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 별거 가정 (15) - 20년 만에 작성하는 이혼서류

무럭무럭열매 작성일 22.05.19 21: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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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과 내가 차례로 결혼하면서 주민등록등본에서 이름이 하나씩 떨어지고 등본에는 엄마 아빠 둘의 이름만이 남았다. 아들딸이 모두 서류상으로 독립을 이루자, 엄마와 아빠는 더 이상 미뤄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이혼을 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이혼을 하겠다는 의사를 굳이 아들에게 내비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이혼에는 내 역할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와 아빠는 ‘서류 작업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처럼 서류 작업이라면 하나같이 싫은 소리를 냈다. 때문에 코로나 생활지원금이나 연말정산 등을 신청할 때면 언제나 아들딸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와 둘이 있으면 어색하다는 이유로 나보고 지방법원을 같이 가자고 했다. 나 역시 어색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어쩔 수 없지’라는 마음으로 엄마 아빠와 셋이 지방법원에서 보자는 약속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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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빠는 내 결혼식 때 이후로 몇 년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지방법원 입구에서 엄마는 마치 어제 만난 친구처럼 아빠에게 인사했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명랑해서 오히려 어색한 분위기가 있었다. 아빠는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같은 무뚝뚝한 말투로 엄마의 인사를 받았다. 아빠는 평소에도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 편이었기에 아빠의 그런 모습이 내 눈에는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20년을 떨어져 지낸 관계를 마무리하는 데는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재산분할이라던가 양육권 같은 까다로운 문제도 걸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마치 등본을 떼러 온 사람들처럼 이혼 절차를 밟았다.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한 얼굴로 합의이혼 서류를 작성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내게는 조금 기이해 보일 정도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혼은 마치 느슨하게 엉켜 있는 실타래를 푸는 작업 같았다. 실타래의 끝을 살며시 당기자, 그것은 오래전부터 그런 손길을 기다린 것처럼 저항하지 않고 스르륵, 하고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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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행한 '졸혼'이라는 단어가 있다. 졸혼(卒婚)은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로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협의의혼접수처에 앉아 이혼 서류 작업을 거들면서, 평소에는 신경 쓰지도 않았던 그 단어가 문득 떠올랐다. 이거 완전히 우리 엄마 아빠를 위한 말이잖아, 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 부모님은 졸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전부터 졸혼을 경험한 셈이었고, 지방법원에 모인 그날 엄마와 아빠는 졸혼마저 졸업하고는 서로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 앞에 놓여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각자 가족관계증명서와 혼인관계증명서를 떼고,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와 이혼신고서를 작성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부모님의 별거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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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절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우리는 잠시 멍하니 서서 바람을 쐬었다. 아빠는 구석에서 담배를 피웠고, 엄마는 누군가에게 연락이 온 듯 핸드폰을 봤다. 나는 그런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그저 쭈뼛거리며 서있었다. 유난히 바람이 시원한 날이었다. 아빠는 담뱃불을 끄고는 헤어지기 전에 아들과 셋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엄마에게 말을 건넸다.

 

"점심은 무슨 점심이야, 나 일 있어." 엄마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빠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빠 역시 멋쩍은 표정으로 엄마를 보냈고, 별수 없이 나와 둘이 지방법원 근처에 있는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아빠는 신경 쓰지 말고 아내랑 같이 행복하게 살아.“ 점심을 먹으면서 아빠는 문득 내게 말했다. 아빠의 말에 나는 괜히 마음이 가라앉아서 짧은 대답을 내뱉고는 앞에 놓인 애꿎은 반찬들만 뒤적였다.

 

엄마와 아빠의 이별은 이미 오래전 일인데, 예상을 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혼 절차를 끝내고 서글픈 감정이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봤지만 뾰족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문득 뒤에서 아빠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기는 신경 쓰지 말라는 아빠의 말이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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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가 서류 작업도 못하는 철부지라고 생각했는데, 이혼 절차를 마치고 오히려 내가 철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엄마와 아빠는 위로의 말을 건넸고, 정작 그들은 이런 일에 위로를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내 생각보다 더 의연한 어른이었다.

 

지방법원에 갈 때만 해도 내가 부모님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얄궂은 줄 알았던 인생은 단지 내가 인생을 얄궂은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얄궂은 시선이 담긴 색안경은 벗어던지고 엄마와 아빠를 오롯이 바라보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이별을 한 채로,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면서 각자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글이 작품이 되는 공간, Br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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