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 별거 가정 (完) - 쓰기로 다짐했다

무럭무럭열매 작성일 22.06.17 08: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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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의점에서 오랜 기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편의점에서 가장 좋은 향기가 나는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초콜릿 진열대도 아니고, 꽃이 놓여있는 매대도 아니다. 편의점에서 가장 좋은 향기가 나는 곳은 바로 담배가 보관되어있는 창고다.

 

담배 포장지에 어떤 처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배 창고와 진열대에는 언제나 마음을 나긋하게 하는 향기가 났다. 담배 창고에서 보루 채 포장된 담배를 꺼낼 때마다 아기 옷 냄새 같기도 하고 봄바람 냄새 같기도 한 기분 좋은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 참고로 나는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인생은 담배 진열대 같은 게 아닐까. 우리는 모두 타르와 니코틴 같은 어두운 마음을 가슴에 하나씩 품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겉으로 풍기는 향기까지 타르와 니코틴 냄새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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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나는 엄마 곁에서 자라지 못하는 상실감과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없는 가난 등을 겪으면서 감추고 싶은 것이 늘었다. 그럼에도 그런 환경을 숨기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환경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쓸 때면 무언가 옳은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죄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필요하면 나의 과거를 숨기지 않고 말해주기로 다짐했을 때 마음이 후련했다. 감출 것이 없는 기분은 아기 옷 냄새와 봄바람 같았다. 그런 순간을 느끼고부터 진실의 가치를 높이 받들기 시작했다.

 

스스로 진실한 사람이 되는 것에만 마음을 기울이면 문제될 게 없겠지만, 진실하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버릇이 생긴 게 문제였다. 내숭과 가식을 떠는 사람을 거짓이라며 손가락질하고, 겉모습에 치중한 사람은 알맹이가 별거 없을 거라고 제멋대로 짐작했다. 소위 ‘선생님 병’이 도진 것이다.

 

담배 포장지를 뜯으며 그런 과거들이 떠올랐다. 나 역시 보잘 것 없는 알맹이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던 때가 있었는데 아니, 지금도 애쓰고 있는데 나와 같은 행동을 하는 타인을 손가락질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때로는 별 볼일 없는 알맹이를 감추기 위해 화려한 포장지도 필요한 법이다. 그게 가식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 또한 삶의 한 방식일 뿐이다. 삶을 이겨내기 위한 방식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는 것을 이제는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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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닷가에서 노는 소년이었다. 내가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한 조약돌을 찾아 주우며 놀고 있을 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의 영역으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뉴턴이 죽기 전에 한 말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바탕으로 고전물리학을 정립한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도 자신이 그저 진리의 바다 앞에서 조약돌을 줍고 놀았던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는 뉴턴의 겸손한 고백이다.

 

우리는 가끔 사소한 일에 큰 의미가 부여된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내 인생에서 전부인 것 같았던 일이 실은 인생의 작은 조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내게는 별거 가정이라는 환경이 이와 같았다. 불완전한 환경 속에서 홀로 발버둥치고 있던 그때에도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진실을 감추고 내 앞에 고요히 펼쳐져 있었다.

 

진리의 바다가 감추고 있던 진실은 무엇인가. 바다에 널려있는 그 어떤 조약돌도 소중하거나 하찮지 않다.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은 조약돌이 아닌, 조약돌을 줍는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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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에 울고 웃는다. 그럴 때면 나는 삶이 하나의 축구 경기라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은 축구 경기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패스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축구 선수들은 패스가 성공했다고 자만하지도 않고, 패스가 실패했다고 절망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절묘한 패스도 한 번의 패스로는 승패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선수들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포츠 선수들은 경기 중에 일어나는 작은 순간들로 승패를 장담하지 않는다. 

 

개운하게 해결되는 일 없이 삐걱대며 나아가는 일상 속에서 오직 시간만이 아쉬울 것 하나 없다는 듯 무심하면서도 예외 없이 흘러간다. 우리 역시 순간순간에 연연하지 말고 경기가 끝나는 순간까지 희망을 놓지 말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세 번도, 두 번도 아닌 한 번의 경기가 주어졌다. 삶이라는 경기 말이다.

 

나다움을 찾는 것,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부터 나는 쓰기로 다짐했다. 전에는 감추고 싶었던 이야기로 페이지를 하나씩 채우면서, 나는 모래밭에서 조약돌을 줍는 것을 그만 두고 진리의 바다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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