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기초 철학 8 (노자-老子)

로오데 작성일 21.10.08 00:30:34 수정일 21.10.08 00: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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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지음

 

1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무명 천지지시 유명 만물지모

 

故常無欲 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徼

 

고상무욕 이관기묘 상유욕 이관기요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차양자 동출이이명 동위지현 현지우현 중묘지문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지우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을

천지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만물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욕심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욕심이 있으면

그 가생이를 본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만 달리했을 뿐이다.

그 같음을 일컬어 가믈타고 한다.

가믈코 또 가믈토다!

뭇 묘함이 모두

이 문에서 나오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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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老子, Laozi)기원전 604년(추정)
중국 초나라 허난성

 

 우리가 노자를 정확히 알고 공부한다는 것은 일류 사상사에 있어서 거의 최초에 문헌화된 종합 철학 또는 종합 사상입니다. 물론 이집트에 도 있고 수메르에도 있고 고문용이 많지만, 거기에 길가메쉬도 있고 어마어마한 책들이 많죠.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 에서의 철학 사상이라고 할 적에 노자 정도의 스케일을 갖춘 완전한 한사람의 단일 저작으로서 철학 책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의미에서 노자라는 것은 인류 사상 원점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점을 안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포괄적입니다. 

 

 우리가 노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냥 중국의 선재 시대의 에 있었던 사상가 정도로만 생각 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사유에 근본을 노자는 제시 합니다. 이러한 것은 히랍 사상에서 불가능하고 플라톤, 탈레스, 헤라이클레이토스를 읽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노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미 노자의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 자본주의, 경제민주화, 인공지능의 문제 4차산업 이후 문제까지 다 있습니다. 이미 그러한 사유의 원형 등이 이미 노자에게 닿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노자를 공부 한다고 하는 것은 딱 하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노자를 배워야한다. 진정한 사고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원한다면 노자를 모르면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만큼 노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폭넓은 사회를 가르쳐 줍니다. 왜냐면 모든 고대 사상은 종교사상입니다. 인간을 억압할려는 사상이지,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려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자는 완벽한 자유를 가르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노자를 귀하게 여기고, 노자는 억만분의 일도 종교적 색채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훨씬 더 유교보다도 원초적인 사상, 원초를 접해야만 오늘날 우리의 모든 사고가 보입니다. 노자를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상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오메가 포인트를 아는 것입니다. 앞으로 인류가 두뇌가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노자를 떠날 수 없습니다.    - 도올 노자 강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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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 사마천이 이야기 해줍니다.

[史記列傳(사기열전)] 권63 老子韓非列傳(노자한비열전) 老子(노자)

 

 

열전(列傳)

 

총 70편. 왕과 제후 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개인들을 다룬다. 대상은 영웅, 정치가, 학자, 군인, 일반 서민까지 다양하다

 

권61
백이권62
관중안영권63열전3노자한비 열전
(老子韓非列傳)노자(老子), 장자(莊子), 신불해(申不害), 한비(韓非)권64
사마 양저권65
손무손빈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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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공자를 가르친 위대한 사상가

 

 

 

老子者 楚苦縣厲鄉曲仁里人也

 

姓李氏 名耳 字耼 周守藏室之史也

 

 “초나라의 고현에 여향 동네에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며, 이름은 귀(貴)다. 자는 담(聃), 주나라의 장서실(국립도서관) 사관(관장)이다. 노나라에 살고 있던 공자가 주나라에 방문할 일이 있어서 노자를 방문해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 (여기서 말하는 예(禮)는 그 당시 모든 천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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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노자에 예를 묻다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老子曰

 

子所言者 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耳 且君子得其時則駕

 

不得其時則蓬累而行 吾聞之 良賈深藏若虛

 

君子盛德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於子之身

 

吾所以告 若是而已

 

 “노자가 말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옛날 성현들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해골과 더불어 다 썩어 버린것일 뿐이다.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군자도 때를 만나면 관직에 나아가지만(수레를 타고 나간다), 때를 만나지 못하면 이리저리 날려 다니는 유랑의 신세가 될 것이오.

뛰어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숨겨두고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보이고, 군자는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으나 외모는 어리석게 보인다고 나는 들었소.

 그대는 교기(驕氣-교만한 기운)와 다욕(多欲-많은 욕심)을 버리고, 태색(態色)음지(淫志-음탕함)을 버리시오. 그런 것들은 모두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오.

