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기초 철학 7 정의란 무엇인가 (칸트)

로오데 작성일 21.09.11 16:11:24 수정일 21.09.12 07: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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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짱공으로부터 택배가 왔습니다. 컵, 키홀더, 에코백, 타월, 이름 모를 부엉이 잘 사용하겠습니다.(추석 선물 같습니다.)

마침 화이자 1차 접종도 오전에 완료하였고 주사 맞은 팔뚝만 조금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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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

 공정이란 무엇인가? 평등이란 무엇인가? 그 앞서 물어야할 질문 정의란 무엇인가?

옳고 그름의 개념은 어떻게 판단할것이며, 일상에서 마주치는 도덕적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 나갈것인지를 철학적 해석으로

흔히 정의와 좋은 사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원칙과 개념을 공론화하여 21세기 화두인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책의 5장 동기를 중시하는 시각 : 이마누엘 칸트 장이 있습니다. 책속에서도 칸트를 소개하고 있지만 추가적인 부분을 기초철학에서 보충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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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독일어: Immanuel Kant [ɪˈmaːnu̯eːl kant], 1724년 4월 22일 ~ 1804년 2월 12일)

 

 칸트는 프로이센의 북동부에 위치한 옛 한자 동맹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의 칼라닌그라드)에서 평생 살았다. 거기서 그는 적어도 50세가 될 때까지 존경받는 대학 교수로서 부르주아 생활을 마음껏 즐겼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워낙 규칙적인 생활을 한 탓에 동네 주민들은 그가 오후에 산책하는 것을 보고서 시계를 맞추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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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거닐었던 다리

 

 

칸트 흄을 만나다

 

 젊은 시절에 칸트는 라이프니츠의 평범한 제자였던 크리스트안 폴 볼프에게서 합리론적 형이상학을 배웠으며, 그 기본적인 학설에 대해 전혀 의심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중 중년 후반에 접어들었을 무렵의 어느 날 칸트는 흄의<<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를 보게 되었다. 훗날 그는 그 책을 읽는 순간, “특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는 흄의 논증으로 인해 그때까지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게 허물어지는 걸 느꼈으며, 따라서 흄의 회의론을 논박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철학적 진보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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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흄에 대한 칸트의 대응은<<순수 이성 비판>>에 나와 있다. 이 저서에서 칸트는 흄의 철학으로부터 최선의 것을 추출하고, 흄의 전면적인 비판을 받은 뒤에 남아 있는 아프리오리로부터 최선의 것을 추출하여 양자를 종합하려 했다. 흄에게서 칸트는 분석/종합의 구분이라는 중요한 철학적 분석 도구를 받아들였다. 그는 모든 분석 명제들이 아프리오하며 모든 아포스테리오리한 명제들은 종합적이라는 흄의 주장을 인정했지만, 모든 종합 명제가 아포스테리오리하며 모든 아프리오리한 명제는 분석적 이라는(따라서 동어 반복이라는) 흄의 주장은 인정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칸트에 따르면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라는 게 존재한 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의 진리성을 관찰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알 수 있다는 중요한 주장이다.

 

 칸트는 그러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흄을 철학적으로 극복할 수 있고 상식이(그리고 아마 종교도) 다시 존중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러기 위해서는 흄이 부인한 앎이 실은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만 했으며, 그 방식도 흄이 그런 앎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논증이어야만 했다. 칸트는 우선 정신을 직관(즉, 인식), 오성, 이성이라는 세가지 ‘기능으로 나눈 다음에 각각의 기능에 대해서 이른바 ’초월적transcendental' 분석을 했다.

 

용어 해석

 

아포스테리오리a posteriori. : 믿음, 명제, 는증의 진리성이 오직 관찰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적 경혐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유의미한 인식이 아프스테리오리한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아프리오리a priori. : 믿음, 명제, 논증의 진리성이 관찰과는 독립적으로 알 수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각종 정의, 수적 계산, 논리학의 원칙들은 보통 아프리오리하다고 말한다. 고전적 합리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유의미한 합리론자들은 아프리오리한 진리를 본유 관념과 연관시킨다.

 

경험론empiricism. : 참된 인식은 ‘일차적으로’ 감각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인식론적 견해('순수한'경험론에서는 ‘오로지’감각 경험에서만 인식이 나온다고 본다). 경험론자들은 모든 유의미한 인식이 아포스테리오리하다고 여기며, 아프리오리한 인식은 존재하지 않거나 동어반복이라고 주장한다. ‘전형적’ 경험론자들은 로크, 버클리, 흄 등 17세기와 18세게 영국의 철학자들인데, 이들은 모두 본유 관념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 정신을 태어날 때부터 ‘백지’라고 가정했다.

