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기초 철학 12 (비트켄슈타인 1)

로오데 작성일 22.01.23 14:49:58 수정일 22.01.23 1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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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 (독일어: 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년 4월 26일 ~ 1951년 4월 29일)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책 <논리 철학 논고>의 지은이는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이다. 그에 관해서는 지금 이 개설서에서는 어느 철학자보다도 더 길게 다룰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논리실증주의와 아울러 ‘일상언어 학파’라고 불리는 철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철학 운동은 함께 20세기 분석 철학적 전통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일상 언어 학파는 논리실증주의를 여러 측면에서 비판하고 있다.

 

 비트켄슈타인은 부유하고 세련된 비엔나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물리적 부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그는 물려받은 유산을 모두 포기하고서 1911년에 영국 맨체스터로 가서 항공 공학을 공부한다. 영국에서는 그는 수학적 재능을 널리 인증받아 케임브리지로 가서 버트란드 러셀과 함께 공부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군에 입대하려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참호에서도 배낭에 종이를 잔뜩 넣고 다녔다고 한다. 곧, 그는 이탈리아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포로 시절부터 <논리 철학 논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이 책은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세르반데스의 <돈키호테>와 더불어 ‘감옥에서 쓴 위대한 책’의 반열에 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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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라.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 논리 철학 논고-

 

 기껏해야 100쪽 분량에 불과한<논리 철학 논고>(이하 <논고>라고 줄임)는 7가지 명제를 다루고 있다. 각 명제들의 뒤에는 그 명제들에 관한 관찰, 혹은 그 관찰에 관한 관찰에 관한 관찰들이 숫자로 매겨져 서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첫 쪽은 이렇게 시작한다.

 

1      -  세계는 사건의 집합이다.

  1. 1.1   -  세계는 사실들의 총제이며,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
  2. 1. 11 -  세계는 사실들에 의해 결정되며, 또한 그 사실들이 곧 모든 사실이라는 점에 의해 결정된다.
  3. 1. 12 -  사실들의 총체는무엇이 사건이고 무엇이 사건이 아닌지를 결정한다.
  4. 1. 13 -  논리적 공간에서의 사실들은 세계다.
  5. 1. 2  -  세계는 사실들로 분할된다.
  6. 1. 21 -  사실들의 각 항목들은 사건이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나, 그 밖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는다.
  7. 2     -  사건을 이루는 것 - 사실 - 은 사태의 존재다.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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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제 1 - 세계는 사건의 집합이다.
  1.  
  2.  
  3. 비트켄슈타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에 관해 참된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구조는 반드시 철학의 구조를 반영해야 한다. 그것이 1. 1 “세계는 사실들의 총체이며,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다”라는 명제의 의미다. 그렇다면 세계를 이루는 사실들이란 뭘까? 그것은 러셀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원자적 사실들이다. 그것은 가장 단순한 사실이며, 단순한 진리로서 다른 모든 복잡한 진리를 분석하는 토대가 된다. <논고>에에서 비트켄슈타인은 그 사실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말 하지 않았다. 실증주의자들이 ‘프로토콜 명제’‘확정 명제’를 만들려 하면서 찾고자 애썼던 것이 바로 비트켄슈타인이 말하는 사실들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4.  <논고>에서 실증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실증주의자들은 비트켄슈타인이 다음과 같이 제시한 철학관에 대해서도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5.  
  6.  
  7. 철학 저작들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무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종류의 
  8. 질문에 답변할 수 없으며, 다만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점만 확증할 수 있을 뿐이다.(4.003)

 

  1. 올바른 철학적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말할 수 있는 것, 
  2. 즉 철학과 무관한 중립적 과학의 명제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3. 만약 누군가가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4. 그가 자신의 명제에 사용된 특정한 기호들의 의미를 밝히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주면된다. …… 
  5. 이 방법이야말로 유일하게 엄밀하고 올바른 철학 방법이다.(6. 53)
  6.  
  7. *주석 - 괄호 안에 숫자로 표시해놓았는데, 이는 쪽수가 아니라 비트켄슈타인 자신이 문단에 며겨놓은 숫자다.
  8.  
  9. 이러한 주장은 논리실증주의의 ‘강경한’ 입장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비트켄슈타인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여겼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논고>에는 비엔나 서클의 철학자들에게 상당한 불안감을 안겨주는 당혹스런 진술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비트켄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10.  "이책의 전체적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명확하게 말해야 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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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

 