내가 그대에게 말할 것은 단지 이것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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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孔子去 謂弟子曰

 

鳥 吾知其能飛 魚 吾知其能游

 

獸 吾知其能走

 

走者可以為罔 游者可以為綸

 

飛者可以為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邪

 

 “새는 잘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는 잘 헤엄침을 알며,

짐승은 잘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달리는 짐승은 그물로 잡을 수 있으며, 헤엄치는 물고기는 낚시로 낚을 수 있고,

나는 새는 화살로 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용에 대해서는 그것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오늘 내가 노자를 만나보니 그는 마치 용과 같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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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는 노자를 관병이 잡고 도덕경을 쓰다

 

 

老子修道德 其學以自隱無名為務

 

居周久之 見周之衰 乃遂去

 

至關 關令尹喜曰

 

子將隱矣 彊為我著書

 

於是老子乃著書上下篇

 

言道德之意五千餘言而去 莫知其所終

 

或曰

 

老萊子亦楚人也 著書十五篇

 

言道家之用 與孔子同時云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아서, 그의 학설은 자신을 감추어 이름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에 힘쓰는 것이었다.

노자는 주나라에서 오래 거주하다 주나라가 쇠퇴해지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그곳을 떠났다.

관문(關門)에 이르자 관령(關令) 윤희(尹喜)가 말했다.

“선생께서 앞으로 은거하시려 하니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해 저서를 남겨주십시오.”

이에 노자는 상, 하 편의 저서를 지어

도덕(道德)의 의미를 5,000여 자로 서술하고 떠나버리니, 그 후로 아무도 그의 최후를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노래자(老萊子) 역시 초나라 사람인데 15편의 저서를 남기어 도가 사상의 효용을 논하였으며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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蓋老子百有六十餘歲 或言二百餘歲

 

以其修道而養壽也

 

自孔子死之後百二十九年

 

而史記周太史儋見秦獻公曰

 

始秦與周合 合五百歲而離

 

離七十歲而霸王者出焉

 

或曰儋即老子 或曰非也 世莫知其然否

 

老子 隱君子也

 

 대체로 노자는 160여 살 혹은 200여 살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노자가 도를 닦아 수명을 양생하였기 때문이다.

공자가 죽은 지 129년 후,

사관(史官)의 기록에는 주나라 태사(太史)였던 담(儋)진 헌공(秦獻公)을 뵙고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처음에 진(秦)나라는 주(周)나라와 합해졌다가 500년 후에 나뉘어지고,

분리된 지 70년 후에는 패왕(覇王)이 나타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담이 바로 노자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하니, 세상에는 그 진위 여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노자는 은둔한 군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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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之子名宗 宗為魏將 封於段干

 

宗子注 注子宮 宮玄孫假

 

假仕於漢孝文帝

 

而假之子解為膠西王卬太傅 因家于齊焉

 

世之學老子者則絀儒學 儒學亦絀老子

 

道不同不相為謀 豈謂是邪

 

李耳無為自化 清靜自正

 

 노자의 아들은 이름을 종(宗)이라고 했는데, 종은 위(魏)나라 장군이 되어 단간(段干)에 봉해졌다.

종의 아들은 주(注), 주의 아들은 궁(宮), 궁의 현손은 가(假)라고 하였는데

가는 한(漢)나라의 효문제(孝文帝)를 섬겼다.

그리고 가의 아들 해(解)는 교서왕(膠西王) 앙(卬)태부(太傅)가 되었으므로 제(齊)나라에서 거주하였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설을 배우는 사람들은 유가의 학설을 배척하고, 유가는 노자의 학설을 배척한다.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는데,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이이(李耳:노자)무위(無爲)로써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자연히 올바르게 되도록 하였다.

 

 

 

도가도비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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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는 한사람에 의한 철학적 체계를 가진 책이다. 여지껏 중국 역사에서 철학적 체계란 것이 이해가 되지 못했다. 유교라고 하는 윤리학(서양적 언어), 정치철학 이념 즉 치자가 덕(德)정을 배푸느냐 이러한 유교적 사상에서만 도덕경을 바라 보며, 순수한 철학으로서 이해하지 않았다. 불교를 순수한 무아(無我)철학으로만 바라 본다면, 그것을 순수한 철학으로서 바라보는 사람은 극소수 일 것이다(불교도 들에게 있어서). 그러나 그렇게만 바라 본다면 불교는 잡다한 종교적 재식으로 되고 만다. 철학으로서 의미가 상실된다. 도교의 원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노장사상이다. 노장사상은 <노자>와 <장자>에 설명되어 있는 사상으로, 옛날에는 ‘황로지학(黃老之學)’이라고도 불렸다. 이후 불교가 들어오면서 도교화(종교화) 되면서 태상노군(太上老君-신격화)화 되어 버렸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라는 말이 마치 데카르트가 신을 언어를 초월한 타자적인 세계로 말하는 것처럼 도교도 태상노군(太上老君), 지존의 어떠한 인간 언어를 초월한 존재로 변질 되어져 갔다. 이처럼 노자도 이상한 초월 종교화 되어져 왔다.