 

합리론rationalism.: 참된 인식은 ‘일차적으로’이성으로부터 나온다고 보는 인식론적 견해('순수한'합리론에서는'오로지'이성에서만 인식이 나온다고 본다). 정신은 스스로 물질을 만들어내서 그것에 작용을 가할 수 있다. 대개의 합리론에서 이 물질은 본유 관념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합리론에서는 아프리오리한 인식이 가장 중요한 인식 형태이다. 합리론적 존재론에서는 정신과 세계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전형적인 합리론자들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등 17세기와 18세기에 활동했던 대륙의 철학자달인데, 그밖에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헤겔 같은 철학자들도 합리론자로 분류된다.

 

인식론dualism.: 실재는 보통 정신과 신체라고 부르는 두 가지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존재론적 견해(데카르트가 대표자).

 

 

칸트 인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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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인식론

 

 칸트는 먼저 직관의 기능을 다룬다. 여기서 칸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식은 어떤 것인가?”도, “인식은 가능한가?”도 아니고,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한다는 상식적인 견해에서부터 출발하여, 그 인식이 가능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를 물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칸트는 경험론자들이 말하듯이 우리는 공간 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오로지 감각자료만 인식할 수 있는 데에도 어떻게 마터호른산의 높이에 관해 참인 문장을 말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또한 우리는 시간을 인식할 수 없고 오직 감각 자료만 인식할 수 있는 데에도 어떻게 베를린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의 양에 관한 참인 문장을 말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한 칸트의 해결책은 공간과 시간이 인식 기능이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고양이가 양탄자 위에 있다”는 아포스테리오리한 문장은 실상"대상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문장의 진리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앞의 문장이 참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뒤의 문장이 참이 아니라면 앞이 문장도 참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뒤의 문장은 분석 명제가 아니므로(공간과 시간에 관한 감각 자료가 없다. 이 점에서 흄은 옳다).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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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양탄자 위에 있다  (공간 시간)

 

 

 데카르트는 이런 분석 방법을 가르켜 ‘초월적 연역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초월’이란 직접적인 관찰을 초월하여 그 배후에 있는 필연적 조건들을 발견한다는 의미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칸트는 공간과 시간이 외부 세계의 특성이 아니라 정신의 구조 안에 내재하는 특성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인간 정신은 공간과 시간을 통해 받아들인 자료를 분석한다.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사용하는 ‘벗을 수 없는 안경’과 같다. 체스에 비유한다면, 공간과 시간은 체스판처럼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체스의 규칙에 해당한다. 체스를 둘 때는 규칙에 따라야 하며, 규칙이 없다면 체스 게임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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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시간의 안경

 

 

오성의 범주

 

  이렇게 직관 기능의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를 발견하고 난 뒤에 칸트는 오성이 가능으로 넘어간다. 이것은 세계에 관한 사실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기능이다(백두산이 지리산보다 더 높다든가, 고양이가 양탄자 위에 있다든가……). 여기서도 칸트는 “세계에 관한 앎이 가능한가?”하는 질문부터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가 그런 앎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상식적 전제를 출발점으로 해서 어떻게 그런 앎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그는 그 앎이 오성 기능의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오성의 범주'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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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brunch.co.kr/@kibokk/31

 이 범주에는 동일성/복수성/총체성, 인과성, 실재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개념들은 정신이 실제로 부터 연역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정신이 실재에 주입한 것이다. 바로 이때문에 흄은 그것을 ‘바깥’에서 찾아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것이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문장(이것을 흄은 경험적인 것도 아니고 정의상 참인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은 칸트에 따르면,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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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종합적 아프리오리의 범주

 칸트는 또한 수학이 종합적 아프리오리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우선 수학이 아프리오리의 지위를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수학적 지삭이 관찰로부터 독립적이기 때문이다.(여러분의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다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이 가르쳐준 것은 사실 옳지 않다. 선생님은 분필더미 두 개를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다. “두 개의 분필 더미에다 세 개를 더하면 다섯 개의 분필 더미가 되죠. ‘따라서’ 2+3=5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 2더하기 3이 5가 되는 것은 분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러나 수학은 또한 종합적이기도 하다. 수학은 세계에 관해 우리에게 말해주기 때문이다. 즉, 수학적 명제는 정의처럼 공허한 동어 반복에 불과한 게 아니다.