 비트켄슈타인의 이 말을 실증주의자들은 이렇게 해석하고자 했다. “형이상학자들은 입을 닥쳐라!” 그러나 비트켄슈타인 자신은 그가 말한 ‘침묵’이라는 것에 대해 묘한 매력을 느꼈던 듯 그것에 관해 수수께끼 같은 암시를 던지고 있다. 6. 54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누구나 종국에는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즉, 내 명제들을 다 이용하여 높은 곳에 오르고 난 뒤에는 그것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사다리를 이용한 다음에는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내 명제들을 초월해야만 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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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후 반납

 

 

 여기서 비트켄슈타인은 자신의 명제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특수한 형태의 고급스런 무의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고급스런 무의미란 어떤 것일까? 비트켄슈타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1.  
  2. 고급스런 존재는 사물들이 세계 안에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3. 신은 세계 내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6. 432)
  4.  
  5. 알 수 없는 것은 사물들이 세계내에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6. 44)
  6.  
  7.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를 푸는 방법은 공간과 시간에서 벗어나 있다. (8. 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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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적군이였다 “그는 신비주의자야!”

 서서히, 그리고 경악스럽게 비엔나 서클은 진실을 알게 되었다. 비트켄슈타인은 신비주의자다! 그는 형이상학자보다 ‘나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비트켄슈타인은 <논고>에 만족한 듯했다. 그 책은 유의미하게 제기된 모든 철학적 문제에 대해서 완벽하게 답변한 것처럼 보였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도 볼 수 있다. “답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에는 질문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수수께끼란 없다. 질문이 제대로 이루어질 경우에만 그에 대한 답변이 가능하다.”(6. 5)

 비트켄슈타인은 철학을 버렸다. 그후 그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지의 시골로 들어가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생활에 제대로 만족할 수 없었으며, 그의 마음은 늘 불안정했다. 비트켄슈타인을 케임브리지에 복귀시키는 일에 앞장선 인물은 러셀이었다. 그는<논고>를 비트켄슈타인의 박사 학위 논문으로 승인했다. 비트켄슈타인에게는 은퇴한 G. E. 무어의 교수직이 주어졌다. 이윽고 비트켄슈타인이 철학계에 복귀하자 사람들은 커다란 흥분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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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곧 소문이 나돌았다. 비트켄슈타인은 이제 과거와 다른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괴팍한 비트켄슈타인이 자신의 견해에 대해 밝히지 않았고 자신의 학생들에게도 함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그의 새로운 철학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의록을 받아적어 등사한 문건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시기 그의 저작은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철학적 탐구>(이하 <탐구>로 줄임)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 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오래 전에 비트켄슈타인의 사상이 크게 달라졌다는 것은 이미 분명해졌다. 좋든 싫든<논고>의 실증주의와 신비주의는 사라졌다. 그러나 두 저작은 어느 정도 공통분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철학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의미와 관련되어 있었고, 여전히 언어 지향적이었다. <논고>에서 비트켄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5. 6)라고 쓴 바 있는데, 그 견해는 <탐구>에서도 여전히 유효했다. 다만, <탐구>에서는<논고>보다 언어 자체가 덜 제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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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탐구

 

 먼저, 의미의 문제를 살펴보면 <탐구>에 관해 알아보자. 플라톤에서 <논고>에 이르기까지 철학사 전체를 통틀어 중요한 의미의 모델은 외연, 즉 지시의 모델이었다. 프레게나 러셀, <논고>의 지은이 같은 철학자들도 외연과 내포(지시된 사물에 관한 함축된 의미)를 구분하고 외연에 우선권을 부여했다.(즉, 언어를 언어 자체로서가 아니라 외부의 지시 대상과 관련된 것으로만 보았다는 뜻이다.) 비트켄슈타인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지시 모델을 의미론의 주요 모델로 우선시한 결과, 서양 사상에는 형이상학이 널리 퍼지는 오류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단어란 불변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사물을 지시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관찰 가능한 세계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이상 세계의 형상론을 개발한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단어는 세계 내에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실체를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세 유명론자들도 역시 단어가 이름(지시)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다만 그들은 아무 것도 명명하지 않았다(유명론). 따라서 그들의 결론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장미의 이름>의 마지막 문장으로 나오듯이, “우리에겐 단지 이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경험론자들은 단어가 감각 자료를 지시하며, 그렇지 않은 단어는 모두 의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용주의자들은 단어가 행위를 지시한다고 믿었고, 러셀과 초기 비트켄슈타인은 단어가 원자적 사실을 지시한다고 여겼다.

