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인 설이 되어 차롓상을 준비하면서 제사라는 풍습에 대해서 간략히 적습니다. 제는 예로부터 왕이 하늘에 점을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늘에 점을 쳐서 국가를 운영하였는데 이때 하는 행사가 제였죠. 이 행위가 사회가 발전하면서 왕실의 고유한 품습에서 민간에게도 전해집니다.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에는 돈이 많은 상인계급이 봉분을 하사받은 지방 영주(천자가 아닌 왕)와 결합해서 군권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는데 이른바 패왕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전쟁이 비일비재하고 사회 질서가 무너진 혼란한 시대에 공자는 예를 지켜 사회를 안정 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제사는 <각자 형편에 맞게 지내라>라고 했습니다. 그 형편은 시대적인 형편, 지역적 형편, 경제적 형편과 사회 지위에 따른 형편을 모두 고려해서 각자 정성껏 모셔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형편이란 것이 전쟁통에는 재사를 생략해도 된다는 의미죠. 그리고 조선 시대에는 임진란 직전에 인구가 천 만명 정도였는데 양반의 비율이 5~7% 정도였다고 합니다. 약 50~70만명이 양반 계급이었는데 이 중에서 제사를 제대로 지낼만한 형편이 되는 양반은 극히 일부였습니다. 그러니 요즘처럼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를 차리는 일은 없었던 것이죠.
우리도 조선 시대에는 각자 형편에 맞게 제사를 지냈지 요즘처럼 상다리 부러지게 차린 사례는 조선 후기에나 등장합니다. 돈 많은 상인이 벼슬을 돈주고 사서 양반 행세를 하던 때부터 허례허식이 일반화 되기 시작한 것이죠.
1577년 율곡 이이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편찬한 <격몽요결>이란 책에는 제사에 대한 구절이 있습니다.
<제사의 절차는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함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제사란 바로 이러한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는 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는 형식인데, 형식을 진행하는 데만 신경을 써서 집안의 경제적 형편은 고려하지 않고 제사를 치른다면, 그 제사가 아무리 호사스럽고 풍성하며 세련되게 잘 치러졌다 하더라도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재계함에 있어서도 제사 지내는 사람의 건상 상태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야지 지나치게 형식에 매어 오히려 건강을 악화시키는 것 역시 제사를 제대로 치르는 것이 아니다. 모름지기 제사란 집안의 형편과 제사 지내는 사람의 건강에 따라 힘닿는 데까지 사랑하고 공경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공자 역시 “禮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喪은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다.[禮 與其奢也 寧儉 喪 與其易也 寧戚] 《論語》 〈八佾〉”고 한 것이다.>
또한 소학에는 제사는 남녀를 가지리 않고 모두가 준비를 해야 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데 남녀가 따로 없다는 말이니 여자는 부엌에서 전 굽고 남자는 술마시며 노는 행위도 전통 유학의 가르침에는 맞지 않습니다.
홍동백서를 가리지 말고 각자 형편에 맞게 차리고, 집안 식구 모두가 제사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시고, 새해에도 하시는 일 모두 성취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