 

 칸트가 말하는 이러한 종합적 아프리오리 이론은 분명히 플라톤-데카르트적 본유 관념을 연상케 하지만, 그들과 칸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칸트는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특정한 종합적이고 아프리오리한 규칙에 따라 자료를 분석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감각이 정보를 입력하면 관념을 생산하도록 되어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즉,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간/공간/실재성/인과성 등과 같은 개념들을 통해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은 ‘사물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조직해야 하지만, 정신의 ‘바깥’에 실재라는 게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은 인과적 순서에 따라 세계를 이해해야 하지만, 정신의 바깥에 어떤 사건의 원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칸트는 서로 싸우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절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내용 없는 사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주장은, 합리론자들에게 감각자료만이 앎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으며, 경험론자들에게는 감각의 역할이 없이는 어떤 앎도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칸트의 해결책은 여러 모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칸트는 모종의 궁극적 실재가 존재하지만 인간 정신은 그것을 알 수 없다는 혼란스럼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그 실재를 칸트는 본체적 세계 또는 ‘물 자체Ding-an-sich’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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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체적 세계(이 말은 사물의 ‘외양’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온 ‘현상’이라는 말과 대조적으로, 외양의 ‘사물’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는 외양의 배후에 있는 실재다. 우리는 외양은 뭔가의 외양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필연성의 인간인 우리는 본체적 세계에 접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앎은 이른바 ‘현상계’-인간 정신에 의해 인식, 지각, 해석, 분석, 이론화된 세계-에 관한 지식으로 제한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인간 정신을 통해, 즉 공간과 시간, 오성의 범주라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세계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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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흄의 결론과는 반대로, 칸트에 따르면 상식과 과학은 현상계에 적용되는 한에서만 타당하다. 그러나 궁극적 실재에 관해서는, 다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본체적 세계라는 개념을 칸트는 제한적 개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본체적 실재가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있으나 그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러한 제한적 개념은 플라톤에서부터 라이프니츠에 이르는 철학자들이 발전시켜온 전통적인 형이상학이 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칸트는 이성의 기능에 대한 초월적 분석으로부터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순수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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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이성 비판>이 나오면서 이전의 형이상학은 붕괴 하였다.

 

칸트는 이성의 기능을 ‘신’이나 ‘영혼’같은 ‘순수한’ 개념(즉, 감각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개념)을 낳는 것으로 가정한다. 그럼 이런 기능에는 종합적 아프리오리한 토대가 있을까?(이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우리는 궁극적 실재에 관해 ‘더 높은 진리’를 알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칸트는 없다고 했는데, 이러한 단정은 당시의 형이상학과 신학에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공간, 시간, 인과성 등 관찰 가능한 세계에만 적용할 수 있는 개념들을 부당하게 본체적인 세계에까지 적용하고 있으므로 잘못된 사유 체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에 대한 일체의 증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으며, 그와 더불어 궁극적 실재를 ‘실체’라는 신비스러운 범주로 서술하려는 시도도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인간은 신, 정의, 불멸, 자유 등등에 관해 알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면 그 관념들은 모두 인간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칸트가 <순수 이성 비판>을 여기서 끝맺었더라면, 그는 상식과 과학의 옹호자들이 동의하는 선에서 형이상학과 신학에 대한 흄적인 비판을 완성했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내부에 있는 더 높은 정서를 향한 충동까지 만족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한 충동에 대해 칸트는 그 책의 다른 부분들에서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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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 비판

 거기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이렇다. 시간, 공간, 인과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할 논리적 필연성은 있지만 신, 불멸, 정의, 자유의 관점에서 세계를 인식해야 할 논리적 필연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급 정서들이 없다면 인간은 삶의 열정을 잃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영혼이 자유롭다든가 궁극적으로 정의가 승리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면, 일상 세계에 참여할 동기를 갖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우리가 신, 영혼, 불멸, 정의, 자유가 존재한다고 믿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단,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필요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인(즉, 도덕적인) 필요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주제들이 마치 종합적 아프리오리 진리인 것처럼 여길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 나은, 더 성공적인 인간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칸트가 도덕적 필연성에 대한 믿음에 뿌리를 둔 채 지식과 믿음을 구분하려 한 것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받았다. 특히 형이상학자와 신학자들의 거창한 주장에는 신물을 느끼지만, 그래도 현대 세계에서 믿음의 적절한 역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칸트의 이론에서 큰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칸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신을 앞문에서 내쫓고서 뒷문으로 들어오게 한데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내용이 너무 길어지는듯 하여 2편에서 나머지 이야기를 적겠습니다.

 

 철학편 글을 올리면 인기가 없내요. 어려운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철학을 이해하면 좀더 넓은 세상을 바라 보면서 생각에 잠길수 있습니다. 한번에 이해 할수 없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듯 보시더라도 아 ~ 이런 철학자도 있었지 그의 사상은 무엇이였고 언제적 인물이였다 정도만 아셔도 성공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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