 후기 비트켄슈타인은 이런 전통을 완전히 부수고서 “단어의 의미는 그 사용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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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그림

 

 도구함 안의 도구들을 생각해보자. 망치, 펜, 톱, 드라이버, 자, 아교 냄비, 아교, 못, 나사 등등이 있다. 단어의 기능은 이 물건들의 기능만큼이나 다양하다(실제로 단어와 도구는 유사성이 있다). …… 그것은 마치 기관차의 운전실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모든 손잡이는 서로 비슷하게 보인다.(손잡이가 있어야 다룰 수 있으니까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손잡이는 기관차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크랭크의 핸들(밸브의 여닫음을 통제한다)이고, 또 어떤 손잡이는 기관을 켜고 끌 수 있는 두가지 기능만 가진 스위치다. 또한 잡아당기면 기관차의 작동을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 레버가 있는가 하면, 앞뒤로만 당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펌프 손잡이도 있다. (11. 12)

 

 언어 역시 도구들이나 기관차 안의 장치들처럼 특정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가 수행하는 그 일 속에서 발견된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특정한 목적을 향해 급히 자동차를 운전해가고 있다고 하자. 헤드라이트가 부수어졌기 때문에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그런데 운전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제기랄! 해가 벌써 졌잖아.” 그때 조수석에 탄 사람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해가 졌다고 말하면 안되지. 그건 지구가 자전축을 중심으로 저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이야.” 그의 말은 도대체 의미가 있을까?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에서는 그의 말이 아무런 일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상황에서라면 그 말도 어떤 일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상황에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삽입하는 것은 실상 미친 짓이나 다름없다. 또한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자동차 글러브 박스에서 망치를 발견하고는 “망치는 치라고 있는 거야”하고 말하면서 운전자를 망치로 때리려 한다면, 그것역시 미친 짓이다. 망치의 용도가 치는 데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아무나 치라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주장이 성립한다. 

 하지만 도구는 많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망치는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고 문진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언어는 어떨까? 논리실증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언어에는 표현적 기능과 표상적 기능이라는 두 가지 기능밖에 없는 걸까? 비트켄슈타인은 이렇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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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문장의 종류는 얼마나 많은가? 문장에는 긍정문, 의문문, 명령문 같은 것만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종류가 있다. ‘기호’, ‘단어’, ‘문장’ 등을 사용하는 방식은 무수히 많다. 더구나 이런 방식들도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언어, 새로운 언어 게임이 탄생하기도 하고, 쓸모없어지고 잊혀지는 언어도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이다.(23)

 

 여기서 비트켄슈타인이 말하는 의미론의 또 다른 특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의미는 용도다”라는 주징이다. 그는 이렇게 쓴다. “단어란 진정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체스에서 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 체스의 한 말이 가지는 의미는 체스 게임에서의 역할에 달려 있다.”(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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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게임은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비트켄슈타인은 언어를 ‘언어 게임’이라는 말로 부르면서 자신의 주장을 일반화한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자. 모든 게임은 규칙에 의해 지배된다. 체스 게임의 말(카드 게임의 칩이나 카드)이 가지는 ‘의미’는 체스 게임의 규칙 아래서 그것이 가지는 용도에서 비롯된다. 폰(체스의 줄)이란 무엇인가? 폰은 정사각형의 한 칸을 전진하며, 첫 번째 움직일 때는 두 칸까지 전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말이다. 또 폰은 대각선 방향으로 적의 말을 잡아먹을 수 있고, 상대방 진영의 끝까지 가면 퀸으로 바뀔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말이다. 단어, 문구, 표현 등도 그와 마찬가지다. 즉, 규칙의 지배를 받으면, 그 의미는 언어 게임의 규칙 아래서 그것이 가지는 용도에서 비롯된다. 

 

 

  •  
  •  
  • 용어 해석

 

논리실증주의 (logical positivism) :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에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분석 철학에서 시작된 운동, 과학적 성향을 지닌 철학자들과 철학적 성향을 지닌 과학자들이 19세기 유럽 철학자들의 거대 형이상학에 대한 대응으로 이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의 목표는 철학에 과학적 근거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철학은 논리적 문석에 국한되어야 하며, 따라서 유일하게 참되고 의미 있는 명제는 수학, 논리학, 과학의 명제뿐이다. 여타의 명제들은 시적이고, 감성적이고, 유추적이거나, 무의미하다.

 

원자적 사실 (atomic facts) : 버트란드 러셀과 기타 분석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로, 모든 사실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단순한 사실을 뜻한다. 원자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로, 즉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다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원자적 사실’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합의된 내용이 없다. 어떤 분석 철학자들은 감각 자료에 관한 사실이라고 규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문자 그대로 물리적인 사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철학자중 한명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2부에서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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