 서양 철학에서는 존재론, 형이상학(본체론적 사유)이 있음으로서 끊임 없이 사유가 존재하여 왔고 서양철학 나름대로 순수 이론적인 측면이 있다. 중국에는 이러한 것들이 없기 때문에 노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체계라는 것이 순수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본적이 없다. 

 철학이라는 것이 우주와 인간을 포괄하는 하나의 시스템인데 서양적 시각으로 바라본 노자는 존재론 적이나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곡해 되었다. 여지껏 노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으로서 이해되지 못하였다. 대부분이 도교라던가 장생술, 연단, 신체이론 등 아주 천박하게, 장자 또한 이러한 식으로 짬뽕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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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道可道 非常道

 

 여기서 말하는 도(道)는 way(우주의 길, 자연의 길), 보편자의 길이라고 말하며 또 한편으로 말한다 의 뜻으로, 서양에서 말하는 로고스(logos-말씀한다)즉 빛이고 포스이고 하나님이다.

 요한 복음 세계에서는 하나님 세계에 하시는 말씀이(logos) 어둠의 세계(cosmos)로 들어 온다. 인간이란 육체에 영(logos-하나님의 말씀)이 갇혀 있다. 하지만 영(logos)는 다시 하늘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육체라는 감옥을 탈출 하는 것은 어렵다. 결국 현실 세계(cosmos)에 같이 사는 것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영을 일깨우기 위해서(다시 하늘로 보내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 보냈다(예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구하신다] 요 1:14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기 때문에(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은 인간 사랑밖에 없다. 이웃사랑을 통해서만이 하나님 사랑을 들어 낼수 있다(이웃사랑(인간)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로 통행이 가능하다). 이것이 기독교의 논리가 된 것이고 요한복음에 깔려 있는 영주 주의라는 것이 깔려있는 논법이다. 말씀이 로고스가 되고 빛이고 하나님이 된 것이다. 그러한 가장 본질적인 현실이 도(道-보편자)이다. 道可道(도가도)는 즉 하나의 언어속에 가둬 버린다.

道(도)라는 하나의 보편자를 언어속에 가두어 버리면 하나의 작은 구체적인 사물이 되어 버리므로 항상 그러한 도가 아니다(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道)라고만 하면 되지 왜 또 명(名)이라 하는 것인가. 도와 명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도(道)는 본시 이름이 없다. 명이란 것은 이름을 가지는 것(나무, 책상, 자동차 등) 도(道) 또한 도라고 말하고 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물도 그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말하지 말하는 것이다.(非常名)道可道 非常道 는 보편적인 것 이고 名可名 非常名 은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는 보편자개별자라는 서양 철학의 아주 본질적인 문제가 나와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을 본체론적(형이상학)으로 해석 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세계는 항상 변화 한다고 말한다. 서양에서는 변화하는 세계는 거짓이라고 말한다. 변화하는 세계는 우리 감각에 나타나는 현상(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그 배후에는 실재(Reality)가 있는 것이 있다. 실재(Reality)불변이다. 이것이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하고 플라톤이 이어 받아서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불렀다. 불변의 이데아(idea) 즉 현실은 하나의 감각적인 세계고 영원한 불멸의 이데아로서의 현실은 영원한 것이다 이것이 서양 철학의 이데아론이다. 변하는 세계속에 항상 불변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근본으로 부정하는 것이 노자의 출발이다. 그래서 이 문장을 플라톤식으로 해석한 것이 “도를 도라고 말한다면 말하여진 이치는 영원 불멸의 도가 아니다”라는 해석이 되어져 왔다. 결국은 동양철학을 완전히 서양 철학식으로 상(常-항상상)을 영원 불변식으로 해석했다. 상(常)은 존재론적(영원불변) 상(常)이 아니라 항상 그러한 모습, 항상 그러하다 영문으로 CONSTANT 이지 immutable 이 아니다.

 서양철학의 2천년의 역사는 존재론의 역사이다. 

道可道 道(도)는 개념화 시키는 것이다 인간 머릿속에 언어화된 언어속에 들어온 도는 이것은 오히려 플라톤 적이다. 플라톤적인 개념속에 고정된 불변의 도(道-언어)는 非常名 항상 그러한 도가 이니다. 즉 道可道 非常道 는 항상 변화하는 형상속에 있는 도가 아니다. 인간은 항상 변화하고 생각도 변한다 조금전 생각도 부정하는 항상 변화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상(常)의 모습이다. 변화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면 결국 변화를 지속하는 것이다. 영원 불변한 것은 없다

 

노자에 대해 좀더 알고 싶으신분은 책과 함깨 도올 티비 노자 강의 110강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IpQ4Z_y2dObDVDt4T_nl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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