에도 노동자 조직 가입, 스트라이크 참가 선동 등등은 강요 강제로 간주되어 형법상 처벌을 받았다."

 

고용하려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귀를 자르고 낙인을 찍는 규정과 함께 임금을 낮게 묶어두려는 법률이 여전히 존속하였다. 엘리자베스 제위 5년에 도제법 제3장에 따라 치안판사에게는 각종 임금을 결정하고 또 계절이나 물가에 대응하여 이를 변경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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